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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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대 법무장관
작성일 : 2020-12-21 11:14조회 : 103


역대 법무장관

추미애 장관은 우리나라 제67대 법무장관이다. 72년 헌정사에 법무장관이 67명이 있었으니까 평균재직 연수는 1.2년 밖에 안 된다. 그나마 근래에 들어서 청문회 때문에 장관 교체가 쉽지 않아서 평균 재직기간이 1년을 넘긴 꼴이다. 우리 세대가 들어서 알고 있는, 그나마 족적을 남긴 장관을 보면 법무장관의 위상을 알만 하다.

초대 법무장관은 일제 시절 변호사협회 회장을 했던 이인(李仁 1896-1979) 선생으로, 존경받는 법조인이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유명한 법무장관은 이호(李澔 1914-1997)로 1955-58년간 법무장관을 지냈다. 이호는 공화당 정부에서도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을 또 했으니, 직업이 장관인 셈이었다. 주일대사를 하고 5공화국 때 있으나 마나 했던 헌법위원장을 역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법무차관과 대법원 판사를 잠시 지낸 민복기(閔復基 1913-2007)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민복기는 63년부터 66년까지 법무장관을 지내고 68년부터 78년까지 대법원장을 지냈다. 그가 대법원장을 지낸 시기는 3공화국과 유신 후 4공화국에 걸쳐있다. 3공화국 시절인 1971년 대법원이 법원조직법과 군인군속 2중배상 금지를 정한 국가배상법조항을 위헌으로 판시했던 유명한 사건에서 민복기 대법원장은 합헌이라면서 정부 측을 지지한 소수의견 쪽이었다. 유신 후 이 판결에서 위헌 쪽에 서 있었던 대법관들은 재임명에서 탈락돼 법복을 벗었다. 1975년 인혁당 상고심 재판에서 사형을 확정지은 대법원장이 민복기였다.

민복기와 비교되는 인물이 조진만(趙鎭滿 1903-1979)이다. 조진만은 1951-52년간 잠시 법무장관을 지낸 탁월한 법률가였다. 그가 얼마나 판례에 밝았는지는 우리 세대가 대학 다닐 때에 그런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있었다. 조진만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어 1961~68년간 대법원장을 지냈다. 그는 한글전용론자라서 그 때부터 법원 판결이 한글 타자로 나오게 됐다. (한자용어에 익숙해 있던 판사들이 한글로 판결문을 쓰니까 우스운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우족으로 하복을 상축하여 지상에 전도케 한 바 비골이 와해되는 등 부상을 입혔다.” 오른 발로 아랫배를 위로 걷어차서 땅에 고꾸라지게 만들어 코뼈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조진만 대법원장은 자신의 후임으로 홍 아무개나 양 아무개 대법원판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박 대통령이 민복기를 내정하고 있음을 알고 낙담했다는 일화가 역시 전설처럼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홍 아무개와 양 아무개는 19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 때 위헌 쪽에 서있었고 유신 후 법복을 벗었다.

박정희의 3공화국 시절 민복기 같은 법무장관은 사실 허수아비였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박정희 시절 검찰의 실세는 30대 나이로 검찰총장이 된 신직수(申稙秀 1927-2001)였다. 5.16후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신직수는 1963년부터 71년까지 검찰총장을 지냈고, 71~73년간 법무장관, 73~77년간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그는 군 법무관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 등 5.16 세력과 군 시절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검찰 조직이 이처럼 거대하게 된 계기는 바로 박정희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던 신직수였다. 

유신 후 4공화국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황산덕(黃山德 : 1917-1989) 교수는 나 같은 후학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경우다. 저명한 형법학자이자 법철학자인 황산덕 교수는 5.16 세력들이 헌법초안을 만들어서 단순히 국민투표를 거쳐서 통과시키려고 하자 동아일보에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기고를 해서 무슨 법 위반으로 구속돼서 재판을 받았다. 즉, 먼저 국회의원 선거를 해서 국회를 구성하고 그 국회가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무슨 법 위반이 된 것이다. 이것을 당시에 ‘동아일보 필화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런 기고문은 동아일보니까 게재가 가능했다. 황 교수는 석방은 됐으나 서울대에서 해직되어 성균관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런 황산덕 교수를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에 법무장관에 임명했으니 일대 쇼크였다. 74~76년간 법무장관을 지냈는데, 그 기간 중 인혁당 피고인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루어 져서 사형폐지론자이며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의 지론을 무색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황산덕 법무장관은 인혁당 피고인들 외에는 사형집행장에 차일피일 서명을 미루어서 결국 박 대통령은 그를 문교부장관으로 임명해서 1년 여 동안 장관 노릇을 더하고 은퇴했다. 후임 법무부장관은 밀렸던 사형집행장에 줄줄이 서명을 해야 했다.

5공화국과 6공화국에선 법무장관이 모두 검찰출신으로 메꾸어 졌다. 김기춘 등 몇 사람은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모두해서 그랜드 슬램을 기록했다. 김영삼 정부 때 법무장관으로 기억될 사람은 안우만(安又萬) 장관이다. 1994년~97년간 법무장관을 지낸 안우만은 법관 출신으로 대법관을 지내다가 법무장관으로 임명됐다. 안우만 장관 시절에 검찰개혁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영장실질심사라고 불리는 구속전 피의자 심사 제도다. 검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제도가 통과된 데는 대법관 출신이 법무장관이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된다. 영장실질심사 제도로 인해 유능한 전관 변호사를 쓸 수 있는 피고인들이 더욱 유리해졌는데, 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들이 더욱 유리하다는 불평이 나오곤 했다. (실제로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67명이나 되는 역대 법무장관 중 존경할 만한 법률가가 과연 한두 명이라도  있는지, 그게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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