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필립 하비브, 3공 헌법, 그리고 김대중 납치

작성일 : 2021-05-17 06:56조회 : 1,810

필립 하비브, 3공 헌법, 그리고 김대중 납치

3공화국 헌법은 5.16 후 최고회의가 학자 변호사 등을 심의위원으로 위촉한 개헌심의위원회가 만든 초안을 기초로 만들어 졌다. 5.16 세력은 내각제 정부가 혼란스럽다는 주장을 그들의 명분으로 삼았으니까 대통령제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5.16 세력이 만든 헌법이지만 기본권 조항은 오늘날 보아도 매우 잘 만들어 진 것이다. 3공화국 헌법은 위헌법률심사 권한을 미국처럼 사법부에 부여했는데, 이는 당시 조진만 대법원장이 관철시킨 것이다.

조진만 대법원장은 대법원을 대표해서 개헌심의위원회에 참여한 이영섭 대법원 판사에 위헌심사권을 꼭 가져오라고 당부해서 관철시켰다. 조진만 대법원장은 1954년부터 미국 대법원이 흑백인종차별을 철폐하는 등 혁혁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조진만 대법원장은 경성법전 1회 졸업생으로 존경을 받던 법조인이었다.

군사정부가 헌법을 제정한다고 하니까 주한 미국 대사관은 혹시 새로 제정될 헌법이 비민주적인 정부체제를 채택할 가능성에 대해 촉각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 정치참사관이던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1920~1992)는 미국 교수 2명을 자문역으로 위촉해서 개헌 과정에 간여하려고 해서 당시 개헌 실무를 책임졌던 이석제 중령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당시 개헌 심의위원회에는 군 법무관이던 박천식(朴天植 1933~ ) 변호사가 활약을 했다.

박천식은 서울법대를 나오고 고시를 패스한 후 미국에 유학을 가서 튤레인 대학에서 헌법을 공부해서 정치학박사를 따고 귀국해서 군 법무관으로 복무하던 중, 미국 박사학위를 가진 군 법무관이란 국보적 존재인 덕분에 중위 계급장을 달고 최고위 개헌심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징발됐다. 당시 개헌 작업을 하던 군 장교 중 유일하게 영어가 되고 미국 헌법을 공부한 박천식은 미국 대사관 및 한국을 방문한 두 명의 미국 교수와 소통창구였을 것이다. 3공화국 헌법이 미국식 사법심사를 채택한데는 박천식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군 복무를 마친 박천식은 60년대와 70년대 초에는 법원에서 잘 나갔으나 그 후로는 무언가 잘못되는 것 같더니 80년대 초에 법원을 나와서 변호사 생활을 조용히 했다. 나한테는 서울법대 뿐 아니라 미국 튤레인 대학 선배가 되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에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3공화국 개헌 당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5.16 후 군정 시절 주한 미 대사관 정무참사관을 지낸 필립 하비브는 1971~74년 간 주한 미국 대사를 지냈다. 그 기간 중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단행하고 인권을 침해해서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1973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이 도쿄에서 납치되어 현해탄에 수장(水葬)될 뻔 했는데, 그것을 막은 사람이 하비브 대사다. 하비브 대사는 그 정보를 듣고 CIA 서울지국장이던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 1927~ )를 급히 불러서 “박정희는 적어도 24시간 동안은 김대중을 죽이지 않을 테니 빨리 찾아내라”고 했고 유능한 CIA 요원인 그레그는 소재를 파악해서 미국 정찰기를 띠워 김대중 대통령이 묶인 채로 실려 있던 중앙정보부 선박 위를 비행토록 해서 경고를 했다.

도널드 그레그는 1989~93년 간 주한 미국 대사를 지냈는데, 회고록에서 하비브 대사가 먼저 알고서 자신에게 김 대통령의 소재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고 확인한 바 있다. 한두 시간 만 늦었어도 역사가 바뀔 뻔 했던 순간이었다.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등을 지내고 건강이 나빠서 은퇴한 하비브는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중동 평화 협상 특사로 활동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6년에 하비브를 대통령 특사로 필리핀에 파견해서 마르코스 대통령이 퇴진하도록 압력을 넣어서 필리핀에 민주화를 가져왔다. 레바논 출신 부모에서 태어난 하비브는 이처럼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해 큰 기여를 했다.

사진은 필립 하비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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