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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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향과 진정성 / 휘태커 챔버스 (토론 광장에서)
작성일 : 2008-08-09 09:05조회 : 2,569
(* 인문학도 님이 토론 광장에 올려 주신 글을 제 글과 함께 앞에 올립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이상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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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과 진정성
인문학도 (2008-08-08)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은 미군 포로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기발하고도 악랄한 방법을 썼다. 먼저 포로들을 잡으면 상당한 기간 동안 물을 비롯한 일체의 음식물을 주지 않고 이들을 감금한다. 그런 뒤 포로들이 탈진 상태에 가까워지면 한 장의 종이와 필기구를 주고서 전향서를 작성하도록 회유하는 것이다. 전향을 선언하는 포로에게는 빵과 음료를 제공하겠다, 그러나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는다. 오랜 기간 물조차 공급받지 못한 포로들의 상당수는 전향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빵과 음료를 얻는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전향한 상당수의 포로들이 그야말로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특히 일반 사병보다는 장교 출신 포로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는데, 사관학교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철저한 정훈교육을 받았을 이들이 이다지도 극단적인 전향을 했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그것은 논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상의 문제에 가까웠는데, 왜냐하면 전향서를 작성한 이들은 자신이 '빵과 음료' 때문에 변절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워 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단지 알량한 빵 한 조각을 얻자고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본인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지만, 이미 전향서를 작성한 마당에 이것을 되돌릴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하여 자괴감에 대한 일종의 도피처로서 '철저한 전향'을 택했던 것이다. 자기가 전향한 것은 단지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산주의의 가치를 믿었기 때문에 전향서를 작성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장교들의 경우에서 더욱 극단적인 전향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현상이다.
이는 비단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포로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전향'이라는 테제 아래 이와 같은 가치 전도 현상이 발생한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당시 일본 군국주의의 폭압 아래에서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수많은 한/일 지식인들이 전향을 선언한다. 그런데 이들이 전향을 선언하는 논리는 자신의 신념을 꺾고 일본 제국주의의 담론에 봉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우는 동양주의 담론과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전향 논리가 생성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즉 자신들이 전향을 하는 것은 코민테른의 독재를 인정하는 볼셰비즘에 대한 저항이며, 이는 소위 '동아시아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사회주의'의 성립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나아가서 코민테른의 독재를 서세동점(西勢東占)의 논리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황인종들이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동아시아 연대 평화론 - 나아가서는 대동아공영권 - 의 논리와 정확하게 조응하는 맥락을 형성하기도 했다.
과거 골수적인 좌파임을 자처했던 인물들이 어느 순간 전향하여 '보수'임을 천명하는 것에 대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진정성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향이 먼저 이루어진 뒤에 이에 대한 자기합리화의 논리가 발동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우파의 담론에 포섭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향이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후적인 관점에서는 쉽게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선후관계의 문제를 가지고서 진정성에 대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오히려 전향을 둘러싼 담론들을 인민재판의 형식으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으니 쉽게 손댈 수 있는 사안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과 불안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대체로 이러한 '돌아선 지식인'들이 한 시대의 대중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던 무수한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위 '동양담론'에 매몰되어 전향을 선택했던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의 말로를 보라. 청년들로 하여금 '동양의 권익을 지키기 위하여'라는 구호와 함께 일본 제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도록 독려하는 격문을 남발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들 '전향자'들이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시쳇말이 무게를 가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인지, 때로는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형식 논리가 다른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역사의 짓궂은 장난이 아니겠는가.
1차대전 당시,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 소재한 대학 총장들이 연명하여 격문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뮤즈가 침묵하고 있다'는 유명한 경구로 시작했던 이 격문은 독일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국가의 부름에 응하여 책을 버리고 전선으로 뛰어들 것을 장중한 어구로 독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격문에 고무된 수많은 대학생들이 군대에 자원했고, 이들은 단기간의 훈련 끝에 빈약한 장비를 지급받고서 벨기에 이에프르 지방에 투입되어 영국 정규군과의 전투에 돌입하였다. 대학 총장들의 결기 어린 격문과는 달리, 실전 경험이 전무했던 이들 의용군은 노련한 영국 정규군에게 그야말로 괴멸당하는 타격을 입고 만다. 지금도 독일의 랑게마르크 공동묘지에는 3만 6천구의 이름 없는 시신들을 추모하는 묘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젊은이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는 이름을 가진 기묘한 청년 하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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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의 모델, 휘태커 챔버스
이상돈 (2008-08-09)
과거에 주사파 등 좌파이었다가 우파로 전향했다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기분은, 너무 쉽게 좌파가 되었다가 너무 쉽게 우파로 변신해서, 바로 그것 하나의 이유로 이름을 얻고 자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대단한 '지하 좌파'였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하는, 그런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 등장 후, 특히 탄핵이란 자충수를 둔 후에 지리멸멸해진 보수 진영은 새로운 세력을 띄울 필요를 느꼈던 것이고, 그러자 몇몇 보수 신문이 이들을 등장시킨 것이지요. (아이러니칼하게, 새로운 인물을 띄운다고 류시민을 발굴해낸 것도 같은 신문이지요--)
1950년대 초에 미국에서 지적 운동(intellectual movement)으로 보수 운동이 일어난 계기는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의 전향이었습니다. 콜롬비아 대학을 나오고 타임지의 북 리뷰 에디터를 지내던 그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신이 소련의 간첩임을 고백하였는데, 당시 미국의 사법당국은 "알았으니까, 그대로 직장에서 일하라'는 정도였지요. 그는 전향을 할 무렵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참회했다고 할까요.
