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나라와 사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칼럼

피그스 만 침공 : 케네디의 실패
작성일 : 2023-04-16 20:33조회 : 1,800


피그스 만 침공 : 케네디의 실패


1961년 1월에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CIA 부국장 리차드 비셀(Richard Bissell 1909~1994)이 작성한 쿠바 침공 계획을 반려하고 다시 만들어 오도록 했다. 원래 계획은 쿠바 남쪽 해안 트리니다드에 쿠바 난민 부대를 상륙시켜서 산간 지대에 잠입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트리니다드는 카스트로에 반대하는 정서가 강한 곳이라서 그곳을 택했는데, 케네디는 그곳에 주민이 많아서 소란스럽다면서 다른 지점을 찾도록 지시했다. CIA는 트리니다드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져 있는 한적한 피그스 만에 상륙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4월 4일, 케네디 대통령은 자파타 작전(Operation Zapata)으로 명명한 이 작전을 승인했다.

케네디는 이 작전을 승인함에 있어서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주로 의논하고 결심을 해서 안보보좌관, 국방장관, 국무장관, 그리고 합참은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제대로 개진하지 못했다.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원래 자기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번디 안보보좌관과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CIA에서 뼈가 굵은 앨런 덜레스와 리차드 비셀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믿었다. 케네디는 합참에게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합참은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았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CIA는 1960년 여름부터 마이애미에서 살고 있는 쿠바 난민들을 상대로 이 작전에 참여할 희망자를 모았다. 이렇게 해서 생긴 부대를 '2506 Brigade‘라고 불렀다. CIA는 쿠바에 상륙할 부대를 엄호할 항공전력을 필요로 했다. CIA는 쿠바 공군이 B-26 폭격기를 갖고 있는데 착안해서 퇴역한 프로펠러 폭격기 B-26 16대를 구해서 정비하고 기관포와 연료탱크를 보완했다. CIA는 B-26 폭격기를 1957년까지 운용했던 앨라배마 항공방위군의 도움을 받아서 항공기를 운용할 130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니카라과와 과테말라의 CIA 기지에서 폭격기를 정비하고 쿠바인 조종사들을 훈련시켰다.

CIA는 피그스 만에 부대가 상륙하기 이틀 전에 B-26 폭격기로 쿠바의 비행장 세 곳을 폭격해서 쿠바 공군의 항공기를 모두 파괴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4월 15일 출격하기 직전에 케네디는 6대만 출격하라고 지시했다. 작전을 지휘하던 리차드 비셀 CIA 부국장은 예비용이란 명분으로 2대를 추가한 8대를 출격시켜서 쿠바 공군기의 절반을 파괴했다. 다음날인 4월 16일에 2차 공습을 할 예정이었는데, 유엔 총회에서 쿠바 대표가 미국이 쿠바를 공습했다고 비난해서 이 일이 알려지자 케네디는 비셀에게 더 이상 공습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4월 17일 어두운 새벽 1500명 규모의 2506 부대원이 피그스 만에 상륙했다. 동시에 수송기 2대에서 공수부대원 177명이 배후 지역으로 낙하했다. 피그스 만은 뜻밖에 산호초가 많아서 상륙정은 접안하지 못했고 따라서 대포와 탄약은 육지로 반입되지 못했다. 아침부터 쿠바 공군기가 2506 부대와 선박에 공습을 가했다. 선박 3척이 침몰하고 어렵게 상륙한 2506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오후부터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30,000명 규모의 카스트로 군대가 반격을 가했다. 배후에 낙하한 공수부대도 우세한 카스트로 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카스트로는 직접 전투 지역에 와서 부대원들을 격려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비셀은 운영이 가능한 B-26을 출격하도록 지시했다.  4월 17일과 18일에 쿠바 조종사들이 탄 B-26이 출격했으나 대공포와 쿠바 공군기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4월 19일에는 마지막 남은 B-26 5대가 출격을 했는데, 그 중 4대는 앨라배마 항공방위군 출신 미국 조종사들이 조종간을 잡았다. 그 날 앨라배마 조종사가 탑승한 B-26 두 대가 쿠바 공군 T-33에 의해 피격됐다. 한 대는 카리브 해에 추락해서 조종사 2명이 실종됐고, 한 대는 육지에 착륙했으나 간신히 살아난 조종사 2명은 카스트로 군에 의해 처형됐다.
 
