이상돈

LEESANGDON

나라와 사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칼럼

1971~72년 : 혼돈의 FBI
작성일 : 2022-06-13 09:20조회 : 2,889


1971~72년 : 혼돈의 FBI


닉슨 대통령이 백악관에 특별조사팀(Special Investigation Team)이란 조직을 허용해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야기한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 CIA 국장은 리차드 헬름스(Richard Helms 1913~2002)였고 FBI 국장은 에드가 후버(J. Edgar Hoover 1895~1972. 5. 2)였다. OSS 요원으로 2차 대전 때 유럽에서 활약한 헬름스는 그 후 계속 CIA에서 근무하면서 CIA 국장으로 승진했다. 닉슨은 그런 헬름스를 유임시켰지만 CIA를 동부 엘리트 집단이 장악한 기관으로 생각한 닉슨은 CIA가 헨리 키신저를 통해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해서 CIA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닉슨은 FBI 국장 에드가 후버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후버는 해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FBI의 전신인 BI(수사국) 시절인 1924년부터 국장을 해온 에드가 후버가 이끄는 FBI는 1960년대 흑인 민권시위와 반전 시위 주동자를 도청 등을 통해서 감시했다. FBI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잦은 혼외정사를 도청해서 그 사실을 부인 코레타 킹에게 보내고, 그런 녹음 테이프를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면 존슨은 그것을 즐겨 들었다고 전해진다. FBI가 맬컴 X와 이슬람 네이션 같은 과격한 단체를 도청해서 감시했음은 물론이다. 닉슨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후버가 역대 대통령을 위시한 유력 인사의 사생활을 감시해서 자료로 축적해 놓았음도 닉슨은 잘 알고 있었다.

닉슨이 대통령이 된 1969년에 후버는 이미 74세였고 건강과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시 FBI의 2인자는 1930년부터 부국장으로 군림해 온 클라이드 톨슨(Clyde Tolson 1900~1975)이었으나 건강이 나빠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윌리엄 설리번(William C. Sullivan 1912~1977)과 마크 펠트(Mark Felt 1913~2008)가 실질적으로 2인자였다. FBI는 외부인이 국장으로 와서는 조직을 장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후버가 은퇴하거나 사망하면 설리번이나 펠트가 국장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평생 독신인 에드가 후버는 동성애자로 알려졌는데, 상대방이 FBI의 2인자인 톨슨 부국장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닉슨의 임기 첫해인 1969년 가을, 워싱턴 DC에서 열린 모라토리엄 시위는 그 규모가 사상 최대였다. 집무실에서 시위를 지켜본 존 미첼(John Mitchell 1913~1988) 법무장관은 “러시아 혁명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닉슨과 백악관 참모들은 FBI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정신이 혼미해진 후버를 교체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후버 국장을 해임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퇴하거나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닉슨은 정부 기밀이 언론에 유출되고 있음에도 FBI가 기능을 못하고 있는데 대해 특히 분노했다. 1969년 봄부터 B 52 폭격기 편대가 캄보디아 영토 내에 북베트남 기지에 비밀리에 폭격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실이 얼마 후에 뉴욕타임스에 보도가 됐다. 화가 난 닉슨은 FBI로 하여금 출처를 파악토록 지시했으나 후버 국장은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1971년 3월에는 펜실베이니아의 FBI 지역사무소에 도둑이 들어서 기밀문서가 도난당했는데, 그 내용이 얼마 후 뉴욕타임스에 보도되자 닉슨과 참모들은 FBI가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1971년 6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경위를 정리한 국방부 기밀문서(The Pentagon Papers)가 뉴욕타임스에 게재되자 닉슨은 그 유출 경위를 파악하고 책임자를 수사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FBI는 기밀문서를 언론에 넘긴 다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 1931~) 박사에 대한 수사에 미온적이었다.
 
당시 FBI 수뇌부는 치졸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후버는 1971년 6월 윌리엄 설리번을 강등하고 그의 사무실 비밀번호를 바꾸어서 축출해 버렸다. 그리고 후버는 마크 펠트를 승진시켜서 FBI의 3인자로 발령을 냈다. 이에 불복해서 설리번은 후버를 비난하는 내부 통신을 돌리는 등 저항했다. 9월 30일, 후버는 설리번을 해임했고 설리번은 FBI를 떠났다. 이런 모습을 본 닉슨과 백악관 참모들은 기가 막혔다. 그래서 이들은 백악관이 스스로 국가비밀 누설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배관공’(The Plumbers)라고 불리는 특별조사팀을 조직했는데, 이 사람들이 워터게이트 건물을 침입하다가 체포된 것이다. 

