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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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갑자기 무너졌다 (주간경향)
작성일 : 2015-11-07 21:01조회 : 3,066
<주간경향> 1150호 11월 10일자
[이상돈의 책을 통해 세상읽기]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갑자기 무너졌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Michael Meyer, The Year that Changed the World (2009, Scriber, 255 pages)
“동독 정치국 대변인은 “동독 시민은 이제 여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효력 시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지금 당장”이라고 답했다. 그는 자신의 답변이 얼마나 폭발력이 있는지를 잘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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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통일되고 옛 소련과 동유럽 공산체제가 무너진 후 25년 세월이 흘렀다. 뉴스위크 독일 주재 특파원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을 취재했던 마이클 마이어 기자가 펴낸 이 책은 1989년에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1989년 11월 9일, 동서 베를린 통행구인 체크포인트 찰리에 동독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장벽을 지키는 동독 경비병들에게 “문을 열라”고 외쳤다. 반대편 서베를린 쪽에선 서독 시민들이 “이리로 오라”고 외쳤다. 당황한 경비병은 상부에 전화를 걸었지만 동독 정치국 간부들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밤 11시 17분, 동독 경비병은 한 통의 전화를 받더니 “문을 열라”고 외쳤다.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그날 저녁 6시, 몇 주 전에 동독 정치국 대변인으로 임명된 쿤터 샤보스키는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곤 크렌츠로부터 “동독 시민은 이제 여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내용의 메모를 전달받았다.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시달린 샤보스키는 이 메모를 읽어 주었는데, 한 기자가 “새 규칙이 언제 효력을 발휘하느냐?”고 묻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지금 당장”이라고 답했다. 그는 자신의 답변이 얼마나 폭발력이 있는지를 잘 몰랐을 것이다. 샤보스키의 답변은 전 세계에 긴급 뉴스로 알려졌고, 장벽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차단기를 열어 버렸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는 조짐은 그해 여름부터 있어 왔다. 1988년 말, 헝가리 공산당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젊은 개혁론자 미클로스 네메스를 총리로 지명했다. 1989년 5월, 네메스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 쳐 있는 고압전기 철조망이 시대착오라고 선언하고 이를 더 이상 운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조치가 알려지자 동독인 수십만 명이 헝가리로 몰려갔다. 헝가리로 향하던 동독인 수천 명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이 묶이자 이들은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부다페스트 주재 서독대사관에도 동독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장벽 지키던 경비병들이 차단기 열어
1989년 6월, 폴란드 총선에서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가 공산당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1981년 이래 야루젤스키 장군이 계엄령으로 통치해 오던 폴란드에서 공산당이 몰락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예고된 것이었다.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바웬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새로이 소련 지도자로 선출된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더 이상 폴란드 공산당 정권을 지원할 수 없다고 야루젤스키에게 통보하는 등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공산당 통치가 사실상 종말을 고하자 그 여파는 독일을 향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흐름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새 지도자로 등장한 후에 생긴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고르바초프가 대화가 되는 상대방이며, 소련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지도자임을 알아차렸다.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와 가진 몇 차례 정상회담에서 군축협상을 매듭지었다. 1989년 초에 들어선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이 같은 레이건의 정책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1989년 7월에 폴란드와 헝가리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생각을 달리 하게 됐다. 폴란드 방문 중 부시는 자유노조 운동의 발상지인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바웬사를 만났는데, 25만명의 군중이 부시를 환영했다. 부시는 동유럽에 급격한 변화가 닥쳐오고 있음을 알았지만 다른 서방 지도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부시에게 “독일 통일은 상상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고, 대처 영국 총리도 독일 통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부시는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독일 통일에 대해 긍정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해 8월 19일 오스트리아를 마주보고 있는 헝가리 국경지대의 작은 마을에는 매년 열리던 범유럽 피크닉이 예정되어 있었다. 수백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행사에 동독인 1만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그날 오후 국경이 무너지고 동독인들이 무더기로 오스트리아로 밀려 들어왔다. ‘철의 장벽’이 본격적으로 무너지지 시작한 것이다. 소문을 듣고 더 많은 동독인들이 헝가리로 몰려들었다. 8월 31일에는 헝가리 국경지대의 바탈론 호수 주변 캠핑장에 동독인 15만명이 모여서 출국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헝가리 정부는 국경을 개방해서 이들이 오스트리아로 들어가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10월 7일은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10월 6일 고르바초프가 베를린에 도착하자 군중은 “고르비, 고르비”를 외쳤다. 동독 공산당 정치국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고르바초프는 동독 경제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나서 소련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공산체제의 수장이 바로 그 공산체제가 수명을 다했다고 위성국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통보한 셈이다. 베를린, 라이프치히 등 동독 도시에선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10월 20일 동독을 오랫동안 통치해온 호네커가 사임하고 에곤 크란츠가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했다. 11월 4일에는 베를린 중심부에 50만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11월 6일 라이프치히에선 100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TV 보고 알아
시위군중은 이제 여행의 자유뿐만 아니라 공산체제 자체의 철폐를 요구했다. 크란츠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며칠 동안에 동독인 수만 명이 또 다시 체코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동독은 텅텅 비어가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탈출하자 병원과 요양원은 문을 닫아야 했고, 교사들이 떠나자 학교도 닫아야 했다. 트럭 운전사들이 트럭을 버리고 탈출하자 생필품과 식량 공급이 끊어졌다.
크란츠 서기장은 이런 상황에도 권좌에 남기 위해서 동독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는 여권을 갖고 있는 동독인은 어디로나 국경을 통해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국 비자를 갖게 되며, 여권이 없는 동독인은 신분증에 특별한 스탬프를 찍어서 출국할 수 있도록 하는 규칙을 새로 만들어서 정치국의 승인을 받아냈다. 오후 5시, 크란츠는 샤보스키에게 새 규칙이 승인됐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크란츠는 새 규칙이 추후에 시달될 명령에 의해 시행될 것이라는 점은 샤보스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크란츠가 너무 피곤해서 혼동을 했던 것인지 어떤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오후 6시가 되자 샤보스키는 취재진 앞에 나와서 크란츠가 전해준 메모를 읽어나갔다. 시행 시점에 대해 아무런 지침을 갖지 못한 샤보스키는 새 규칙이 ‘지금 당장’ 시행에 들어간다고 답하고 집으로 가버렸다. 크란츠 등 다른 공산당 간부들은 그날 밤 연락이 되지 않았다.
미국 정부도 베를린 장벽이 이렇게 갑자기 무너질 줄은 알지 못했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코크래프트 장군은 부시 대통령에게 베를린 상황에 대해 보고했지만 그 역시 TV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을 뿐이었다. 동유럽 전문가로 안보부보좌관이던 콘돌리자 라이스도 CNN 보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훗날 라이스는 자신이 동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1989년 한 해 동안 동유럽 공산체제는 분명히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11월 9일 밤에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무너지게 된 데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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