4월 19일, 2506 부대는 해안으로 퇴각했고 탄약이 떨어져갔다. 이들은 작전 본부에 공중지원을 간절하게 요청했다. CIA 간부가 백악관으로 뛰어 가서 공중지원을 호소했으나 케네디의 참모들은 이들을 만나기를 피했다. 다음 날 2506 부대는 카스트로 군에 항복했다. 피그스 만 침공은 이렇게 재앙으로 끝이 났다. 2506 부대는 118명이 전사했고, 부상자를 포함한 1200여 명이 포로가 됐다. 약 200명이 쿠바 군에 의해 현장에서 그리고 나중에 처형됐다. 작전에 참가한 B-26 7대가 격추됐고 조종사 14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4명은 미국인이었다.

피그스 만 침공은 애당초 성공하기가 어려운 작전이었다. CIA가 쿠바 난민들을 모아서 군사 작전을 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마이애미에 무성했고, 그런 소문은 카스트로의 귀에도 들어갔다. 쿠바 등 중남미 사람들은 워낙 말이 많아서 비밀이 없었다. 1961년 4월 초에는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 사람들이 쿠바를 쳐들어가서 카스트로 정부에 반대하는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한다는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나왔다. 사정이 이러하면 작전을 취소했어야 하는데,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기사를 직접 읽고도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케네디는 피그스 만에 상륙할 부대가 쿠바 자체의 반란군으로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부대원들이 타고 갈 선박 7척도 미국 국기를 지운 민간 선박이었고, 공중 지원을 할 항공기도 반란을 일으킨 쿠바 공군기로 보이도록 미국 표지를 페인트 덧칠로 가렸다. 하지만 이런다고 해서 미국과의 관련성을 모를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엔 총회에서 당시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애들라이 스티븐슨은 쿠바를 폭격한 항공기는 미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발언했으나 웃음거리가 됐다.

CIA가 과연 이 작전이 성공할 것으로 보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CIA가 진정으로 쿠바에서 카스트로에 대항할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판단했는지도 의문이다. 앨런 덜레스 국장이나 이 작전을 수립하고 집행한 리차드 비셀 부국장은 쿠바에 상륙한 2506 부대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 케네디가 군사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어떤 대통령도 그런 상황에서 무력하게 물러나지는 못할 것이니 그 기회에 미 군사력을 동원해서 카스트로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미 해군은 쿠바 근해에 항공모함 에섹스함(USS Essex)을 주축으로 한 항모전단을 배치해 놓았다. 에섹스함에는 지상공격기 A-4 스카이호크 편대가 대기하고 있었으나 출격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마이애미 남쪽 홈스테드 공군기지에는 공군기가 항상 대기 중이었다. 피그스 만에 상륙한 2506 부대 지휘관들도 상황이 잘못되면 미군 항공기가 지원해 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런 지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 

CIA가 준비해 놓은 B-26 폭격기도 절반 밖에 동원하지 못하도록 한 케네디가 해군과 공군에 출격 명령을 내릴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4월 18일에 케네디는 소련 수상 흐르시쵸프로부터 쿠바에 미군이 개입하면 중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럼에도 케네디가 미군기로 하여금 쿠바를 공격하라고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 당시 소련의  해군력은 미국에 비해 턱없이 열세였기 때문에 실제로 소련이 군사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미군은 속전속결로 카스트로 군을 제압했을 것이다. 때문에 사태를 지켜본 합동참모본부의 4성 장군/제독들은 케네디가 형편없이 허약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상황이 실패로 끝나자 케네디는 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인정했다. 케네디와 그의 참모들은 이 대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 정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을 발족시켜서 케네디의 매부인 사전트 슈라이버를 단장으로 임명했고, 1960년대가 끝나기 전까지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우주 계획을 서둘러 발표했다. 그럼에도 카스트로에게 포로로 잡힌 1200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케네디는 자기가 CIA를 믿은 게 잘못이라면서 “CIA를 천 개의 조각으로 찢어 버리겠다“고 참모들에게 말했다. 케네디는 앨런 덜레스와 리차드 비셋을 경질하기로 결심했다.

- 사진 (1) 카스트로 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2506부대원
- 사진 (2) 침공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 사진 (3) 케네디 기자회견. 1961년 4월 21일. 케네디에겐 치욕적인 날이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