에드가 후버는 1972년 5월 2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후버는 유언으로 자기가 살던 주택과 50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톨슨에게 남겼다. 톨슨은 후버의 장례식이 끝난 후 FBI에 사표를 냈고 시름시름 앓다가 1975년 4월에 사망했다. 톨슨이 사직하자 닉슨은 법무부 민사담당 차관보이던 패트릭 그레이(L. Patrick Gray III 1916 ~2005)를 FBI 국장 서리로 임명했다. 해군 장교로 잠수함 함장을 지낸 그레이는 로스쿨을 나오고 퇴역 후에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닉슨을 알게 되어 오랫동안 닉슨을 지지해 왔다. 닉슨은 그레이를 비교적 한직(閑職)인 법무부 민사담당 차관보로 임명하더니 후버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레이는 FBI의 조직과 기능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닉슨은 그레이에게 FBI에선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FBI에 대한 문외한인 그레이가 국장 서리로 임명되자 FBI 내부는 흔들렸다. 그레이는 현장을 파악한다면서 전국의 FBI 지국을 순회 방문해서 본부 사무실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따라서 부국장인 마크 펠트가 실제로 FBI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난 1972년 6월 17~18일, 패트릭 그레이는 캘리포니아에 출장 중이었다.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에 관해 보고를 받은 마크 펠트는 백악관이 배후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워드 헌트는 백악관 사무실에 사물함 금고를 갖고 있었고, FBI 간부들은 전직 FBI 요원인 고든 리디를 알고 있었다. 6월 19일, 마크 펠트는 그레이 국장 서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보고하면서 백악관이 개입돼 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레이는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 왔고, 6월 21일에 간부회의를 열어서 이 문제를 검토했다. 보고를 받은 그레이는  FBI 내부 분위기를 백악관 법률 비서관 존 딘(John Dean 1938~)에게 알렸고, 향후 회의에 존 딘을 참석시키도록 펠트에게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백악관은 FBI 수사 상황을 파악하게 됐다. 그리고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6월 23일 오전 10시 경 닉슨은 밥 홀드먼 비서실장에게 “CIA를 개입시켜서 FBI 수사를 막으라”는 지시를 했다. CIA는 더 이상 국내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고 거부했고, 닉슨의 이 발언은 백악관 집무실 녹음기에 그대로 녹음이 되어 닉슨이 워터게이트를 은폐하려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만다.

마크 펠트는 자신이 국장 서리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패트릭 그레이가 국장 서리로 와서 크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패트릭 그레이 국장 서리가 백악관과 협력해서 FBI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펠트 뿐 아니라 FBI  간부들도 그런 생각이었다. 9월 15일, 대배심은 하워드 헌트, 고든 리디, 제임스 맥코드 등 7명을 기소했다. 하지만 7명의 배후에 관한 수사는 벽에 부딪쳤고, 닥쳐오는 선거 때문에 언론의 관심도 약해 졌다.

1973년 2월, 닉슨은 패트릭 그레이를 FBI 국장으로 지명하고 상원에 인준을 요청했으나 워터게이트 문제로 상원은 인준을 거부했고 그레이는 국장 서리직에서 물러났다. 닉슨은 환경보호처장이던 윌리엄 러클샤우스(William Ruckelshaus 1932~2019)를 FBI 국장 서리로 임명했다. 펠트는 그레이 국장 서리가 물러나면 자기가 국장으로 임명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 기대는 또 무너지고 말았다. 펠트가 워터게이트에 관한 정보를 밥 우드워드에게 흘리게 된 동기는 패트릭 그레이 국장 서리와 백악관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수사를 막아선데 대한 저항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펠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조금씩 확대되어야만 닉슨이 자기를 FBI 국장으로 임명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펠트는 자기가 FBI 국장이 될 가능성이 없어짐을 알게 된 후에는 복수심에서 더 많은 정보를 흘린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펠트는 1973년 6월에 FBI 부국장직을 사임하고 30년 동안 일한 FBI를 떠났다.

닉슨이 펠트를 그렇게 배제한 이유는 분명했다. 닉슨과 그의 참모들은 워싱턴포스트의 비밀취재원(Deep Throat)이 마크 펠트일 것으로 일찍부터 의심했다. 백악관이 마크 펠트를 의심하게 된 데는 법무부 형사국장인 헨리 피터슨 차관보의 역할이 있었다고 본다. 수사 진행 상황과 언론 보도를 면밀하게 비교해서 보니까 그런 정보를 유출할 수 있는 사람은 마크 펠트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기자를 많이 알고 기자들과 사이가 좋았던 마크 펠트는 워싱턴포스트 외에도 타임(TIME)지에도 제보를 했는데 타임지 쪽에서 헨리 피터슨 차관보에게 마크 펠트가 워싱턴포스트의 취재원이라고 알려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2005년 5월, 마크 펠트는 자신이 'Deep Throat'이라고 밝혔고 밥 우드워드는 이를 확인했다.
 
- 사진 : 에드가 후버 장례식. 두 번째 줄에 마크 펠트가 보인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