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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정희, 닉슨을 오해하다
작성일 : 2022-10-30 21:17조회 : 705
박정희, 닉슨을 오해하다
데이비드 패커드 국방차관이 주도한 아시아 주둔 미군 감축 계획에 따라서 주한 미군을 감축하도록 한 결정은 1970년 3월 20일자 국가안보결정 메모 48호(National Security Decision Memorandum 48)로 확정됐는데, 주한 미군 2개 2사단 중 1개 사단 병력 2만 명을 감축하며 그 대신 5년간에 걸쳐서 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메모가 발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큰 배신감을 느끼고 반발했으며, 주한 미 대사 윌리엄 포터(William Porter 1914~1988)는 박 대통령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그해 4월 조셉 타이딩스(Joseph Tydings 1928~2018)란 젊은 급진성향 민주당 초선 상원의원이 상원 본회의에서 “한국군은 자체적으로 방위를 할 능력이 있다”면서 닉슨 행정부가 주한 미군을 빨리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뉴스를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의회가 반대하면 국군 현대화 5개년 작업을 미국이 지원한다는 약속이 휴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타이딩스 의원은 민주당내에서도 급진파였고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해서 의회를 떠났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과민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71년 4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 미군 철수 문제는 박 대통령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 즈음 윌리엄 포터 대사는 박정희 정부가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시작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 보고는 닉슨 대통령에게도 전달됐고, 닉슨은 한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우려를 참모들에게 표명했다. 닉슨은 박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 1918~1996) 부통령으로 하여금 서울을 방문토록 했다.
닉슨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으로 발탁된 스피로 애그뉴는 메릴랜드 주지사를 지냈다. 미국 부통령은 상원 본회의 사회를 보고 국내외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주된 임무인데, 닉슨은 애그뉴를 남부와 기독교 보수층을 달래는 역할을 맡겼다. 애그뉴는 이들 입맛에 맞는 발언을 해서 이들이 닉슨을 지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는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이런 애그뉴를 ‘극우 또라이’로 치부했다. 애그뉴는 국가안보회의(NSC) 멤버도 아니라서 외교국방 사안에 대해 간여하지도 또 알지도 못했다. 닉슨은 박정희 대통령을 달래고 미국이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애그뉴 부통령을 한국에 보내서 덕담이나 하고 오도록 했던 것인데, 이것이 오히려 화(禍)를 불러왔다.
1970년 8월 24일 서울에 도착한 애그뉴 부통령은 국군 부대를 방문하고 사열을 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이어서 애그뉴는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예방했다. 애그뉴는 자기가 선의(good will)의 사절이기 때문에 화기애애한 담소를 하고 사진이나 찍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애그뉴 부통령한데 주한 미군을 철수하려는 미국 정책을 힐난해서 무려 6시간 동안 통역을 통해서 두 사람이 다투고 말았다. 애그뉴 부통령은 단순한 성격이고 다혈질인데다가 자신은 상세한 내용도 모르는데 무려 6시간 동안 잡혀서 이런 대담을 했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애그뉴는 다음 행선지인 대만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모든 주한 미군은 향후 5년 안에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당시 우리 언론은 한미 정상이 6시간 동안 안보협의회의를 했다고 썼는데, 박 대통령이 애그뉴라는 사람을 잘 몰라서 발생했던 해프닝이었다. 여하튼 애그뉴의 폭탄선언이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중대한 결심’을 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은 분명했다. 애그뉴의 발언은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의 공식적 입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그의 발언은 파급 효과가 적지 않았다.
1970년 10월, 주한 미국 대사관과 서울 주재 CIA는 한국 정부가 미국 의회, 특히 민주당 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시작했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그해 12월 국무부는 한국 정부가 로비를 규제하는 미국법을 무시하고 의회를 상대로 로비활동을 하고 있다고 재무부와 법무부에 통보했다, 1971년 초, 법무부와 국무부는 박동선이라는 부유한 한국 기업인이 불법 로비 활동의 주인공임을 확인했다.
1971년 6월, 알렉시스 존슨 국무차관은 한국 정부의 불법적인 로비 활동에 대해 존 미첼 법무장관에게 공식적으로 보고했다. 이제 공은 법무부로 넘어왔고 법무부는 공식 수사를 통해서 박동선 등을 해외로비규제법 위반으로 기소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존 미첼 법무장관은 이 사안을 닉슨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닉슨은 미첼 장관에게 FBI를 통해서 감시하도록 하고 직접적인 조치는 취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 후 FBI는 박동선이 접촉한 미국 의원들과 그 보좌진을 감시하게 되며, 그것이 결국 박동선 ‘코리아게이트’로 발전해서 한미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박 대통령은 10월 유신과 인권유린, 김대중 납치 등으로 미국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지미 카터는 1976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주한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1970년대 한미 관계는 이처럼 살얼음 같았는데, 박정희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닉슨 대통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사진 : 1970년 8월 24일 김포 공항에 도착한 애그뉴 부통령을 정일권 총리가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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