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냉철한 재고(再考)'

작성일 : 2010-10-14 08:32조회 : 4,430

성직자 교수 법관의 '냉철한 재고'

이상돈 (2010년 10월 10일자로 한겨례 훅에 게재된 글입니다.)
(*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1974년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당시의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는 대학원 공부를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사법시험 준비를 위한 징집연기용인 측면이 많았다. 대학 3학년 때 몇몇 사법(私法) 과목을 공부하다가 이건 나한테 맞지 않는 분야라고 생각해서 사법시험에 대한 미련을 버렸던 나는 대학원 들어와선 미국의 헌법과 사법제도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 중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가장 위험하지 않은 부(府)’(‘The Least Dangerous Branch’)였다. 당시 예일대 교수이던 알렉산더 비클(Alexander Bickel)이 펴낸 이 책은 미국에서의 사법심사 제도에 관한 중요한 저술로 뽑히는 데 만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결코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헌법에 관한 최종판단을 하게 되는 딜레마를 설명한 이 책은 지식을 한창 빨아드릴 나이에 있던 나에게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비클은 사회가 건전하려면 정치적 압력에서 차단된 사람들이 ‘냉철한 재고(再考)’ (’sober second thought’)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비클은 그런 기능을 하는 직업으로 성직자, 교수, 그리고 법관을 들었다. 이 세 가지 직업은 진입하기가 어렵지만 일단 진입하여 안정된 지위를 갖게 되면 신분이 보장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런 직업의 신분을 보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이 ‘냉철한 재고’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클은 성직자와 교수들의 생각은 강제력을 갖지 않지만 법관의 그것은 강제력을 갖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행사되어야 한다고 했다. 비클은 이를 ‘소극적 미덕’(‘passive virtue’)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이유로 ‘사법적 보수주의자’(‘judicial conservative’)라고 불렸던 그였지만 1971년에 베트남 전쟁에 관한 국방부 비밀문서(The Pentagon Papers)를 뉴욕타임스가 특종으로 보도했을 때 뉴욕타임스 편에서 보도의 자유를 주장해서 대법원에서 승리했다. 피상적으로 보면 모순인 그의 그러한 자세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내가 비클에 심취해 있을 때 정작 그는 뇌종양 투병 끝에 50세 나이로 사망했다.

내가 장황하게 오래 전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클이 들었던 세 개의 직업, 즉 성직자, 교수 그리고 법관 때문이다. 선거로 뽑힌 ‘민주적 권력’이 오만해 져서 그 사회의 기본가치를 훼손할 경우 그것을 비판하고 또 막을 수 있는 직업은 ‘냉철한 재고’를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성직자, 교수, 그리고 법관들이 아닌가. 신분이 보장되어 있는 이들마저 할 말을 하지 않는다면 바른 말을 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성직자들은 더 큰 교회, 더 큰 불사(佛事)에만 관심을 갖고, 교수들은 사회적 지위와 돈에 맛을 들이고, 법관들은 승진과 변호사 개업에만 마음을 둔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들이 할 일을 하지 못해서 ‘대중 집단’이 보다 과격한 생각을 하고 또 그러한 행동에 나서는 것은 아닌가. 혹시 비클이 말하는 그들이 ‘냉철한 재고’를 독점하던 시대가 이미 지난 것은 아닌가. 이명박 정부 3년차를 보내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c) 한겨레신문사,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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