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무총리, 그리고 한국판 베르사이유

작성일 : 2021-05-16 19:58조회 : 1,511

국무총리, 그리고 한국판 베르사이유

같은 대통령이라고 해도 바이든의 경우에서 보듯이 미국 대통령은 거의 매일 현안에 대한 의견이나 입장을 밝히는 등 뉴스에 나온다. 트럼프는 기자 질문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일방적으로 떠들거나 트윗을 통해 의견을 표명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기자 회견을 기피했던 경우로는 리차드 닉슨이 있다. 동북부 언론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던 그는 결국 임기를 못 채우고 말았다.

반면에 우리 대통령은 갈수록 기자회견을 연례행사를 하듯이 하고, 그것도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마는데, 그나마 그 내용은 헛소리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우리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임명해서 국회에 나가서 답변하게 하고 자기는 뒤로 빠져 있다. 그 대신 주변 문고리들의 의견을 듣고 은밀하게 결정을 하곤 한다. 이게 우리가 보아오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이 모양이 된 데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국무총리라는 존재이다. 해방 후 제헌헌법을 만들 때 의원내각제 헌법을 급하게 대통령제로 만들다 보니 부통령 외에도 총리라는 자리가 있었다. 이승만은 총리를 없애고 부통령을 각자 선출하도록 해서 야당인 장면 박사가 부통령이 되는 일이 생겼다. 장면 부통령은 암살자의 총탄에 피격되는 일도 있었다.

5.16 후 만든 3공화국 헌법은 부통령을 두지 않고 총리를 부활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동아일보 사장이던 최두선 씨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렇게 최두선 내각이 탄생했는데, 대통령제 국가에 무슨 내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언론은 최두선 내각을 방탄내각이라고 불렀다. 군사정부 시절에 있었던 의혹을 덮기 위한 내각이라는 의미였다. 두 번째 총리는 정일권인데, 언론은 정일권 내각을 돌격내각으로 불렀다. 이제 본격적으로 할 일을 하는 정부라는 의미였다. 그 후 박 대통령은 정부가 책임을 져야할 일이 생기거나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을 때에 총리를 바꾸어서 마치 정부가 바뀐 것 같은 모습을 연출했고, 그런 행태가 5공화국 전두환 시절까지 지속됐다. 이한기, 현승종 등 도무지 정부 각료로도 어울리지 않는 원로 법학교수가 총리가 된 것도 전부 그런 목적에서였다.

1987년 개헌은 국민적 합의인 대통령 직선제를 기반으로 한 정부를 만들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각 정파의 의견을 반영해서 만들어 졌는데, 헌법 행정법 교수들은 총리를 두느냐, 부통령을 두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당시 조교수이던 나는 공법학회 간사를 해서 그 당시 사정을 잘 안다. 50세를 넘는 중진 원로 교수들이 부통령은 우리에 맞지 않는다면서 국무총리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서를 만들어서 제출했는데, 거기에 대해 40대 아래 젊은 교수들은 대통령제는 4년 연임에 부통령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양건 교수가 그런 그룹의 리더였다.

그런데, 학계의 의견과 무관하게 부통령은 두지 않고 국무총리를 두자는 것은 각 정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당시 정부 내에서 개헌안 실무책임자였던 박윤흔 법제처 차장을 통해 들은 것은 5년 단임, 국무총리, 헌법재판소는 5공 청와대의 의지였다. 김영삼, 김대중 측도 자신들이 대통령이 되면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총리를 원했고 정권 2인자가 되는 부통령을 원치 않았다. 헌법재판소로 결정된 것은 법원 자체가 위헌 심사를 하기 싫어 했고 헌재가 있어 봤자 별다른 역할을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현행 헌법은 국무총리를 두어서 총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국회에 나가서 답변하고, 대통령은 국회와 총리 위에 군림하는 황제가 된 것이다. 솔직히 평가한다면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은 그런 황제 같은 대통령을 할 만하다. 문제는 그 이후이고 그 이후 대통령이 모두 망가져 버린 것은 어울리지 않게 임기 5년짜리 황제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초에는 국민 속으로 들어와서 소통을 하니 어쩌니 하고 했지만 그 후 행태는 베르사이유에 갇혀 있는, 세상 물정 모르는 황제 꼴이 되어 버렸다. 대통령 자신의 문제도 있겠지만 총리가 있으니까 대통령이 현장에 나갈 이유도 필요도 없기 때문에 그 모양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통령이 베르사이유 궁전에 칩거하면서 연례행사인 기자회견에서 헛소리를 하게 만든 두 번째 요소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 놓은 한국판 베르사이유인 청와대 건물 때문이다. 대통령 집무실을 비서동과 멀리 떨어 뜨려 놓은 구조는 대통령을 고립시켜 버렸다.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은 문 열고 나가면 비서실 참모들을 보게 되어 있다. 노태우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북악산 기슭에 짓기 전의 구 청와대도 그랬다. 박정희 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가면 김정렴 비서실장을 만났고, 문을 또 하나 열면 중화학 공업을 책임졌던 오원철 경제수석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잘 알 것이다.

그런 베르사이유를 만든 노태우 대통령은 매사에 자기가 나서기 보다는 자신들의 참모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렇게 해서 안보외교수석이던 김종휘, 경제수석이던 김종인, 통일원장관이던 이홍구 등이 외교 경제정책을 총괄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초석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정권 재창출을 포기하고 국정을 참모에게 위임해 버린 탓에 나라가 잘 돌아간 것이니, 대통령이 없는 나라가 낫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노태우 다음으로 베르사이유에 들어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그래도 제왕적 대통령을 할 만한 대통령이었지만 그 다음 대통령들의 말로(末路)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다. 국무총리를 앞에 내세우고 자신은 베르사이유 속에서 문고리들과 소꿉장난이나 하는 행태를 끊어 내지 않는 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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