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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닉슨 대통령

작성일 : 2022-10-09 08:39조회 : 1,335

한국과 닉슨 대통령

케네디 이후 한미 관계는 기복이 있었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준 박정희 정부를 지지했다. 당시 최신예 전폭기인 F-4 팬텀은 미군의 수요를 충족하기도 힘들었지만 미국은 그런 팬텀을 한국 공군에 공여했다. 반면에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려 하고 인권 문제를 들어 박정희 정부를 비판해서 한미 관계는 최악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사에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치열하게 싸운 전투를 언급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문제는 닉슨 대통령 시절의 한미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리차드 닉슨은 아주 오래 전 한국을 방문했다. 닉슨은 부통령 시절인 1953년 10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로 아시아 태평양 국가를 부인 패트 여사와 함께 순방하게 된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사실상 분단 상태인 베트남의 사이공과 하노이를 방문하고 대만을 거쳐서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는 휴전협정이 맺어진 후 3개월이 지나서였다. 닉슨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단독으로 북한으로 진격할 가능성을 우려했고, 친서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베풀어 준 도움과 호의에 감사함을 표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이 단독으로 군사 조치를 취하게 되면 미국에 미리 통보하겠다고 닉슨에게 말하자 닉슨은 미국과 협의 없이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닉슨은 다음 날에도 이 대통령을 만나서 다짐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한국은 미국과 함께 할 것이라면서 닉슨을 안심시켰다. 닉슨은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강인하며 지적(intelligent)이었다고 썼다. 닉슨은 휴전 협정 체결 과정에 참여했던 국제법 변호사로 주한 미국 대사관에 머물고 있던 아서 딘(Arthur Dean)을 만났는데, 딘은 닉슨에게 이 대통령이 ‘위대한 지도자’(great leader)라고 치켜세웠다. 닉슨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의 어려운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이 된 닉슨이 한국과 관련해서 겪은 첫 사건은 미 공군 첩보기 EC-121 피격이었다. 1969년 4월 15일, 동해의 공해 상공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EC-121이 미그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돼서 승무원 31명이 전원 사망했다. 1968년 1월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함(艦)이 북한 함정에 의해 납치돼서 그 승조원들이 1968년 12월에 간신히 석방됐는데, 그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북한이 또 도발을 한 것이다.

당시는 닉슨 행정부가 들어선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 비상사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닉슨 자신이 한국에서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 푸에블로함 사건과는 달리 승무원이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대응은 군사적 타격 뿐이었다.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은 보복을 하지 않으면 미국이 우습게 보인다고 주장했으나 로저스 국무장관과 레어드 국방장관은 전면 전쟁의 우려가 있다고 보복 공격에 반대했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을 끝내겠다고 당선된 자신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보복 공격을 포기했다. 키신저는 미국이 이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닉슨은 1969년 7월 23일 괌에서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고 각자가 자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닉슨은 8월 2일 루마니아에 도착해서 공산권을 최초로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 됐다. 닉슨은 루마니아 대통령에게 자신이 중국을 방문할 의향이 있음을 베이징에 전해 주기를 부탁해서 1971년 중국 방문의 길을 텄다.

1969년 8월 21일, 닉슨은 박정희 대통령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다. 닉슨은 박 대통령 부부를 위해 의장대 행사를 열어 주었다. 그 날 정상회담은 오후 4시 15분에 시작해서 두 시간이 걸렸는데, 박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과 베트남 상황에 대한 우려에서 섬유류 수입제한 문제에 이르는 광범한 의제를 갖고 닉슨과 대화를 나누었다. 닉슨은 한국이 자체 방위에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박정희는 미군 주둔을 요청했다. 정상회담 대화 내용과 공동성명은 국무부 자료로 공개돼 있다. 공동성명은 주한 미군과 한국군이 한국을 강력하게 방위해야 한다고 해서 주한 미군의 당위성을 재확인했다. (공동성명 원문) https://www.presidency.ucsb.edu/.../joint-statement...

하지만 이 회담을 보도한 8월 23일자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한국 방위에 대한 책임을 줄였다고 제목을 뽑았다.(NIXON-PARK TALKS END ON MILD NOTE; U.S. Commitment to Korean Security Is Played Down) 회담 후 닉슨은 지지자 모임에 참석하고 전차를 타고 시민들을 만났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야유를 보내서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고생을 했다. 닉슨은 박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선 회고록에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만큼 이 만남에 대해선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과 중국 및 소련과의 정상회담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선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따라서 박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고 7.4 공동성명을 하고 또 유신을 선포하더라도 한국 문제는 닉슨과 키신저가 관심을 줄 사안이 못되었다.

얼마 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방한했을 때 윤 대통령이 만나지 않았던 일을 두고서 닉슨의 면담 요청을 외면한 박정희 대통령이 큰 고생을 했음을 떠올리는 칼럼이 나온 적이 있다. 당시 외무장관의 회고에 의하면 1966년에 야인이던 닉슨이 서울에 들렀을 때 박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는데, 청와대에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1966년 닉슨은 그 해 11월 중간선거에 나오는 공화당 후보들을 정열적으로 지원했고, 그 결과로 공화당은 상원과 하원에서 의석을 늘렸고 주지사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그 해 선거 운동에 대해 자랑을 했지만 아시아 여행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았다.

1969년 1월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 해 4월 EC-121 격추 사건이 있었지만 미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7월 23일에는 아시아 방위는 아시아 자체로 하라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됐다. 박 대통령은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백악관에 면담을 요청했을 것이다. 마침 닉슨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게 돼있자 마음이 급한 박 대통령이 태평양을 건너갔을 것이다.

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닉슨은 이 대통령이 강인하고 지적(知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닉슨과 박 대통령 간의 두 시간 대화를 보면 중요한 현안에 대해 두 사람이 진지한 논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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