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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박정희 그리고 주한 미군 철수

작성일 : 2022-10-29 19:03조회 : 691

닉슨, 박정희 그리고 주한 미군 철수

얼마 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다녀가는 길에 서울을 들렀는데, 윤 대통령이 휴가 중이라면서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은 것을 두고 이를 비판하는 칼럼이 여기저기에 나왔다. 특히 박정희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오래 지낸 이동원의 회고록의 한 대목을 들어서 윤 대통령을 비난한 경우가 많았다. 고인이 된 이동원 전 장관에 의하면, 1966년에 야인이던 닉슨이 서울을 방문했는데, 미국 대사관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을 요청했음에도 박 대통령은 닉슨을 이미 끝난 사람으로 알고 면담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예상과 달리 닉슨이 대통령이 되자 박 대통령은 닉슨을 만나려고 했고, 그해 8월 21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서 박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는데 닉슨은 박 대통령을 푸대접했다는 것이다. 이동원 전 장관에 의하면, 그 결과로 1971년 3월 한국 전쟁 후 한국에 계속 주둔해 온 미 7사단이 철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을 방문한 닉슨을 푸대접해서 주한 미 육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이 철수했듯이, 펠로시를 푸대접해서 우리가 자동차 등 현안 문제에 대해 불이익을 당하게 됐다는 것이 몇몇 사설과 칼럼의 논지였다. 그러나, 이렇게 따라 쓰기 전에 과연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닉슨이 그런 일로 주한 미군을 철수시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과연 박 대통령이 1969년 8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푸대접을 당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닉슨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한 박 대통령 부부를 위해 3군 의장대 행사를 베풀어 주었고 자신도 부인 패트 여사와 함께 박 대통령 부부를 환영했다.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통역만 대동한 단독회담은 두 시간이 걸렸고 토의 내용과 공동선언은 공개돼서 지금도 미 국무부 사이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 대통령이 두 시간을 할애해서 대화를 한 것을 푸대접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뉴욕에서 서서 48초 동안 만난 것도 정상회담이라고 우기지 않는가.)

박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에는 존슨 대통령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환영에 비하면 푸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존슨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예우해 준 것은 우리가 육군 2개 사단과 해병 여단을 베트남에 파견해 준 데 대한 반대급부였다. 반면에 닉슨은 존슨이 무모하게 벌인 베트남 전쟁을 명예롭게 끝내겠다고 약속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었다.

닉슨은 야인 시절인 1967년에 <Foreign Affairs>지(誌)에 발표한 ‘Asia After Vietnam'이란 논문에서 나중에 닉슨 독트린이라고 불린 자신의 구상을 설파한 바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준비된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닉슨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새 정부가 취해야 할 방침에 대한 메모랜덤을 소관 부처에 하달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국가안보연구 메모 3호(National Security Study Memorandum No. 3 : NSSM 3)이다. NSSM 3은 기존의 국방체제 전반을 재검토하라는 지시인데, 이 과업은 국방차관으로 발탁된 데이비드 패커드(David Packard 1912~1996)가 수행했다. 데이비드 패커드는 휼렛-패커드 컴퓨터 공동창업자로 회사 업무를 3년간 쉬고 막대한 연봉 삭감을 감수하면서 닉슨 행정부에 들어와서 국방체제 개편을 도왔다. 그 해 가을까지 패커드 차관은 ’Worldwide Strategy 2'를 완성해서 닉슨에게 보고했다.

패커드 차관은 미국의 재래식 군사력이 방만함을 지적했을 뿐 더러 당시 미군의 전시 태세인 'two and a half war' 전략을 ‘one and a half war' 전략으로 바꿀 것을 건의했다. 그 때까지 미국의 군사력은 소련 및 중국과의 전면전을 동시에 치르면서 베트남 전쟁 같은 지역 전쟁을 병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소련과 중국이 국경 분쟁을 겪는 등 상황 변화로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one and a half war' 능력이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중국과 대화를 트겠다는 닉슨의 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패커드 차관은 유럽에 주둔하는 미군은 그대로 두되 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 지상군 23.5개 사단 병력을 14.5개 사단 병력으로 감축할 것을 건의했다. 닉슨은 이 건의를 받아드렸다.

이런 변화가 트루먼 행정부 이래 취해 온 공산권 억제 전략(containment policy)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닉슨은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종래의 정책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더구나 무모한 베트남 전쟁을 추진해 왔던 민주당이 야당이 되자 이제는 공화당 정부의 국방예산을 삭감하겠다고 나섰고, 당시 상원과 하원은 모두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다수파였다. 따라서 닉슨은 국방 정책을 수정해서 예산을 스스로 줄여야만 의회와의 예산 투쟁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주한 미군 감축은 이런 커다란 전략 변화에 따라 추진된 것이었다.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사이공을 방문하기 전에 괌에 기착해서 나중에 ‘닉슨 독트린’이라고 불리는, “아시아 방위는 아시아인에 의해서”라는 선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화급하게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대통령을 만나서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했으며, 그 결과로 니온 공동선언은 주한 미군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1970년부터 닉슨은 자기가 대선에서 약속한 대로 베트남 주둔 미군의 철수를 진행해서 50만 명에 달했던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이 그 해 말에는 3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1970년 10월 닉슨은 나토에서 미군이 철수할 계획은 없으며 한국에서도 이미 계획이 확정된 것 이상의 추가 철군은 없다고 국방부에 지시했다. 따라서 닉슨은 주한 미군 2개 사단 중 패커드 국방차관의 구상에 따라 철수가 예정되어 있는 7사단은 철수하고 2사단은 그대로 잔류시키기로 확정한 것이다. 1971년 3월, 주한 미 7사단은 본국으로 철수했고 본국에서 현역 편제에서 해제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닉슨은 한국에 미 지상군 1개 사단을 주둔시키고 유사시 공군과 해군 전력을 파견하면 한국은 자체적으로 방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케네디에게 정부를 넘겨주었을 때 미국은 재정 흑자였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대통령 존슨이 닉슨에게 정부를 넘겨주었을 때 미국은 재정 적자로 선회했고 악성 인플레이션이 심해졌으며,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재래식 전력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반전(反戰) 운동이 일어나서 미국은 두 쪽이 나버린 상태였다. 파탄에 이른 미국을 인수한 닉슨은 외교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유능하고 노회한 지도자였다. 그런 닉슨이 야인 시절에 서울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주한 미군을 철수시켰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듣기에도 이상하지 않은가.

더 심각한 문제는 당시 박 대통령과 그 주변 참모들이 닉슨 행정부의 의도를 잘못 알고 오류를 범해서 1970년대 10년 동안 한미 관계가 대단히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쓰기로 한다.
사진 : (1) 왼쪽부터 존 스테니스 상원 군비위원회 위원장, 데이비드 패커드 국방차관, 멜빈 레어드 국방장관. 1969년
(2)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 1969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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