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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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렌스 토머스
30년 이상 진보적 판결을 해 온 윌리엄 브레넌(William Brennan Jr. 1906~1997) 대법관이 1990년 7월에 은퇴함에 따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뉴햄프셔 주 대법관을 지내고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된 지 몇 달이 되지 않은 데이비드 수터(David Souter 1939~ )를 지명했다. 뉴햄프셔 밖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수터가 대법관으로 지명되자 그가 도무지 누구냐고 물을 정도로 그는 지명도가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로버트 보크처럼 많은 글을 남긴 사람은 청문회에서 타깃이 되기 쉽다고 생각해서 글을 쓰지 않은 사람을 구했다고 하는데, 뉴햄프셔 주지사를 지낸 백악관 비서실장 존 수누누(John Sununu 1939~ )가 수터를 추천하자 부시는 그대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수터는 논란거리가 없는 인물이라서 청문은 싱겁게 진행됐지만 흑인 민권단체와 여성단체는 수터가 보수적이라면서 반대운동을 벌였다. 수터는 상원 본회의에서 90 대 9로 통과됐다. 에드워드 케네디 등 민주당 의원 9명은 수터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수터는 1990년대 말부터는 진보적 대법관과 보조를 맞추어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보수 평론가들은 수터를 실패작으로 보고, 공화당 대통령이 다시는 수터 같은 사람을 대법관으로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대법원의 최초의 흑인 대법관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 1908~1993)이 1991년 가을 건강상 이유로 은퇴를 밝히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예일 로스쿨을 나온 흑인인 클라렌스 토머스(Clarence Thomas 1948~ )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후임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조지아의 하류 흑인사회에서 태어난 토머스는 예일 로스쿨을 졸업했으나 취직이 되지 않았다. 토머스가 소수인종 우대로 예일 로스쿨을 다닌 줄 알고 상대를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토머스는 흑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됐다.
클라렌스 토머스의 멘토는 미주리 주 법무장관을 지낸 존 댄포스(John Danforth 1936~ ) 상원의원이다. 토머스가 취직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미주리 주 법무장관이던 댄포스는 아무 연고도 없는 토머스를 주 검사로 채용해서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댄포스가 상원의원이 되자 토머스는 의원 보좌관으로 워싱턴으로 따라 갔다.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자 댄포스 의원은 레이건에게 토머스가 행정부에서 일할 수 있게 부탁했고, 토머스는 교육부 민권담당 차관보(국장급)을 거쳐 공정고용기회위원회(EEOC) 위원장이 됐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EEOC 위원장으로 10년간 일한 토머스를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부시가 토머스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자 토머스가 항소법원 판사로 겨우 1년 반 밖에 일을 하지 않은데다 흑인 우대정책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서 인준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예상대로 흑인 민권단체와 여성단체가 반대를 천명했지만 그 강도는 세지 않아서 무난하게 인준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발생했다. 토머스가 EEOC에 있을 때 그의 아래에서 일했던 애니타 힐(Anita Hill 1956~ ) 오클라호마 로스쿨 교수가 자신이 토머스에 의해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애니타 힐이 상원 법사위에 출석해서 토머스가 성적으로 저급한 언급을 자주하는 등 성적으로 희롱을 했다고 비난하고, 토머스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며 허위라고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당 소속 조 바이든 의원이 애니타 편을 들어서 토머스를 공격하자 토머스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토머스는 훗날 백인 진보주의자들이 흑인 보수주의자인 자기가 대법관이 되지 못하게 하는 책략이었다고 주장했다. 토머스는 자신에게 근거없는 비난을 퍼부은 조 바이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애니타 힐이 주장하는 바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있었던 일이라서 어떠한 증거와 증인이 없었다. 오히려 EEOC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토머스를 지지하는 증언을 했고, 한 상원의원은 두 사람이 소속이 달라진 후에도 종종 만났음을 지적하면서 애니타 힐의 주장을 의심하는 발언을 했다. 논란 끝에 상원 법사위는 법사위의 의견이 없이 본회의 표결에 회부하기로 결정했고, 상원 본회의는 52대 48이란 근소한 표 차이로 인준을 동의했다. 당시 상원은 민주당이 57석, 공화당이 43석이었으나 민주당 의원 11명이 찬성 표를 던져서 간신히 통과된 것이다. 클라렌스 토머스를 그 자리에까지 올 수 있게 한 존 댄포스 상원의원이 동료 의원들을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
대법관으로서 토머스는 렝퀴스트, 스칼리아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대법원에서 가장 확실한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는 토머스를 임명한 부시 대통령이나 보수 평론가들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청문회 에서 겪은 일생일대의 모욕적인 경험이 영향을 주었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토머스는 “나는 40년 동안 진보주의자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다”고 사석에서 말하곤 했다. 토머스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백인 변호사인 버지니아와 재혼했는데, 청문회장에서 버지니아는 여러 차례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였다. 버지니아는 그 후 맹렬한 보수 운동가로 활약하고 있어서 대법관의 배우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로버트 보크는 청문회에서 당한 수모를 진보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책을 쓰는데 그쳤지만 클라렌스 토머스는 벌써 30년 넘게 강경한 보수적 판결로 진보주의자들을 혼내주고 있는 셈이다.
클라렌스 토머스를 미주리 주 시절부터 꾸준히 후원하고 지지해 온 존 댄포스는 상원의원 3선을 하고 은퇴했다. 목사이기도 한 댄포스는 토머스 청문회를 보고서 당파 정치는 멀쩡한 사람을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내용의 책을 펴냈다. 3선을 역임한 그는 은퇴하고 변호사를 했다. 2004년 6월, 로널드 레이건이 서거하자 댄포스는 레이건의 영결식에서 종교 의식을 주관했다. 그해 7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논란이 많았던 존 볼튼 유엔 주재 대사 후임으로 존 댄포스를 지명했고 상원은 그를 곧 인준 동의했다. 댄포스는 대사 취임 선서를 토머스 대법관 주재로 했다. 하지만 댄포스는 콘돌리사 라이스가 국무장관이 되자 사표를 제출하고 고향 미주리로 돌아갔다.
청문회로 유명해진 애니타 힐은 오클라호마 로스쿨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몇 년 후 매사추세츠에 있는 브랜다이스 대학 여성학 교수로 옮겨 갔다. 보수적인 오클라호마는 그녀를 받아 드릴 수 없었다.
- 사진 (1) 청문회에서 애니타 힐의 진술을 듣고 있는 클라렌스 토머스와 그의 부인 (2) 클라렌스 토머스의 부인 버지니아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 (3) 청문회장에서 애니타 힐 (4) 존 댄포스 전 상원의원의 유엔 주재 대사 취임 선서를 주관하는 토머스 대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