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하버드의 공부벌레라는 허구

작성일 : 2009-03-03 19:43조회 : 2,431

(중앙대 동문회보, 2009년 3월)

‘하버드의 공부벌레’라는 허구(虛構)

李相敦 (중앙대 교수·법학)

많은 논란 끝에 흔히 로스쿨이라고 불리는 법학전문대학원이 드디어 문을 열게 되었다. 우리 중앙대학교도 50명이란 아담한 정원을 배정 받아 개원을 하게 됐다. 한국적 상황에서 로스쿨이 성공을 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장담하기가 어렵다. 유럽 대륙식 법률교육도 문제는 있지만 미국식 로스쿨도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남의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무모한 측면도 있다. 다른 나라의 제도를 도입하게 앞서 과연 그 나라의 제도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나라에 미국식 로스쿨이 미화(美化)된 데는 80년대 초에 TV 시리즈로 방송되었던 ‘하버드의 공부벌레’(‘The Paper Chase’)의 역할이 컸다. 이 TV 연재물은 1970년에 나온 같은 제목의 소설을 윤색해서 길게 만든 것이다. 원작 소설은 1970년에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존 제이 오스본이 쓴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논픽션 같이 실감나는 이 소설을 썼다. 1973년에 영화로 제작되어서 널리 알려졌는데, 영화에서 킹스필드 교수 역할을 존 하우스먼은 아카데미상(賞)을 받았다. 영화는 소설을 충실히 반영했지만 TV 연속물은 원작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TV 연속물은 에피소드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원작에는 없는 흥밋거리가 많이 추가됐다.

소설의 장르는 비교적 단순하다. 중서부 출신의 제임스 하트라는 학생이 하버드 로스쿨이 입학해서 1학년 동안 겪는 일이다. 찰스 킹스필드라는 권위적이고 가학적(加虐的)인 노교수가 가르치는 계약법 강의가 중심이다. 고압적(高壓的)인 킹스필드 교수는 전형적인 질의 응답식의 소크라틱 강의법을 사용해서 학생들을 괴롭히고, 학생들은 예습을 하고 숙제를 하느냐고 고생을 한다. TV 연속극에서는 킹스필드 교수에게 자상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원작에서의 킹스필드 교수는 학생들의 이름에도 관심이 없는 비인간적 인물이다. 하트는 아름다운 여학생을 사귀게 되는데, 그 여학생은 하트와는 달리 느긋하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여학생은 바로 킹스필드 교수의 딸이었고, 거기서 하트는 킹스필드 교수의 이중적 면모를 깨닫게 된다. 하트는 계약법에서 A학점을 받지만 그 성적표를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바다로 날려 버리는 것이 소설의 끝이다.

저자 오스본은 이 소설을 통해서 하버드 로스쿨과 소크라틱 강의의 비인간적 면모를 고발한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로스쿨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기분으로 소설을 썼는데, 오히려 로스쿨에 대한 흥미를 자아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주로 TV 시리즈를 통해 알려졌기 때문에 원작 보다 훨씬 다른 의미로 알려진 셈이다. 이런 연유로 로스쿨 하면 대뜸 ‘하버드의 공부벌레’에 나오는 질의 응답식 강의가 연상될 정도가 됐다. 사실 우리말 제목인 ‘하버드의 공부벌레’부터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페이퍼’는 답안지나 리포트를 의미하니까, ‘하버드의 점수 벌레’가 보다 정확할 것이다.

킹스필드 교수가 학생들을 괴롭혔던 질의 응답식 강의는 요즘 미국의 로스쿨에선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상위급 로스쿨의 기본과목에서나 이루어지는 정도다. 이런 강의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보통 수준의 학생들을 상대로 그런 강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질의 응답이 쓸데없는 토론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부작용도 있다. 흑인 등 소수인종 학생들이 많아진 것도 질의 응답식 강의가 사라진 원인의 하나다. 또한 읽어야 할 판례와 논문이 갈수록 많아져서 질의 응답식 강의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 측면도 있다.

소설의 저자 존 제이 오스본은 그 후에도 소설을 몇 편 더 썼지만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마이애미 대학과 에쉬바 대학의 로스쿨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로펌에서 일했던 그는 지금은 샌프랜시스코 대학에서 계약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오스본은 질의 응답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의 30년 전에 내가 미국의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기본과목에선 질의 응답식 강의를 했다. 젊은 교수들이 그런 강의방식을 선호했는데, 지나고 보니 젊은 교수들은 강연 방식으로 한 학기를 끌고 가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서 그리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반면 나에게 기억이 남는 과목들은 전국적 명성을 갖고 있던 교수들이 담당했던 강연식 강의였다. 지식과 경험이 출중한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전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로스쿨에선 질의 응답식으로 강의를 한다”는 것은 신화(神話)일 뿐이다.
(c) 이상돈

이전글4대강 '토론'을 하자고 ?

리스트로

이상돈닷컴

이상돈

LEESANGDON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