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민신탁법, 왜 만들었나 ? (첨단환경 2009.2.)

작성일 : 2009-01-31 14:50조회 : 2,096

<첨단환경 2009년 2월호)

‘국민신탁법’ 왜 만들었나 ?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1.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

지난 2006년 3월, 국회는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이하 ‘국민신탁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은 2007년 3월에 효력을 발휘했다. 이 법률은 영국에서 유래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키기 위하여 환경부가 준비해서 제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법률은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활성화하기는커녕 민간단체의 자발적 운동을 질식하게 할 가능성이 많다.

이 법률은 민간차원에서 하고 있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보전운동을 후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자연환경국민신탁의 설립과 운영 등에 관한 사항과 이에 대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법 제1조) 쉽게 이야기해서 관변단체 두 개를 설립하고 지원하기 위한 법률인 것이다.

2. ‘국민신탁’이란 용어

‘국민신탁’이란 용어부터 유치하다. ‘국민신탁’이란 영국에서 유래한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를 번역한 것으로 생각된다. ‘국민신탁’이 ‘국민은행이 취급하는 신탁상품’ 같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일단 사소한 일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내셔널 트러스트’를 ‘국민신탁’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어떤 건물이나 토지가 역사적 문화적 환경적 고유성과 가치를 갖고 있어 보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민간운동 차원에서 그런 건물과 토지를 구매해서 “네이션(nation)을 위해 신탁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탁’은 “어떤 재산을 소유하되 타인을 위해 관리하는” 영미법 개념이다.

영어로 ‘nation’과 ‘national’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nation’은 ‘국가’를 의미한다. 명사로서 ‘national’은 ‘국민’을 의미한다. 형용사로서 ‘national’은 ‘국가적’이란 의미를 갖는다. ‘national holiday’라고 하면 ‘국가가 정한 휴일’을 의미한다. 또한 ‘nationalism’이라고 하면 ‘민족주의’를 뜻한다. ‘national’은 국가가 세우거나 국가적 중요성이 있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일본인들은 ‘national university’를 ‘국립대학’으로, ‘national park’은 ‘국립공원’으로 번역했고,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따랐다. 대학은 나라가 세우고 운영하기 때문에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국립공원’은 수려한 자연유산을 국가적 차원에서 보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공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영국에서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국민에게 수탁된 자산을 보호하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영국의 국가적 유산(national heritage)을 민간차원에서 보호하는 운동”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형용사로서 ‘national’을 ‘국민’으로 번역하는 것은 곤란하다.

3. 외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영국 등에서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어서 여기서는 개요만 소개하기로 한다.

- 영국

내셔날 트러스트 운동의 시조(始祖)로 뽑는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The National Trust)>는 1894년에 설립됐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라지는 영국의 역사유적과 자연유산을 보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모금을 해서 보존할 건물과 토지를 사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회운동가 옥타비아 힐 여사, 변호사 로버트 헌트, 그리고 성공회 신부(神父) 하드윅 론슬리가 런던의 유서깊은 그로스비노 하우스에 모여서 새로운 민간단체를 탄생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내셔널 트러스트>이다. 이들은 1896년에 이스트 석세스 지방의 오래된 사제관을 10파운드를 주고 구입했다. 영국 의회가 1907년에 ‘내셔널 트러스트 법’(The National Trust Act)을 제정함에 따라 이 단체는 실정법상의 특수법인으로 재설립되었다. 이 법에 의해 <내셔널 트러스트>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보전대상으로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노동당이 집권함에 따라 재산세와 상속세가 늘어나서 성(城) 등 큰 건물을 유지관리하기가 어려워진 귀족계층이 이를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하는 경우가 늘게 되었다. 오늘날 <내셔널 트러스트>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은 잉글랜드, 웨일즈, 및 노던 아일랜드 전체 토지의 1.5%에 달하고, 같은 지역의 해안의 20%에 달한다.

- 미국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의 성공은 미국 등 다른 영미법계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미국 공화당 행정부의 재무장관을 오래 지낸 정권 실세였으며, 멜런 은행 알코아 등 거대한 기업군(群)을 거느렸던 앤드류 멜런의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멜런가(家)와 인연을 맺은 데이비드 핀리는 앤드류 멜런이 미국민에게 남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The National Gallery of Art)의 초대 관장을 오랫동안 지냈다. 인류 문화의 유산인 미술품은 미술관에서 영구히 보관할 수 있지만 미국의 역사유적이 사라지고 훼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핀리는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해서 1949년에 <역사보존을 위한 내셔널 트러스트>(The National Trust for Historic Preservation)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워싱턴 정가(政街)에도 인맥을 갖고 있던 핀리는 의회를 설득해서 ‘역사보전을 위한 내셔널 트러스트 법’이란 법률을 통과시키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 법률은 세금 면제를 인정하여, 이 단체가 재산을 용이하게 취득할 수 있게 하였다. 오늘날 이 단체는 미국에서 29개 지점을 구입해서 역사적 장소(Historic Site)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미국에선 1951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한 <네이처 컨저번시>(The Nature Conservancy)가 자연보전에 관한 내셔날 트러스트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네이처 컨저번시>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11,700만 에이커, 하천은 5000마일에 달한다. 이 단체는 제3세계의 부채탕감과 자연보전을 교환한 ‘debt-for-nature swap’을 민간차원에서 이루어 내는 등 국제적 활동도 활발하다. <네이처 컨저번시>는 비영리법인으로서 미국 세법에 의해 면세와 기부금 공제 혜택을 인정받고 있다.

