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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대의 조정자>
작성일 : 2023-02-16 16:16조회 : 558
<시대의 조정자>
남재희 전 장관님이 책을 내시고 한 권을 보내주셨다. 제목은 <시대의 조정자>. 하지만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한 지식인의 기록’이란 부제가 보다 가슴에 와 닫는다. 최근 몇 년 동안 외부 출입을 삼가시고 <황해문화> 등에 기고하신 회고록 성격의 글을 정리해서 상재(上梓)한 책이다. 1960년대 말부터 노동부장관을 하신 김영삼 정부 시절까지의 기록, 그리고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정치인과 언론인과의 교류, 그리고 그들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들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요즘 40대 이하에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서 과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며, 나와 남 장관님과의 인연에 대해 적어 보려 한다.
고등학교 시절(1967~69) 나는 조선일보 남재희 논설위원의 평론을 이런저런 매체에서 접했다. 당시는 신(新)좌파 운동이 미국과 서유럽을 휩쓸던 시기였고 나는 그런 외국의 동향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입학 후 동숭동 캠퍼스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1971년은 야당이 대선과 총선에서 선전(善戰)하고 대법원이 국가배상법을 위헌으로 판결하는 등 ‘서울의 봄’이라고 했던 시절이었다. 서울법대 동문의 주축은 법조인이었지만 법조계 외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배가 몇 분 있었다. 최종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광장’과 ‘회색인’을 쓴 소설가 최인훈이 그러했고, 언론인으로는 동아일보의 송건호 편집국장과 조선일보의 남재희 논설위원이 그러했다. 그리고 3학년이던 1972년 10월에 유신 조치가 있었다. 그 후 두 동문 언론인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남 장관님을 1987년 7월 마포의 어느 등심구이 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아직 조교수였고 논문 쓰느냐고 바빴다. 1987년은 개헌 논의로 학계가 뜨거웠다. 1987년은 미국 헌법 200주년이 되던 해이기도 했다. 학회 간사를 맡고 있던 나는 미국 헌법 200주년 세미나를 준비하는 등 정말 바빴다. 6.29 선언이 있고 나서 매우 무덥던 7월, 아는 교수가 나한테 노태우 대표가 젊은 교수 몇 사람과 점심을 같이 하고 싶다고 하는데 자기는 다른 일이 있고 또 개헌 문제도 있으니까 내가 가면 좋겠다고 해서 약속된 식당에 가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는 노태우 대표가 남재희, 배성동, 심명보 의원과 같이 나왔고 나 외에 교수 세 명이 더 있었다. 다른 교수들은 이공/상경계 교수였던 것 같은데 누구였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노태우 대표는 기분이 좋아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붙이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 때 나는 남 의원과 심 의원께는 대학 후배라고 나를 소개했다. 하지만 26년 후에 남 장관님께 여쭈어 보니까 그 자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런 자리에선 한마디 씩 해야 하니까 나는 노태우 대표한테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도 프랑스 같이 대선에서 결선투표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 대표는 답을 하지 못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때 배성동 의원이 “결선투표는 정국이 안정된 선진국에서 하는 것이지, 우리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답 했다. 그렇게 그 자리는 끝났다. 내가 다음에 남 장관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2013년 봄 JTBC가 <동행>이라는 프로를 녹화할 때였으니 26년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 후 남 장관님과는 여러 번 식사자리를 같이 했고 그러면 지나간 세월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이번에 나온 책에는 그런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반영이 되어 있다.
그날 노태우 대표와 함께한 세 분도 각자의 길을 갔다. 한국일보 언론인 출신인 심명보(1935~1994) 의원은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1988년 총선을 이끌었으나 민정당은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책임을 져야만 했다. 민정당으로 비례대표 의원을 두 번한 배성동(1936~2021) 의원은 1988년 총선에선 지역구에서 낙선했다. 남재희 의원님은 강서구 지역구에서 당선돼서 의원 생활을 계속했다.
내가 당시 민정당 상황을 잘 알 수는 없지만 88년 총선 패배 후 세 분의 영향력은 노태우 정부에서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배성동 의원은 독일에서 박사를 하고 우리가 대학에 입학했을 시기에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해서 이름을 떨쳤지만 낙선 후에는 특별한 직책을 맡지는 못했다. 심명보 의원은 1994년에 위암으로 세상을 일찍 떴다. 노태우 정부에서 세 사람의 빈 자리는 서울법대를 나온 검사 출신들이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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