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작성일 : 2021-07-17 14:43조회 : 1,925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나의 휴대폰에는 많은 번호가 입력되어 있는데, 기자와 방송작가 비중이 제법 크다. 사람 이름 다음에 소속사를 같이 입력해놓았는데, 긴 시간이 지나도 기자의 소속은 그대로이다. 반면에 작가들은 오랫 만에 전화를 받으면 대개 소속이 바뀌어 있다.

내가 방송작가와 자주 만나게 된 시점은 2011년이라고 하겠다. 당시는 보도 채널이었던 MBN에 이따금 출연을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출연 교섭 등 연락을 해온 작가들과 알게 됐다. 그 전에도 라디오 아침 시사프로에 종종 나가곤 했는데, 전화 대담이니까 작가를 직접 만날 일은 없었다. 2011년 말 그해 말 내가 한나라당 비대위원이 되자 방송 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그렇게 해서 나는 방송작가라는 여성들을 많이 알게 됐다.

나는 도무지 어떻게 해서 오늘날 방송작가라는 직군이 작가라는 명칭을 갖게 됐는지 모르겠다. 미국 방송에도 writer가 있는데, 문자 그대로 방송 대본을 쓰지 우리처럼 온갖 잡다한 일을 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고용은 매우 불안하다. 해 오던 프로가 바뀌거나 담당 PD가 바뀌거나, 또는 담당 PD의 마음이 바뀌면 그만 두는 일이 일상사임을 알게 됐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내가 국회에 들어가게 되자 방송작가 문제를 다루어 보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 2017년에 처음으로 국회에서 '방송작가의 노동인권 문제‘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 토론회는 몇몇 언론 매체와 여성신문에 보도가 됐다. 내가 있었던 20대 국회 환노위에선 방송작가와 방송 외주업체 비정규직, 그리고 비정규직 아나운서 문제를 다루었다.

방송작가라는 이름의 노동자 아닌 노동자는 언제든 잘릴 수 있고 장시간 근로에 최저임금이 안 되는 급여(페이)를 받으면서 일해 왔다. 신분이 항상 불안한 이들은 노동법의 완전한 사각지대에 있어 왔다. 사업주의 시각에선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다. 이들을 고용하고 해고하는 사람은 사업주가 아니라 정규직 PD나 기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저임금 저소득에 허덕이는 노동자가 많다. 이들은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일한다. 반면에 방송작가들은 에어콘 난방 걱정 없는 상암동 초현대식 건물에서 일한다. 방송에 나와서 농담 몇 마디 하고 몇 백만 원씩 받아가는 출연자들을 만나면서 일하는 게 방송작가들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을 ‘희망고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은혜라는 한 평범한 전직 방송작가가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이란 책을 냈다. 오늘 받아서 단숨에 읽었다. 방송 일을 그토록 좋아 했지만 결코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가 느끼는 모멸감과 구조적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방송을 나온 후에 저자는 이 책을 썼다. 방송작가 유니언이란 단체가 생기고, 20대 국회 환노위가 그나마 관심을 가져서 고용노동부가 이제야 조금씩 개선에 나서고 있지만 가야 할 길은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해 그렇게 목소리를 내는 방송은 작가 등 자기들의 프리랜서 비정규직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란 유머가 있다. 대학에선 조교한테 시키면 된다고 했다. 국회의원은 보좌진에게 시키면 될 것이다. 그런데 방송사에선 작가에게 시키면 된다는 유머가 있는 모양이다. (책에 한 줄나온다.) 카페 라떼 두 잔 마시는 셈치고 많이 사서 보기를 적극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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