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클레어 루스

작성일 : 2023-04-28 07:38조회 : 512

클레어 루스

1948년 이태리 총선이 기민당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트루먼 대통령은 이태리와 프랑스 등에서의 공산당 활동이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안보회의(NSC)는 그 해 9월부터 OPC(정책조정실)이라는 조직을 가동시켰고 1950년 10월부터는 CIA가 이 조직을 운영하게 됐다. CIA는 단순한 재정지원을 넘어서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여론 공작을 시작했다. 이태리는 그런 공작의 중요한 무대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이태리에선 공산당이 두 번째로 큰 정당이라서 안심할 수 없었다. CIA는 이태리 공산당에 소련의 자금이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보았다.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아이젠하워 장군을 내세워서 승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를 국무장관으로, 그의 동생 앨런 덜레스(Allen Dulles 1893~1969)를 CIA 국장으로 임명했다.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덜레스 국제공항은 덜레스 국무장관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명칭이다.) 덜레스 형제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타임/라이프사(社) 사주인 헨리 루스(Henry Luce 1898~1967)의 부인 클레어 부스 루스(Clare Boothe Luce 1903~1987)를 이태리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이태리 주재 대사에 클레어 여사가 임명된 것은 일대사건이었다.

뉴욕에서 태어난 클레어는 음악가이던 부친의 영향으로 음악과 연기를 공부하고 소녀 시절부터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했다. 20살 나이에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해서 딸을 하나 낳고 몇 년 후 이혼했다. 1935년에 헨리 루스와 결혼했다. 당연히 이 결혼은 뉴욕 사교계에 큰 사건이었다. 클레어는 잡지사 기자를 지내서 글을 잘 썼고 헨리 루스는 클레어의 그런 활동을 후원했다. 그녀는 2차 대전 발발 전에 전운(戰雲)이 감도는 유럽을 라이프 특파원 신분으로 여행했고, 역시 전쟁의 기운이 높아가는 중국을 남편과 함께 시찰했다. 2차 대전 중에도 클레어는 특파원 자격으로 중국에서 장제쓰 부부를 만나고 미얀마(당시는 버마)에선 스틸웰 장군을 만나는 등 전쟁 지역을 취재했다. 하원의원 자격으로 유럽 전선을 방문해서 패튼 장군을 만나기도 했다.

1942년 중간선거에서 클레어는 코네티컷에서 공화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미모와 명성에 힘 입어 클레어는 최고의 유명인사 하원의원이 됐다. 하원의원 임기 중인 1944년 1월,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실의에 빠진 클레어는 종교에 탐익하고 가톨릭 신자가 됐다. 당시 미국에선 가톨릭 신자는 2류 시민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클레어의 가톨릭 개종은 큰 사건이었다. 클레어는 1946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이태리 주재 대사가 된 클레어가 로마에 도착하자 센세이션이 일었다. 클레어 대사는 평범한 대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대통령, 국무장관, 그리고 CIA 국장과 어느 때이든 전화를 할 수 있는 거물이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반공주의자인 클레어 대사는 이태리 정계는 물론이고 이태리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해 6월 총선에서 기민당은 원내 과반수에 못 미치는 263석을 얻는데 그쳤다. 공산당이 143석, 사회당이 75석으로 의석을 늘렸다. 기민당은 극우 성향의 두 정당의 도움으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으나 디 가스페리 총리는 물러나야만 했다.

1953년 가을, 윌리엄 콜비(William Colby 1920~1996)가 로마 주재 CIA 책임자로 부임했다. 프린스턴 대학을 나오고 2차 대전 중 OSS 장교로 노르망디 작전과 노르웨이 작전에서 낙하산으로 침투해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 콜비는 CIA 요원으로 스웨덴에서 근무했다. 콜비는 이제 이태리의 공산세력을 제어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콜비도 가톨릭 신자여서 클레어 대사와 함께 교황청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CIA는 1950년대에도 매년 5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기민당에 지원했음이 1970년대 들어서 밝혀졌다. CIA의 지원이 없었다면 기민당이 계속 집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클레어 루스는 1956년 말에 대사직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아이젠하워는 그녀를 브라질 주재 대사로 임명했으나 본인이 사양했다. 윌리엄 콜비는 1958년 이태리 총선을 치르고 다음 임지인 사이공으로 향했다. 1958년 5월 총선에서 기민당은 273석을 얻어서 5년 전보다 의석을 늘렸으나 역시 연정을 해야만 했다. 콜비는 그 후 두 차례 사이공에서 근무하면서 논란이 많은 피닉스 작전을 수행하며, 1973년부터 1975년 말까지 2년 반 동안 CIA 국장을 지내게 된다. 이태리 공산당은 집권은 하지 못했지만 제1 야당으로 1980년대까지 존재해 왔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어서 동유럽 공산체제가 붕괴하자 이태리 공산당은 유럽공산주의(Eurocommunism)의 몰락을 선언하고 스스로 해산했다.

클레어 루스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워싱턴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그녀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는 정·관계 언론계 재계 명사들이 모이는 유명한 자리였다. 헨리 키신저는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닉슨을 단 한번 만났는데, 바로 클레어 루스의 파티에서였다.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은 그녀에게 민간인 최고 훈장인 자유메달을 수여했다. 1987년 10월, 클레어 루스는 84세로 사망했다. 윌리엄 콜비는 1996년 4월, 메릴랜드 부근 강에서 카누를 타던 중 실종됐으며 그의 시신은 9일이 지나서 하류 지점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그의 사인을 사고사로 판단했다. 냉전(Cold War)의 최전선에 있었던 콜비는 가정적으로는 행복하지 못했다. 영화감독이 된 콜비의 아들은 아버지에 관한 도큐 영화 <The Man We Never Knew>를 제작했다.

- 사진 (1) : 클레어와 장제쓰 부부(1942년 중국), 스틸웰 장군(1942년 미얀마), 패튼 장군(1944년 유럽)
- 사진 (2) :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클레어 대사
- 사진 (3) : 클레어 대사와 포스터 국무장관, 닉슨 부통령. 1956년.
- 사진 (4) : 콜비 CIA 국장.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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