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948년 이태리 총선

작성일 : 2023-04-25 11:30조회 : 547

1948년 이태리 총선

요즘 1948년 4월, 백범 김구의 평양 방문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다. 거기에 내가 첨언할 필요나 이유는 없다. 그 보다는 그 시점에 미국과 유럽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이었다. 트루먼은 우리나라의 오늘을 있게 한 미국 대통령이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1944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내 우파에 힘입어 부통령 후보가 된 트루먼 덕분에 우리나라가 공산화를 피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공산주의 동조자였던 헨리 월러스(Henry Wallace 1888~1965)가 계속 부통령으로 남아서 루스벨트가 사망한 후 대통령이 됐다면 우리는 물론이고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김구가 평양회의 참석을 위해 출발하려던 1948년 4월 18일, 이태리에선 전후(戰後)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총선이 있었다. 그 선거를 앞두고 트루먼은 CIA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기민당(DC :Christian Democracy)의 승리를 만들라고 특명을 내렸다. 그리고 기민당은 하원에서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그 결과로 이태리는 나토에 가입했고 미국의 핵 미사일이 이태리에 배치될 수 있었다. 이태리는 제2의 유고슬로비아가 될 뻔했던 위기를 벗어나서 자유와 번영의 길을 가게 됐다. 그러면 2차 대전 후 이태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

2차 대전 중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나치를 상대로 무력 저항 운동을 펼친 세력에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많았다. 2차 대전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힘을 합쳐서 파시즘과 싸운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와 이태리에선 선거로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약속이나 한 듯이 두 나라에는 기민당/공화당, 사민당 외에도 공산당이 의회에 대거 진출해서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두 나라의 총리는 우익 정당 소속이었으나 공산당 각료가 여러 명이 참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유럽을 부흥하기 위한 마셜 계획을 수립해서 피폐해진 유럽 각국을 도울 참이었다. 트루먼은 내란이 발생한 그리스에선 왕당파(王黨派)를 지원하는 등 공산당을 철저하게 배척했다. 트루먼은 공산당이 내각에 참여한 프랑스와 이태리에게 경제지원을 할 수 없다면서 두 나라 총리에게 공산당과 결별하라고 요구했다. 1947년 5월, 프랑스 총리 뽈 라마디에르(Paul Ramadier 1888~1961)는 공산당 각료를 축출했고 이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에 경제원조를 시작했다.

이태리에선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이태리의 사회당은 프랑스의 사회당 보다 공산당에 가까워서 기민당 소속의 알레시드 드 가스페리(Alecide De Gasperi 1881~1954) 총리는 공산당과 사회당 각료를 모두 축출하고 의회를 해산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이태리는 1948년 4월에 총선을 다시 치르게 됐다. 이태리 공산당(PCI)과 사회당(PSI)은 인민전선(Popular Demo. Front)을 이루어서 드 가스페리가 이끄는 기민당과 승부를 겨루게 됐다. 언론인 출신으로 무솔리니에 의해 투옥된 적이 있는 훌륭한 경력의 드 가스페리이자만 대중적 인기는 높지 않았다. 파시스트에 대항해서 적극적으로 투쟁을 한 세력이 모인 인민전선은 인구 밀집지역인 투스카니, 움부리아 등에서 지지가 높았다.

