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종로구와 중구

작성일 : 2023-12-10 11:21조회 : 340

종로구와 중구

‘서울의 서울’이고 ‘원래 서울’이던 종로구와 중구가 한 개의 지역구로 합쳐지는 모양이다. 종로구와 중구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을 탄생시킨 지역구인데, 도심 공동화로 결국 한 개의 지역구로 합쳐지게 됐다. 종로구는 2공화국 총리 장면, 2공화국 대통령 윤보선, 헌법학자 유진오를 국회로 보낸 지역구이고 중구는 2공화국 외무장관 정일형(정대철 헌정회장의 부친)을 꾸준히 국회로 보낸 곳이다. 장면 박사는 주미 대사, 부통령 등을 지내느냐고 국회를 떠났다가 4.19 후 총선에선 서울의 다른 지역구에서 당선돼서 총리를 지냈다. 윤보선, 유진오, 정일형은 선거 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벽보만 붙이면 민도가 높은 종로와 중구 사람들은 당대의 지식인인 이들을 무조건 당선시켰다.

3공화국 시절에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는 모두 4년이었다. 1963년 가을 대선부터 대통령 선거를 먼저하고 한 달 후에 총선을 치렀는데, 선거 관리 때문이겠지만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총선에서 자연스럽게 관권 선거가 일어나도록 한 의도가 있었다고 하겠다. 관권 선거가 통하지 않는 곳이 민도가 높은 지역이고, 그런 지역에서 야당인 민주당/신민당이 우세를 보였다. 그래서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두드러졌다. 따라서 ‘서울의 서울’인 종로와 중구에서 공화당이 설 땅은 없었다. 3선 개헌 후 치러진 1971년 5월 총선에선 영등포 갑구를 제외하곤 서울 모든 지역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승리했다. 그것이 ‘1971년의 봄’이었다. 하지만 그 봄은 불안했다. 그 때부터 총통제 개헌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1951년 생이지만 생일이 늦은 나는 1971년 대선과 총선에 투표권이 없었다. 내가 투표권을 처음 행사한 때는 1972년 유신헌법 찬반투표였다. 찬성(O) 반대(X)라고 표시된 투표지를 오른쪽 위로 당겨서 반대에 표기하면서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1973년 2월에 있었던 총선(9대)은 내가 처음으로 투표한 국회의원 선거였다. 중선구제로 바뀐 선거제도 하에서 종로구에는 공화당 후보로 한국일보 사주인 장기영, 야당 후보로는 1971년 총선에서 종로와 중구에서 각각 당선된 권중돈과 정일형, 그리고 독립군 출신으로 1971년 총선 때 신민당 대표 대행을 지낸 김홍일 장군이 나왔다.

공화당 후보는 당연히 당선이 되고 나머지 한 자리를 두고 세 사람이 다투도록 한 것이 중선구제였으니 참으로 치사한 선거였다. 우리 가족(부모님과 나)은 물론 정일형 박사를 찍었다. 정 박사는 나의 외조부(고희동)와 친분이 깊으셨고 민주당 정권에서 장면 총리가 이끌었던 신파(新派)를 같이 하셨으니 정 박사를 찍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김홍일 장군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1위는 장기영, 2위는 정일형, 3위는 김홍일로 장기영과 정 박사가 당선됐지만 야당 세 후보가 얻은 표를 합치면 1위인 장기영이 얻은 표 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일형 박사는 유신 정권을 비판한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고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보궐선거에선 아드님인 정대철(현 헌정회장)이 신민당 후보로 나와서 당선됐고 1978년 총선에서도 이어서 당선됐다. 1978년 총선에서 나는 물론 정대철 후보를 찍었다. 중선거제로 치른 1973년 총선과 1978년 총선에서 서울에선 공화당 후보와 야당 후보가 동반당선 됐지만 대부분 지역구에서 야당 후보가 1위를 했고, 야권 후보가 복수인 경우에만 공화당 후보가 간신히 1위를 했다. 그것이 수도 서울의 준엄한 민심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대학에 자리 잡은 후 처음으로 한 투표가 1985년 2월에 있은 12대 총선이었다. 중선거구제 동반당선 선거였으나 김영삼-김대중이 만든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그 때는 과천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당시 과천은 시흥군 과천면이었고 지역구는 안양 광명 시흥 옹진군으로 무척 넓었다. 신민당 후보인 이택돈 변호사가 민정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1위로 당선됐다. 어차피 1위와 2위를 한 여야 후보가 동반 당선되는 것이지만 야당 후보가 경기도의 많은 지역에서 1위를 했다는 사실은 5공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1987년 개헌 후 다시 소선구제로 복귀한 1888년 4월 총선(13대)에선 과천시와 시흥군이 지역구였는데, 경기도의 많은 지역처럼 과천 시흥에서도 야권 분열에 힘입어서 민정당 후보가 당선이 됐다. 5공 중선거구제에서 야당이 1위를 한 과천 시흥에서 6공 소선구제 선거에선 야권 분열로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경기도 대부분 지역에선 야당이 YS당과 DJ당으로 분리된 탓에 민정당 후보가 대거 당선된 데 힙입어 민정당은 원내 다수석을 차지하지 못했어도 1당으로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난 봄 김진표 의장과 윤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를 하자고 하니까 많은 의원, 교수, 언론인들이 좋다고 박수를 쳤다. 알다시피, 그 때 나는 한국일보 칼럼 등을 통해 중대선거구는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비판하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 그것은 내가 4공과 5공 시절 투표소에서 겪었던 일종의 모욕감 때문이기도 했다. 되지도 않을 중대선거구제를 한다고 정치개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허공에 날려 버린 사람들은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나 ?

사진 (1) : 1985년 2월 총선을 보도한 기사.
사진 (2) : 1988년 총선을 보도한 기사. 민정당이 TK와 경기도에서 선전했다는 부제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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