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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닉슨이 사퇴한 이유
작성일 : 2023-09-26 11:02조회 : 406
닉슨이 사퇴한 이유
많은 사람들은 범죄를 모의했지만 완수하지 못하면 처벌할 수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오해다. 우리 형법은 미수범도 기수범(旣遂犯)에 준하여 처벌하도록 하고 중요 범죄는 모의 자체를 처벌한다. 다만 그런 모의는 구체적이고 실행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배후로 지목 받았던 마피아 보스 칼로스 마르셀로는 1982년에 연방판사에 뇌물을 건네려고 시도했다는 이유로 징역 10년, 범죄조직을 운영하면서 협박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선출직이나 고위공직자의 경우는 미수는 기수와 마찬가지로 치명적이다.
닉슨 대통령은 불법을 은폐해서가 아니라 은폐를 지시했다는 이유로 사법방해 등 혐의로 하원 법사위에서 탄핵소추를 당한 후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닉슨이 백악관에서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팀(‘배관공 The Plumbers’라고 불렸다)을 만들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승인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1972년 6월 17일 밤에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 사무실에 들어가서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이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다. 나중에 기자들의 치열한 취재, 그리고 특별검사와 하원 법사위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누가 이들에게 지시를 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닉슨이 지시한 적이 없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닉슨은 사건 발생 후 6일 후인 6월 23일 자신의 비서실장인 밥 홀드먼(Bob Haldeman)과 이 문제를 의논하고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했음이 나중에 공개된 녹음 테이프로 확인되자 사임하고 말았다. 닉슨은 녹음 테이프는 대통령의 행정특권으로 보호되는 비밀이라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이 이를 부인함에 닉슨은 이를 특별검사에게 제출해야만 했다. 1974년 7월 말에 제출된 대화 내용에 의하면 닉슨은 처음에 워터게이트 빌딩에 침입한 팀원들이 피그스 만(灣) 침공 사건과 관련된 일을 하는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홀드먼 비서실장도 워터게이트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닉슨 대통령에게 그것이 안보 문제이니까 닉슨과 잘 통하는 버논 월터스 CIA 부국장에 말해서 FBI가 더 이상 수사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닉슨은 거기에 동조했다. 이 부분을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하지 못하도록 CIA에 지시함으로써 사법방해죄(obstruction of justice)를 범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대화를 닉슨의 몰락을 가져온 ‘스모킹 건’(smoking gun)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과연 CIA가 닉슨의 지시를 따라서 FBI에 대해 수사를 중단토록 압력을 가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닉슨의 지시는 CIA 국장에 의해 거부됐다. 백악관의 존 얼릭먼 보좌관이 리차드 헬름스 CIA 국장을 만나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 사건은 피그스 만 침공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 CIA가 맡아야 한다고 말했더니 헬름스 국장은 “워터게이트 사건은 피그스 만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불 같이 화를 내면서 얼릭먼 보좌관을 박대해서 내 보내버렸다. 백악관 법률 보좌관 존 딘(John Dean)은 버논 월터스 CIA 부국장을 만나서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체포된 사람들의 변호사 비용과 생활비를 주기 위해 CIA의 특수활동비를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월터스 부국장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해 버렸다.
CIA 부국장에게 홀대 받고 빈손으로 나온 존 딘은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로부터 돈을 타서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체포된 사람들의 가족에게 전달했다. 홀드먼 비서실장은 닉슨 대통령에게 이 문제가 해결됐다고 암시하는 보고를 했다. 존 딘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이 위험해 지자 상원 특별조사위원회 및 특별검사측과 의논해서 감형을 받는 조건으로 진술을 하기로 협상을 했고, 그런 과정에서 백악관에 녹음 테이프가 있음이 드러났다.
결론을 말한다면 이렇다. 닉슨이 홀드먼 비서실장과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은폐를 논의한 그 자체가 사법방해죄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배심재판에서 이런 대화만으로 닉슨을 기소해서 유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리언 자워스키 특별검사는 닉슨을 상대로 한 재판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아서 닉슨을 사면할 것을 원했다. 자워스키는 임기 도중에 불명예스럽게 사임한 것으로 만으로도 닉슨은 충분히 대가를 치렀으며 더 이상은 혼란만 가중시킬 것으로 보았다.
닉슨이 1974년 8월에 사임하기 9개월 전인 1973년 11월 12일 타임지는 “대통령은 사임해야 한다”(The President Should Resign)는 유명한 사설을 내보냈다. 타임지의 논지는 닉슨 대통령이 이미 국민의 신뢰(confidence)를 상실해서 탄핵이란 법적 절차를 거치기보다는 스스로 거취를 정하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신뢰를 상실한 리더는 더 이상 리더가 아니며, 공인(公人)은 스스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박근혜가 이런 점을 깨달았으면 최소한 감옥살이를 하는 일을 없었을 것이고, 이재용 회장이 그런 고생을 함께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 사진 (1) : 닉슨 대통령과 리차드 헬름스 CIA 국장. 리차드 헬름스(Richard Helms 1913~2002)는 스위스 기숙학교와 윌리엄스 대학을 나오고 2차 대전 중 OSS 요원으로 스위스에서 활동했으며 CIA 창설 멤버로 기획과 작전 분야에서 일했다. 케네디가 암살 될 당시에 CIA 부국장으로 CIA를 실질적으로 움직였고 존슨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이 됐다. 닉슨 1기 임기가 끝나고 CIA를 떠나서 이란 주재 대사를 지냈다.
- 사진 (2) : 닉슨 대통령과 버논 월터스. 버논 월터스(Vernon Walters 1917~2002)는 2차 대전 중 육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대사관 무관을 오래 지냈고 닉슨이 부통령 시절에 외국을 방문할 때면 통역으로 동행했다. 닉슨 대통령에 의해 CIA 부국장으로 발탁됐고 중장으로 전역했다. 레이건-부시 행정부에서 유엔 주재 대사와 독일 주재 대사를 지냈다.
두 사람이 백악관의 보좌관들의 청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해서 워터게이트 사건 때 CIA에는 물 한 방울이 튀지 않았다는 평을 들었다. 리차드 헬름스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어서 거기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닉슨은 동부 엘리트인 헬름스 국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사건에 대해 헬름스와 직접 의논을 했다면 닉슨은 헛된 일을 하지 않았고 사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닉슨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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