챔버스가 미국 전역을 흔든 유명인사가 된 것은 국무부 고위관료 앨저 히스 사건을 두고서, 챔버스가 히스가 간첩임을 증언하게 되어서 입니다. 존스 홉킨스와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엘리트 관료가 간첩이라는 주장은 바로 조지프 매카시가 제기했습니다. (매카시는 FBI의 에드가 후버로 부터 정보를 얻고 폭로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미국의 진보 좌파 진영은 매카시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했고, 그러면서' 매카시즘'이란 용어를 동원했습니다.
앨저 히스 재판에서, 소련의 암호를 해독한 미국의 정보 당국은 히스가 간첩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자료를 재판에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이 소련과의 비밀교신을 해독하고 있음을 알리게 되고, 그러면 소련이 암호 체계를 바꿀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지요. 확고한 반공주의자이던 당시 국무장관 딘 애치슨 마저 히스가 간첩일리가 없다고 두둔하고 나섰지만, 챔버스의 용기있는 증언, 속을 파낸 호박 속에 숨긴 문서 등으로 인해 히스가 결국 위증죄로 유죄판결을 받습니다.
이런 큰 '활약'을 했음에도 챔버스는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고, 직장도 그만두고 메릴랜드의 시골 집에서 은둔하다가 심장마비로 1961년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는 히스 재판에서 증언한 후 대중으로부터 사라졌고, 출옥한 히스는 자기가 억울하게 당했다고 주장하고 다니고, 진보 진영은 그런 히스를 두둔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에 공개된 미국의 극비문서, 그리고 술취한 엘친이 미국에 공개한 일부 소련 정보당국 기밀문서가 챔버스의 증언이 모두 진실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반세기에 걸친 진실게임이 밝혀 진 것입니다.
대단한 문장가(타임지의 북 리뷰 에디터는 대단한 문장가만 할 수 있습니다)인 챔버스는 1952년에 자신의 간첩 활동을 고백한 상당히 두꺼운 '증인'(Witness)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지금도 팔리고 있지요.) 그 책은 미국 지성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이 그 책을 보고 감명을 깊이 받아 민주당적을 버리고 공화당원이 되어 보수주의자로 탈바꿈했습니다. 젊은 윌리엄 버클리는 이 사건을 보고 미국의 지성세계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사재를 털어 '내서널 리뷰'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내셔널 리뷰'는 워싱턴 포스트 논설위원 조지 윌 등 많은 보수 논객을 배출했고, 보수주의 운동의 본산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이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을 챔버스에게 추서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챔버스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자기는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챔버스의 책의 서문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 서문을 읽고 감동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할까요.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을 띈 책의 서문은 진정한 참회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시 나이 50이 조금 넘었던 챔버스였지만, 자기는 죄인이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골고타로 간다고 했으며, 어린 아이들을 키웠던 추억을 말하면서, 자식들에게 언젠가는 너희들이 아버지를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친북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했다는 사람들은 너무 쉽게 나서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제대로 공산주의자도 못되었던 사람들이 세월 따라 우파로 나선 것이고, 보수 언론이 그런 '전향 상업주의'를 부추긴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챔버스는 전향하게 된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한 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존의 보수층이 거기에 무분별하게 부응한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진정으로 전향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조잡한 주사파 사상이 아니라, 정말로 공산주의를 신봉했다가 마음을 돌린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조용히 그리고 쓸쓸하게 참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이 사이트에 글을 남겨 주신 분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벼운 전향도 문제이지만, 이번의 '촛불' 사태에서 보듯이, 이들은 모든 '촛불' 참가자를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양면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기회가 되었다는 식이지요. 전향 후 자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골고타로 향한다면서 자식들에게 용서를 구한 휘태커 챔버스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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