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차라리 식물정권이라면/이미 그렇습니다

작성일 : 2008-07-09 00:04조회 : 1,948

( * 게시판에 자신을 대학생으로 밝히신 이리 님께서 좋은 글을 올려 주셨고, 이에 대해 항상 좋은 글을 올려 주시는 인문학도 님께서 의견을 추가로 올려 주셨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두 분의 글을 앞으로 옮겼습니다. 다만 앞에 실리는 글이라서 몇 군데 표현을 약간 다듬었습니다. 전체 의미에는 영향이 전혀 없는 미세한 부분입니다만, 그 점에 대해 필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이번 촛불 시위에 참여한 대학교수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그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특히 그런 시위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교수들이 참여한 경우도 적잖은 것 같습니다. 촛불 시위를 ‘좌익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인데 대해 분개해서 참여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상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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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라리 식물정권으로 끝난다면 다행입니다.

이리 (2008-07-08)

식물정권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이건 식물정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 정권이 자꾸 사태를 장기화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사태를 장기화 하고 자기 고집만 부리는데 누구도 여기에 대해 충고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당은 이미 거수기 역할만 하고 있고 검찰은 법에도 없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으니 대통령의 가신(家臣)이 된 듯합니다.

문제는 이런 사태가 장기적으로 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공권력에 대한 일체의 정당성이 부정당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내전이나 혁명이 일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바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외부세력의 간섭이 크기 때문에 그런 기미가 보이면 분명 개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혁명이나 내전의 가능성이 낮다고 보긴 하지만 아예 없다고는 못합니다.

제가 가장 걱정하는 사태는 새로운 '문화혁명' 가능성입니다. 기존 질서나 기존의 지식인들이 통째로 "수구 보수"로 매도당하고 부정당하는 사태 말입니다. 이게 과연 가능성이 없다고 볼 일 일까요? 특히 요즘 10대 아이들의 참여가 많은 만큼 이런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이 점은 이상돈 교수님의 우려와도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함량미달의 보수들이 전체 보수 이념인양 호도되어 결국 기존의 지식인들 까지 부정되는 사태가 분명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중국처럼 내전까지 동반한 문화혁명이 일어나기는 힘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4.19도 6.10도 가능성이 희박했음에도 성공했습니다. 역사란 작은 가능성도 ‘나비 효과’를 일으켜 큰 사건이 되어서 돌아옴을 보여 줍니다.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좌우, 보수 진보를 떠나서 건전한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더 이상 국민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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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타깝지만, 이미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인문학도 (2008-07-08)

이번 촛불 사태에서 우파 진영이 범한 가장 큰 실책은 사태의 주류(主流)를 '좌파'로 규정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쇠고기 문제에서 촉발된 현 사태를 주도한 세력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때그때 달라요' 세력인데 말이죠. 한국 사회에서는 이 '회색분자(灰色分子)들'의 향배에 따라서 정치적인 사건의 결과가 달라지곤 했습니다. 노무현 씨의 당선과 그 뒤 등장한 이명박 씨의 당선은 이 회색지대가 어느 쪽에 동조하느냐에 따라서 어떠한 결과들을 만들어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던 사례죠. 그런데 예전까지는 주로 좌파나 우파 어느 한 쪽에 '동조'하여 표를 던져주는 정도의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던 이들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먼저 표현하고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죠. 우파도, 좌파도, 사실은 이 현상에 대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논리로 설명해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좌파는 어쨌든 '같은 편인 듯...?' 하는 심정으로 길거리에 같이 뛰어들었다는 것이고, 우파는 '배후세력에 의해 선동당한 우중(愚衆)'이라고 규정하고 공권력 적용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이죠. 이게 어마어마한 차이를 낳았습니다.

이미 조갑제 씨와 같은 강경론자(?)들은 공공의 적(敵)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조소(嘲笑)거리가 되었다고 봐야 할까요. 사실 조갑제 씨의 견해에 먼저 50점을 주고 들어간다고 해도 '촛불 난동자들은 미국의 앞잡이'와 같은 주장은 누구에게든지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입니다. 정확한 상황 인식과 그에 기반을 둔 건전한 비판이 있어야 상대방과의 토론이라는 게 가능해지는 것인데, 조갑제 씨의 칼럼은 대부분 촛불 참여자들에 대한 색깔 입히기와 원색적인 공격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죠.

물론 조갑제 씨의 분석대로 촛불 참여자들이 '일부 좌파세력'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공격도 나름대로 효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다소 극단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회색분자들'이 동조한다면 촛불 참여자들을 여론으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갑제 씨가 지금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좌파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편으로 끌어당겼어야 할 '회색지대'였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촛불 참여자들이 조갑제 씨가 펼치는 주장이 '주류(主流) 우파 인사들의 견해'라고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태까지 공중파 토론 프로그램이나 각종 언론매체에 나왔던 대다수 우파 인사들의 주장이 조갑제 씨의 그것과 표현만 다를 뿐 비슷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잘못된 상황 판단이 기반하고 있습니다. 1) 이번 사태는 일부 좌파 세력의 준동에 의한 것이다, 2) 대중들은 일부 세력의 선동에 의해 휘둘릴 만큼 어리석고 무지하다. 20년 전의 프레임을 갱신하지 않은 것이 이러한 촌극(寸劇)을 불러온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촌극을 보면서,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또 한편으론 조소(嘲笑)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분 중에는 지난 대선 정국 당시 박근혜 씨를 지지했으며, 대학 교수이고 강남에 집을 두 채 갖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두 시간 내내 물대포를 맞으면서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20년 동안 조선일보 보셨던 분인데, 지난달에 ‘좌파 운운’하는 거 보면서 화가 나서 끊어버렸다고 말씀하시더군요. YMCA의 이학영 사무총장이 구타당한 것도 비슷한 맥락의 일이죠. 사실 YMCA는 최근까지도 촛불집회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해왔었고, 29일 새벽에 참석한 것도 앞장서서 폭력사태를 방지해보고자 하는 취지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온건파들까지 공권력을 동원해서 폭행해 버린 거지요.

보수 내부에서 철저한 프레임워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 정권과 같은 급으로 매도되어 몰락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이명박 정권 = 한나라당 = 뉴라이트 = 보수’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이미 여러 차례의 강경진압을 겪으면서 이들에 대한 '증오'로 굳어져가고 있는 형국이니까요. 오죽하면 “광주 사람들이 왜 아직까지도 한나라당이라면 치를 떠는지 이해를 하겠다”라는 말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는 게 지금 상황입니다. 대한민국에 스스로를 보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수구꼴통'이며, 오히려 진정한 보수는 촛불 내에서 찾아야 한다며 보수 혁신을 외치는 사람들이 집회 현장에서 박수갈채를 받는 게 지금의 사태입니다.

설령 이번 사태가 눈에 띄는 정치적인 변혁을 낳지 않은 채 조용히 '묻힌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남은 이러한 각인(刻印)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감할만한 건전한 가치관과 냉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 나타나서 적극적으로 주장을 펼치고, 스스로를 '보수'라고 지칭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서는 깨지기 어려운 벽이라고 봐야겠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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