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폭력시위와 폭력진압 (게시판에서)

작성일 : 2008-06-29 22:55조회 : 2,090

(촛불 시위는 이제 더 이상 촛불 시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종로와 시청 앞은 1968년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지를 방불게 하고 있습니다. 폭력시위가 먼저인지, 폭력 진압이 먼저인지, 폭력시위가 더 큰 문제인지, 폭력 진압이 더 큰 문제인지,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불법시위는 엄단하고 법대로 처리하면 되겠습니다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점에서 인문학도님이 올리신 글을 앞에 옮겨 게재하오니 일독을 권합니다. 이상돈 올림 ).

폭력시위와 폭력진압

인문학도 2008-06-29

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리 밝혀두고자 합니다.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라거나, 일부 시위대의 도를 넘는 폭력이 문제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쪽에 의해 가해진 것이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 민주주의/법치주의 국가에서는 더더군다나 그러합니다. 폭력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명제이며,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런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자 합니다. 다만 제가 보려는 것은 폭력에 대한 관리와 그로 인한 부재에서 오는 시스템의 붕괴에 대한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의 전쟁에서는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의 '씨를 말려버리는' 일은 아주 흔했습니다. 노인,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전부 죽여서 폐허로 만들거나, 아니면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서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따위의 행위가 그것입니다. 서부 개척 당시의 미국인과 인디언들도 그런 방식의 전투를 벌였습니다. 한 쪽이 A라는 방법을 쓰면 다른 쪽은 A+라는 방법을, 다시 다른 쪽은 A++라는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무한한 폭력의 에스컬레이션을 추구했고, 결국은 먼저 질려서 나자빠지는 쪽이 패배했습니다. 이처럼 상호간의 분노와 증오를 '폭력'이라는 물리력으로 여과 없이 드러내는 방식의 전투는 당시로서는 꽤 효과적인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 행사는 나폴레옹과 남북전쟁 이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전쟁 자체의 성격이 급격하게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전쟁론>을 저술한 클라우제비츠가 이를 한 마디로 잘 정리해놓고 있는데, 전쟁은 곧 '정치외교적인 수단'으로 변모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전쟁이 상호확증파괴의 방식을 통한 무한한 폭력 경쟁으로 귀결되는 '직접적인' 타격 수단이었다면, 오늘날의 전쟁은 제한된 물리력의 행사를 통해 상대방의 정치적 양보를 이끌어내는 '간접적인' 타격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효과를 내기 위해서, 오늘날의 전쟁은 오히려 군대의 파괴력을 '제한'하고 '약화'시키는 방책을 모색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군대가 물리력 동원에 대한 자체적인 규정을 두고서 이를 초과하는 '불필요한' 물리력이 행사되는 것을 엄격하게 제어하는 것은 그 일환입니다.

공권력이란 국가가 시민에 대해 행사하는 물리력의 일종입니다. 이는 시민들의 과도한 행동을 제어하고 사회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특히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정부와 시민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지배-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닌, 독립적인 두 개의 '정치력'이 맞물리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공권력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집니다. 상대방 즉 '시민'으로부터 원하는 형태의 정치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공권력의 최대 목적일 터인데, 공권력 스스로가 자신의 물리력을 제어하지 못하면 오히려 반대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정치력이 맞부딛치는 상황에서 과도한 물리력의 행사가 역효과를 낳는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미-영 연합공군은 독일의 전쟁수행의지를 꺾겠다는 목적으로 독일의 대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인들의 투쟁 의지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당시 나치 독일이 서유럽 점령지에서 시도했던 철권 통치는 오히려 각 지역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불을 지폈고, 이로 인해 전쟁 말기에는 전선으로 내보내기에도 부족한 병력을 후방에 증강시켜야 하는 웃지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좀 더 가까운 사례를 들여다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의 공권력 남용은 오히려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들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체는 제어되지 못한 물리력의 행사가 어떠한 역풍을 맞게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공권력의 투입은 지극히 조심스러운 절차를 거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권력이 발휘되는 현장에서도 필요 이상의 폭력이 사용되지 않도록 간부들은 항상 휘하 병력들을 제어합니다. 공권력이 투입되지 않는 평상시에도 일반 사병들, 즉 전의경들을 대상으로 가혹한 훈련을 가하는 것도 이러한 통솔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통솔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폭력의 수위가 '도'를 넘게 되면, 애초에 공권력을 투입한 목적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고 '협상 테이블'로 걸어나오게 만들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함으로 인하여 더 큰 정도의 물리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이 한 번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계속적인 폭력의 에스컬레이션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상황을 제어하는 것이 무척 힘들어져 버립니다.

지금 서울 시내에서 밤마다 벌어지는 시위-진압의 현장은 그러한 물리력 제어의 실패를 더할나위없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6월 10일 이후 경찰이 시위대를 상대로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강제진압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차벽이나 기타 바리케이트 등을 통해서 시위대가 특정한 지역을 벗어나는 것을 차단하는 데에만 주력함으로써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을 막고, 오히려 이들의 김이 빠지게 만들어버리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5일 고시를 강행한 이후, 경찰 역시 정부의 지나치게 빠른 속행구보에 맞춰서 물리력의 수위를 높인 것은 여태까지의 노력을 전부 물거품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겉으로는 '불법폭력시위를 엄단한다'라는 명제를 택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결국 공권력이 가져야 할 물리력에 대한 자기 규정을 외면해버림으로써 시위대를 '폭행'하는 방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효과적인 '엄단'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은 현장에서의 폭력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법정에서의 엄정한 재판을 통한 처벌 부과가 되어야 할 것인데, 이를 현장에서의 폭력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결국 역풍을 맞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시민들의 정치적인 양보를 얻어내기 이전에,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해 버린 것이지요.

이미 시민들 사이에서는 쇠파이프나 화염병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까나리 액젓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왔던 것이 한 달 전인데, 그것도 불과 며칠 전에서야 실행에 옮겨지는 데 그쳤습니다. 즉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민들은 현재의 대치 상황을 '정치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대협이나 오월대, 녹두대 등에 대한 '추억'이 현실적인 '호명'으로 뒤바뀌고, 똥물이나 체포용 그물, 쇠파이프 등에 대한 '농담'이 '구체적인 계획'으로 변해가고 있는 지금 시점은 이미 대치의 성격이 정치적인 수준을 뛰어넘었음을 알려주는 적신호입니다. 만일 이 상황에서 또다시 '엄단'이라는 이름으로 제어되지 않은 물리력이 시민들에게 가해진다면, 시민들은 정말로 저러한 계획들을 실천에 옮기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역사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폭력의 에스컬레이션 현상이 2008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게 되는 것이겠죠.

이렇게 되면 피해자가 누가 될지는 명명백백해지리라고 봅니다. 시민들에게서 정치적인 양보를 얻어내지 못하는 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5공 말기에 노태우가 6.29 선언으로 시민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정부가 그러한 역사의 교훈을 잘 살피고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랬었는데, 어제 밤에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니 그러한 기대는 물 건너간 듯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96년 연대 사태 이후 서울 시내에서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던 화염병이나 최루탄 등을 다시 목격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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