- 호주

호주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시드니 근교에 살던 평범한 가정주부인 애니 와이어트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것을 보고 이웃과 함께 작은 주민단체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시드니 주변에 자연을 보전하게 되는 성과를 올렸다. 그녀는 시드니 도심의 오래된 유서 깊은 건물이 개발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이를 보전하기 위한 운동을 또다시 시작했다. 자연보호 운동을 도왔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녀는 1945년에 <뉴 사우스 웨일즈 내셔널 트러스트>(The National Trust of Australia - New South Wales)를 설립해서 오랫동안 이사와 부회장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호주의 다른 주(州)에도 내셔널 트러스트가 생겼고, 1967년에는 각주의 내셔널 트러스트 단체들의 협의체가 설립되었다. 호주에서도 내셔널 트러스트 단체는 대부분 비영리법인으로 발족하였고, 나중에 몇몇 주의회가 내셔널 트러스트 단체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 일본

일본에서도 1968년에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소설가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이 신문에 기고한 ‘자연의 파괴’라는 칼럼에서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소개했고,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1968년에 운수성의 감독을 받는 비영리법인 <관광자원보전재단>이 설립되었고, 얼마 후 재단법인 <일본 내셔널 트러스트>로 명칭을 바꾸었다.

1984년에 이 단체는 세법상 특정공익증진법인으로 지정되어 기부금 납부에도 세금 공제가 인정되고, 기증된 재산에 대해서는 상속세와 재산세를 면제되는 혜택을 입게 되었다. 이로서 <일본 내셔널 트러스트>는 기부금을 받아 유적(遺蹟) 재산을 구입하거나 그러한 재산을 증여 받을 수 있게 됐다. 현재 <일본 내셔널 트러스트>는 공원, 저택, 정원, 철도 등 9곳을 보호대상 재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일본에 내셔널 트러스트에 관한 특별한 법률은 없다.

4. 우리나라에서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우리나라에서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규제를 통한 자연환경 및 문화유산 보전이 재산권 보호라는 벽에 부딪침에 따라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그린벨트가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논리를 제기한 후에 토지규제가 재산권을 부당하게 침해한다는 주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함에 따라 소유권과 환경보호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 제시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해서 몇몇 시민단체들이 자연자산과 문화유산을 구입해서 보전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광주 무등산 자락이 택지 등으로 개발됨에 따라 무등산을 구매해서 아예 공유화(共有化)하자는 운동이 일었다. 종잣돈과 부근의 토지소유자가 기증한 땅을 출연해서 지난 2000년 재단법인 <무등산 공유화 운동 재단>이 설립되었다. 1999년에는 대전의 한남대학교 부근의 오정골 선교사촌(宣敎師村)이 개발로 헐리게 될 위기에 처해지자 이를 보전하려는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한남대학교가 이 건물들을 매입해서 보존하게 되었다.

2000년 1월, 서울대학교 양병이 교수 등이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본받아 자연자산과 문화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비영리법인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2002년에 강화도 매화마름 군락지와 화가 최순우의 옛집을 구매하고 또 기증받게 되었다. 그 후에도 강원도 동강의 제장 마을, 권진규 아틀리에 등 몇 건을 시민모금과 유족 증여 등을 통해 확보하였다.

2006년에는 서울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이 남부 순환도로 남측 우면사 자락을 사서 보전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토지 소유주인 GS 칼텍스가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용하던 산자락에 정유 저장소를 건축하겠다고 건축허가를 구청에 냈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총장, 화장품 회사 사장, 법조인 등 서초구에 사는 유명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재단법인 <우면산 내셔널 트러스트>를 결성하고, 모금활동을 벌여 15억 원을 모았다. 이 단체는 서초구청이 기탁한 17억 원, 그리고 GS 칼텍스가 후원금으로 기탁한 12억 6천만 원을 합쳐서 문제의 토지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 사건을 두고 몇몇 신문은 ‘새로운 환경보호운동의 효시’라고 보도했다.

5. 맺는 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중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가 벌이고 있는 운동이 영국에서 유래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의 정신을 충실하게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우면산 내셔널 트러스트>는 이름만 내셔널 트러스트이지 실제로는 서초구가 주도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우면산 자락은 남부 순환도로 북측의 고급 주택가에 사는 서초구민들에게는 소중한 산책로일지 몰라도 과연 ‘내셔널’이란 이름을 붙일 만한 보전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는 서초구청에 대해 우면산에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우면산 자락 같은 주민들의 등산로에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명칭을 쓰게 해서 우리나라에서의 ‘내셔널 트러스트’는 격(格)이 낮아지고 말았다. 또한 ‘국민신탁법’이란 이상한 법률을 만들어서 관변단체를 두 개나 탄생시켜서 순수하게 민간차원으로 시작한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의 입지를 오히려 방해하는 효과를 초래했다.

영국과 미국에도 ‘내셔널 트러스트 법’이 제정되기는 했지만, 이는 민간차원에서 설립된 단체에 대해 세제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국민신탁법’은 관변단체를 탄생시켜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 주고 또 이들에 대해 기부를 하면 세금 혜택을 주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법률은 순수한 민간차원의 내셔날 트러스트 운동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 왔다. 더 늦기 전에 ‘국민신탁법’을 폐지해서 정부가 이 분야에서 손을 떼도록 해야만 우리나라에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c)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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