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육제도의 양가성과 촛불집회 (게시판으로부터)

작성일 : 2008-06-25 07:49조회 : 2,022

교육제도의 양가성(?)과 촛불집회

인문학도 2008-06-24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던 바에 공감을 표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사실 논술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논술이라는 제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일종의 좌절을 겪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상이라는 것을 수학 공식처럼 가르쳐야 하는 한계랄까요. 푸아그라를 만들기 위해서 거위 입을 억지로 벌리고서 고단백 사료를 밀어넣는 것처럼 말입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학대죠. 여기에 특정한 경향에 편중된 사상을 지식 암기하듯이 배우다보니 영양불균형이 일어납니다. 강사들끼리도 자주 하는 이야기죠.

사실 논술교육이라는 건 일종의 양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논술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 학생들의 기본적인 사고 능력과 이를 글이나 말로 옮기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있습니다. 바꿔서 표현하자면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학생을 양성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논술교육의 목적은 대학입시라는 제도의 틀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입시에서 점수화하여 학생을 선발하는 데 소용되는 것이 논술이기 때문입니다. 학생 개개인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선발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수의 채점자에 의해 계량화된 방식으로 등수를 매기게 됩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학생들에게 논술이란 또 하나의 시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만큼 대학입시를 위해서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늘어난다는 뜻이죠. 그에 비례해서 학생들의 스트레스도 늘어납니다.

여태까지 어느 정권에서든 교육제도의 공공성 강화를 외치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실제로 교육제도의 공공성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한 정권도 없습니다. 새로운 대학입시제도가 발표될 때마다 학생들이 부담해야 하는 요소들은 늘어났고, 그에 비례해서 사교육 시장도 팽창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수학능력시험 하나만 잘 봐도 명문대에 가는 것이 가능했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내신도 잘 나와야 하고, 논술도 잘 봐야 하고, 봉사활동시간도 채워야 하고, 외국어도 능숙하게 구사해야 합니다. 제도가 바뀔 때마다 해야 하는 일이 하나씩 늘어나고, 그에 따라 사교육비에 대한 부담도 증가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이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밤잠까지 설쳐가며 애써야 합니다. 그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만도 조금씩 축적되어 갈 수밖에 없고 말이죠.

이러한 불만을 일거에 터뜨리게 만들어버린 게 현 정권의 실책입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쇠고기 수입 문제가 학생들을 불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교육자율화정책의 강화가 임계점까지 학생들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미 교육자율화정책 때문에 0교시 부활에다가 심야학습 강화에 몸과 마음이 피곤해 죽겠는데, 여기에 쇠고기 수입 문제가 덧쳐버린 겁니다. 그렇잖아도 그놈의 대학 간다고 죽어라고 공부하고 있는 마당에, 그러한 노력에 대한 성과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광우병이란 놈이 떡하니 나타났습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렇잖아도 울고 싶어 죽겠는데 정부가 뺨 한대 때려준 격이죠. 이러니 뛰쳐나갑니다. 어차피 잘됐습니다, 그동안 불만도 많았는데, 남들 앞에서 외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도 않고, 거리라는 공간이 그다지 낯설지도 않습니다, 몰려서 몰려서 뛰쳐나갑니다. 논술을 배우면서 익힌 발언의 기술과 온갖 방과후활동을 거치며 익힌 집단활동에 대한 경험 덕분에 시위가 낯설지 않습니다. 나가보니 후련하고 재밌습니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양심상으로도 거리낄 게 없습니다. 옳지 않은 것을 옿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 나선 것이니까요. 이 모든 게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더 많은 학생들을 거리로 불러냅니다.

사실 학생들을 이렇게 내몬 것은 윗 세대의 탓이 큽니다. 학생들에게 늘상 가르친 것은 그저 '경쟁'의 정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뒤쳐져선 안된다, 니 친구는 네 시간 자고 공부하는다는데 넌 그래가지고 대학 가겠냐, 니 친구도 짓밟고 일어서야 한다, 경쟁해서 살아남지 못하면 도태된다, 이런 것들을 아직 10대 중후반의 나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돌아설 수 없는 구석으로 몰아간 셈이죠. 학생들이 이러한 절박함에 빠져들기 이전에 사실은 어른들이 더 핵심적인 가치들을 가르쳤어야 합니다. '경쟁'이라는 삭막한 레테르보다 상위에 설 수 있는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들을 가르쳤어야 합니다. 무조건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라고 닦달하는 것만이 능사가 되어서는 안됐는데, 그걸 어른들이 미처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어른들도 이러한 가치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학생들에게 그러한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 '보수'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신적인 발달에 도움이 될만한 고전을 읽히고 스스로륻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보수의 역할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진보에게는 전통을 확립하고 이것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정신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현재 논술교육현장에 나가있는 진보좌파 계열의 강사들은 대부분 생계형 노동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에게 정신적인 가치를 가르칠만한 입장이 못된다는 거죠. 입시가 요구하는 틀에 맞춰서 가급적 점수를 많이 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 지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강사에게든, 학생에게든 말이죠.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수는 학생들에게 그러한 가치들을 전파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아니,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그러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희박했다고 해야 할까요. 도덕성이나 윤리, 자기정체성 등을 설명해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자기 혁신을 꾀했어야 했을 텐데, 소위 '반공'이라는 아젠다에 너무 오래 안주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주사파조차 겪어보지 못한 오늘날의 중고등학생들에게 공산주의나 그 변형태인 주체사상이란 동물원의 나무늘보보다도 더 낯설고 흥미 없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이런 학생들에게 친북좌익이라는 개념을 들이대며 설득(?)하고자 했으니 학생들이 반발하는 건 당연한 이치일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친북좌익의 논리를 국민건강권이나 환경권과 같은 '절대적 가치'와 맞바꾸어 버렸으니, 학생들이 느끼기에는 오히려 보수가 더 부도덕한 존재로 보였을 겁니다. 그러니 뛰쳐나갈밖에요.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열망은 있으되 무게중심은 희박합니다. 오늘 경향신문 기사에 보니 학생들의 57% 가량이 6.25가 발발한 연도를 모른다고 답했다더군요. 이건 단지 학생들에게 안보 교육이 부족했다는 차원에서 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학생들이 입시를 위한 무한경쟁 이전에 내면화했어야 할 기본적인 가치들에 대한 교육과 설득이 부족했다는 것이죠. 사실은 그 자리를 '보수'가 채워줬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학생들은 임계점에서 더 이상 멈출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하긴, 보수조차도 소위 경제논리에 휩쓸려서 정체성조차 불분명한 사람을 대통령이랍시고 밀어올리는 판이니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환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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