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헌법재판소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출판저널 12월호)

작성일 : 2009-12-10 00:41조회 : 2,060

<출판저널 2009년 12월호, 60-61쪽>

우리 헌법재판소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
: 헌법재판소와 미디어법 판결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헌법재판소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종국적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금년 가을에도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의미가 큰 두건의 판결을 내려 놓았다. 헌법재판소는 야간집회를 허용하지 않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이 헌법에 불일치한다고 했다. 헌법재판소는 또한 국회를 변칙으로 통과한 미디어관련법은 야당의원들의 권한을 침해한 위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국회에서의 미디어관련법 처리과정이 위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중대한 위법이 아닌 한 국회 스스로가 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유로 이를 무효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사분오열된 헌법재판소

야간집회와 미디어관련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해서 여당과 야당이 엇갈린 평가를 했다. 야간집회 금지가 헌법에 불일치한다고 한 판결에 대해선 야당이 이를 환영했지만, 미디어법이 위법이되 무효는 아니라는 판결에 대해 야당은 강력히 반발했다.
최근 몇 년간 중요한 사건에 대한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보면 그 결론의 당(當)․부당(不當)을 떠나서 9명의 재판관들의 의견이 그야말로 사분오열(四分五裂)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위치하면서 그때그때 의견을 달리하는 이른바 스윙어(‘swinger’ : ‘흔드는 사람’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에 의해 판결이 좌우되고 있다. 이는 곧 헌법재판소에 소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장이 리더십을 갖고 있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헌법재판관들도 헌법재판소라는 기관의 권위를 의식해서 원칙을 수립하고 그 원칙에 근거한 판결을 하기보다는 결과만을 의식해서 논리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헌법재판소의 권위와 신뢰가 흔들리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권한쟁의 심판의 한계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우리나라 헌법재판소가 갖고 있는 이런 문제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관련된 법률이 여럿이 있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재판관들의 의견이 너무나 갈려서 웬만한 사람들은 판결문을 제대로 읽기도 어렵다. 어느 경우와 마찬가지로 판결은 결국 중간지대에 있던 3-4명의 재판관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이들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위법하지만 무효로 처리할 정도는 아니다”는 것이다. 물론 대의기관인 국회의 행위는 일반 행정기관의 행위와는 달리 조금은 더 존중받을 만하다.

또한 국회의원이라는 국가기관이 자신들의 권한이 침해당했다면서 제기한 권한쟁의심판은 권한이 침해되었는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이라서 법률 조항이 헌법에 위반되었느냐를 다투는 위헌법률심사와는 그 성격이 다소 다르다. 그런 점에서 위법상태를 확인하지만 그 시정을 국회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판단한 재판관들의 주장에도 수긍할 만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의기관의 입법권이 보장되어야 함은 헌법의 기본정신에 비추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헌법상 국가기관인 국회의원의 권한이 부당하게 침해당했다는 것은 헌법이 유린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다수 헌법재판관들은 이것을 단순한 국회법 위반으로 보았다. 또한 국회법 위반을 확인할 정도의 영민(英敏)함이 있는 헌법재판관들이라면 국회가 그 같은 위반상태를 스스로 시정할 수 없음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다수 헌법재판관들은 그 위반상태가 무효나 취소로 판결할 만큼 중대하지 않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도무지 얼마만한 위반상태가 있어야 무효로 판결할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린벨트 제도, 군 가산점 제도, 수도이전, 야간집회. 미디어법 제정 등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가 헌법재판소의 궁극적 판단을 받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는데 비해 정작 헌법재판소의 권위가 실추한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앞날은 밝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데는 헌법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교수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사회적 파장이 큰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많이 나왔음에도 그런 판결들에 대한 학술적 논평과 토론은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독일 모델로 한 헌법재판소 관련 서적은 거의 없어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독일의 헌법재판소 제도를 본받아서 1987년 민주개헌 당시에 도입되었지만 정작 독일의 헌법재판소를 소개한 책은 별로 없다. 몇 년 전에 번역되어 출간된 ‘독일연방헌법재판소’라는 얇은 책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하다. 독일의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유타 림바흐가 펴낸 간략한 책을 번역한 것인데, 헌법재판소의 구성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연방국가라는 독일의 특성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와 나치의 등장 같은 어두운 경험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초기에 공산당과 신나치당의 해산을 명한 판결을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독일이 도입한 헌법소원 제도와 권한쟁의심의는 우리 헌법재판소에 있어서 모델이 되었다. 그럼에도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례로부터 우리나라의 미디어 관련법 같은 사안에 대해 교훈을 구하기는 어렵다. 도무지 그러한 사안이 없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의 권한쟁송심판이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주(州)의 불복종으로부터 연방정부를 보호하고, 또 연방정부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주를 보호할 현실적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법원 대법관들과의 인터뷰 : ‘지혜의 아홉기둥’

헌법에 관한 많은 판결을 쏟아내고 있는 미국 대법원에 관한 책도 읽을 만한 것이 별로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권위원장을 지낸 안경환 교수가 최근에 번역해서 펴낸 ‘지혜의 아홉기둥’(원제는 ‘동료 대법관들’이다)이 거의 유일한데, 이 책은 얼 워렌 대법원장이 퇴임하고 워렌 버거 대법원장이 취임할 1969년부터 1979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미국 대법원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워터게이트를 파헤친 특종기자 밥 우드워드가 기술해낸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헌법과 법률을 해석해서 최종적으로 적용하는 미국 대법원의 대법관들이 법적 원칙보다는 개인적 철학과 취향에 따라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느낌을 갖기 쉽다. 밥 우드워드 기자가 대법관들과의 개별적 인터뷰를 통해서 얻어 낸 이야기를 중심으로 책을 엮어내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미국 대법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나온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대법관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미국 헌법과 대법원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독자가 이 책을 읽게 되면 잘못된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다. 미국 대법원까지 올라 온 사건들은 논쟁의 많은 것들이고, 그래서 개별 대법관의 철학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불가피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미국 대법원은 200년 넘게 헌법을 형성 발전시켜 오고 있으며, 오늘날의 판결도 그러한 과정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원저 자체가 나온 것이 30년 전이고, 미국 사회와 미국 헌법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 유타 림바흐, 독일연방헌법재판소 (정남철 옮김, 2007년, 고려대 출판부, 144쪽)
* 밥 우드워드 외, 지혜의 아홉기둥 (안경환 옮김, 2008년 라이프맵, 893쪽)

(c) 출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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