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멜빈 레어드 : 닉슨의 국방장관 (2)

작성일 : 2022-04-18 12:03조회 : 1,149

멜빈 레어드 : 닉슨의 국방장관 (2)

레어드가 국방장관을 할 시절에 의회는 민주당이 상하 양원에서 압도적 다수의석을 장악하고 있었고 많은 의원들이 베트남 전쟁과 국방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하원의원 출신으로 의회를 누구 보다 좋아했고 또 의원들과 돈독했던 레어드 장관이기에 국방부는 의회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레어드는 의회에 자주 출석해서 의원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는 등 의원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레어드는 낙후된 장비를 버리고 새로운 무기 체계를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국방예산이 많이 필요했는데, 레어드는 의회를 설득해서 장관으로 있던 4년 동안 국방부는 재래식 병력을 감축하는 대신에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F 15와 F 16, 지상공격기 A 10, 그리고 신예 폭격기 B 1 개발에 착수했고,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트라이던트 탄도미사일과 크루즈 미사일, 그리고 로스앤젤레스급(級) 핵잠수함 도입 계획을 확정시켰다. 1980~90년대 군사 강대국 미국의 군비(軍備)는 레어드가 국방장관을 지낼 때 설계된 셈이다.

위스콘신 출신 정치인인 레어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민의 정서를 잘 알았다. 1969년 가을 워싱턴 DC에선 대대적인 반전(反戰) 시위가 열렸는데, 레어드 장관의 아들로 대학생이던 존 레어드가 그 시위에 참가해서 화제가 됐다. 존 레어드는 자기가 국방장관의 아들임을 밝히고 아버지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다면서, 자기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기자들에게 이야기해서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됐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레어드를 만난 닉슨은 레어드에게 아들을 잘 관리하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레어드는 내 아들 문제에 대해 다시는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라고 정색을 하고 반박해서 닉슨과 참모들을 놀라게 했다. 닉슨은 그 후 각료나 참모의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당시는 국방부, 국무부, FBI 고위 관료의 자식들이 반전 시위에 나서서 골머리를 앓았던 아버지들이 많았다.

레어드는 국방부 내의 강경파인 해군장관 존 채피(John Chafee 1922~1999)와 해군차관 존 워너(John W. Warner III 1927~ 2021)에게 반전 시위를 몰래 구경하고 오라고 했다. 2차 대전 참전용사인 두 사람은 반전 시위를 직접 본 후에는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평범한 미국인들임을 깨닫고 레어드 장관의 견해에 동조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존 채피와 존 워너는 그 후 오랫동안 상원의원을 지냈다. (존 워너는 한동안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남편이어서 그것으로 더 유명했다.) 국방장관으로서 레어드는 북베트남에 포로로 잡혀 있는 미군 장병들에게 편지 쓰기 운동을 당시 1천 만 부 이상 팔리던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지(誌)와 함께 벌이고 포로 가족들을 국방부와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위로했다. 포로 생활을 오랫동안 한 존 매케인(John S. McCain III 1936~2018) 상원의원은 미군 포로와 그 가족들에게 레어드 장관만큼 희망을 안겨 준 사람은 없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닉슨 대통령 임기 초인 1969년 4월, 미 해군 정찰/첩보기 EC 121이 공해상에서 북한 미그기에 의해 격추돼서 미군 장병 31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격분한 닉슨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보복 공습을 감행하려 했고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레어드 장관은 정색을 하고 반대했다. 레어드는 북한에 대한 공습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 미국은 베트남과 한국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할 만한 여력이 없다면서 군사보복에 반대했다. 닉슨이 보복 공격에서 물러서지 않자 레어드는 로저스 국무장관과 함께 사표를 쓰겠다고 버텨서 닉슨의 무모한 군사행동을 저지했다.

레어드는 자기가 약속한대로 1973년 1월 장관직을 사임했다. 레어드는 상원의원 출마 등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워터게이트 사건이 확대되어 백악관 비서실장 밥 홀드먼과 국내문제 보좌관인 존 얼릭먼이 사임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이들을 대신해서 백악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키신저 아래서 안보부보좌관을 하다가 중장을 건너뛰고 대장이 되어 육군참모차장을 하던 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Haig Jr. 1924~2010)를 4개월 만에 불러들여서 홀드먼의 후임으로 비서실장을 맡도록 했다. 존 얼릭먼의 후임으로 국내문제 보좌관을 할 사람도 찾지를 못해서 그해 1월 말에 국방장관을 그만 둔 레어드에게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레어드는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으나 절친한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 제럴드 포드의 간절한 부탁을 모른 체 할 수 없어서 5월 1일자로 백악관 국내문제 보좌관을 맡게 됐다.

닉슨과 오랫동안 선거와 정치를 같이 했던 밥 홀드먼과 존 얼릭먼과 달리 헤이그와 레어드는 닉슨과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헤이그와 레어드는 그날그날 백악관이 움직이도록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키워가던 헤이그와 달리 레어드는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 그 해 10월,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 1918~1996) 부통령이 뇌물 수수와 탈세 혐의로 사임하자 닉슨은 후임 부통령을 지명해야만 했다. 그 때 레어드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제럴드 포드를 추천했고, 포드는 상원의 인준을 받아서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는 중에도 워터게이트 사건은 갈수록 파문이 커져서 레어드는 무력감을 느끼고 1974년 1월 사임했다.

백악관을 나온 레어드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지(誌) 상임고문직으로 맡고 그 잡지에 활발하게 기고를 했다. 닉슨이 사임하자 대통령에 취임한 제럴드 포드는 부통령을 지명해야 했는데, 그 때 레어드와 조지 H. W. 부시가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포드는 공화당 내의 진보파인 넬슨 록펠러 전 뉴욕 주지사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닉슨과 가까웠던 것이 레어드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워터게이트로 인해 선출직을 다시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레어드는 그 후 몇몇 기업의 이사직을 맡았고 강연과 기고를 하면서 조용히 살았다.

레어드는 말년에 자신이 국방장관을 4년 동안 하면서 베트남화(化) 정책을 수립해서 철군을 하고, 미군을 모병제로 전환한 것과, F 15, F 16, A 10, B 1 등 차세대 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트라이던트 탄도미사일을 개발한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뽑았다. 베트남 전쟁 중에 성능이 떨어지는 전투·폭격기로 많은 조종사들이 희생됐던 미군은 이렇게 해서 F 15 등 신예 항공기를 갖게 됐으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말년의 레어드는 조지 W.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려하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역임한 브렌트 스코크래프트 등과 함께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2016년 플로리다의 은퇴지에서 94세로 사망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 사진 (1) 1972년 북베트남 춘계 대공세를 브리핑하는 레어드 장관 (2) 레어드 장관과 포로/실종 장병 가족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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