당시 CIA 로마 지국의 책임자는 제임스 앵글턴(James Angleton 1917~1987)이었다. 부유한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앵글턴은 어릴 때 아버지의 사업체가 있는 밀라노에서 살았다.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예일 대학을 나온 그는 시학(poetry)과 언어 기호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마치고 부친이 사업을 하는 이태리로 돌아 온 그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를 만났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앵글턴 일가는 사업체를 두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앵글턴은 하버드 로스쿨을 다니다가 1943년에 징집됐다. 명문 대학을 나오고 기호학을 아는 앵글턴은 육군 산하의 전략국(OSS) 요원으로 차출되어 영국에서 첩보 훈련을 받았다. 미군이 이태리를 해방하자 그는 이태리 주재 요원으로 로마에 도착했고, 그의 부친도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해서 미군 당국을 도왔다. 앵글턴은 전범으로 체포된 에즈라 파운드가 정신병원에 입원토록 주선하고 몇몇 파시스트를 처형 위기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1947년 9월에 CIA가 발족하자 앵글턴은 이태리 지국을 총괄하게 됐다. 트루먼 대통령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1948년 4월 총선을 기민당 승리로 이끌라고 지시하자 앵글턴은 이 책임을 맡았다. 기민당은 조직과 자금 면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에 비해 열악했다. 앵글턴은 CIA 자금 1천만 달러(2020년 가치로 환산하면 1억 달러가 넘는다)를 들여와서 기민당 조직을 만들고 선거 홍보를 했다. 리라화(貨)가 가득 든 자루를 기민당 지부로 실어 나르고 기민당은 그것으로 선거 운동을 했다. 가톨릭 신자인 앵글턴은 로마 교황청과 교류가 많았다. 그는 교황청 고위관료이던 지오반니 몬티니(Giovanni Montini 1897~1978) 몬시뇰과 가까웠다. 가톨릭 교회는 “공산당을 택할 것인가, 신(God)을 택할 것인가?“라면서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몬티니 몬시뇰은 바티칸 국무장관이 되고 대주교가 된 후 밀라노 교구장을 역임했으며, 1963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되어 1978년에 선종할 때까지 재임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군에 협력했던 마피아도 1948년 총선에서 기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CIA는 마피아에게도 선거 자금을 제공했다. (2차 대전 중 미군 정보국은 뉴욕 항만에서 발생한 폭발사고 후 마피아 보스 중의 보스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던 루치아노(Charles 'Lucky' Luciano 1897~1962)에 부탁해서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던 항만 노조에서 사보타지가 생기지 않도록 부탁했고, 조지 패튼 장군이 이끄는 미 7군(US 7th Army)이 시칠리에 상륙하게 되자 역시 루치아노에게 부탁해서 시칠리 마피아가 연합군을 돕도록 했다. 그 대가로 루치아노는 석방되어 이태리로 추방됐다.)

총선 결과는 574석 중 기민당이 305석을 차지해서 과반수 의석을 훌쩍 넘겼다. 인민전선은 183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이태리에 기민당 단독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매우 만족해 했다. 만일에 공산당/사회당 연립정부가 집권했더라면 내란 중이던 그리스에서도 공산당이 승리하는 등 유럽의 정치지형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기 위해 CIA, 교황청, 그리고 마피아까지 총력을 기울인 셈이다. 당시 미국 최대 잡지였던 타임(TIME)지도 기민당의 승리를 위해 큰 역할을 했다.

이태리의 기민당은 1983년까지 계속 집권했고 사회당/좌파당은 1990년대 말에야 비로소 집권다운 집권을 하게 된다. CIA는 1960년대 말까지 기민당을 지원했다. 제임스 앵글턴은 CIA 본부로 돌아와서 ‘CIA 내부의 CIA'라고 불렸던 방첩단(Counter-intelligence Staff)을 이끌다가 1974년 말에 사임하고 1987년에 사망했다. CIA 요원으로 1948년 이태리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그의 나이는 31살이었다. 하지만 편집증에 시달린 앵글턴의 말년은 불행했으며 그는 케네디 암살에 관한 진실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샀다.

- 사진 (1)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드 가스페리. 1947년 1월. 가운데는 딘 애치슨 국무차관
- 사진 (2) 드 가스페리, 1948년 총선 유세.
- 사진 (3) 1951년 미국 방문 중 맨해튼에서 이태리계 시민들의 환영에 답례하는 드 가스페리 총리
- 사진 (4) 제임스 앵글턴. 왼쪽은 젊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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