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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상돈-김호기 대화(16) : 김종인 전 경제수석 (경향)
작성일 : 2011-06-07 07:36조회 : 3,523
경향신문 2011년 6월 7일
[이상돈·김호기의 대화](16)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정리 | 이호준 기자]
ㆍ김종인 “중산층·저소득층 영합은 필연… 내년 선거 방향타 될 것”
ㆍ김호기 “대 - 중소기업 불공정 하도급 관행 악화로…이익공유제 이슈화”
ㆍ이상돈 “盧 정부 부동산정책, 세금으로 막으려다 중산층 분노 사 실패”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이력은 화려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건강보험 도입 당시 자문교수로 참여했고, 5공화국에서는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태우 정권에서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 17대 국회에서 민주당으로 국회의원을 다시 지냈다. 다양한 직함이 있지만 그에게는 ‘전 경제수석’이라는 호칭이 가장 많이 붙는다.
노태우 정권 당시 우리나라 경제 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주도했고, 국가의 적절한 시장개입을 통해 재벌과 기업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 균형 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기마다 하마평에 오르고, 유력 대선주자들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보수성향의 이상돈 중앙대 교수와 진보성향의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지난 3일 서울 부암동 대한발전전략연구원에서 김 전 수석을 만났다. 대한발전전략연구원은 김 전 수석이 이사장으로 있는 곳이다.
김종인 전 수석은 “양극화로 중산층이 계속 무너지는 과정에서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영합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이들이 영합하면 사회적으로 변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의 향방이 이들의 욕구를 어떻게 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설명이다.
동반성장 구호나 이익공유제 등 최근 여권의 양극화 해소 움직임에 대해 “원천을 봉쇄하지 않고 말단을 시정하겠다는 정치적 쇼”라고 못박은 그는 “다음에 집권할 사람은 ‘말’이 아닌 구체적으로 실행 가능한 ‘프로그램’을 내놔야 사람들이 비전으로 받아들이고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이하 이상돈) = 건강보험을 도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건강보험을 도입하게 된 경위에 대해 이제는 밝힐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요즘 건보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하 김종인) = 1970년대 중반 경제개발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하고 근로자 수가 60년대 초에 비해 10배 가까이 늘었다. 이들이 사회 신흥세력으로 등장했는데 그걸 포용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면 사회적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근로세력을 포용해야 한다는 내 주장이 박 대통령 귀에 들어갔고, 대통령 지시로 근로자 대책을 종합 검토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노동법 전반을 검토했지만 진척이 잘 안되면서 의료보험 문제를 끄집어낸 것이다. 이른바 근로자 의료보험인데, 대통령은 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지만 경제 각료들이 반대했다. 평가 교수단이 의료보험 보고서를 만들어 올렸다. 박 대통령이 그 보고서를 각료들이 있는 자리에서 들이밀어서 결정이 바로 났다.
국가 재정이 없으니까 재원 확보가 손쉬운 원천징수 대상 직장인들부터 시작했다. 문제는 기업과 개인이 50%씩 부담하도록 했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꼬였다. 회사가 부담한다지만 회계상으론 인건비니까 임금을 더 주고 더 걷으면 마찬가지다. 나중에 도시 자영업자와 농민들도 보험으로 흡수하는 경우에 기업이 부담하는 50%를 누가 분담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기업부담 50%에 나는 반대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 건강보험은 지금 빨리 재정비하지 않으면 끌고 가기 힘들어진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이하 김호기) = 진보진영에서는 김종인 선생 하면 무엇보다 87년 헌법 ‘제119조 2항’을 떠올린다. “국가는 (중략)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이 규정은 경제 민주화를 담고 있는 조항이다. 이 조항이 어떻게 헌법에 들어가게 됐는지. 재벌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을 생각할 때 그 의미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김종인 = 우리나라가 압축성장하다 보니 특정 부류에만 자원을 배분해서 재벌구조를 만들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정치세력이 경제세력을 압도하지만 경제가 커지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에까지 미치게 된다. 경제세력이 사회 전반에 대한 힘을 장악하면 정부가 사회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메스를 가해야 하는데 그때 정부가 뭘 시도하면 전부 ‘헌법 위반이다’, ‘시장경제 위반이다’ 소송할 것 아닌가. 우리나라 경제세력이 학계·법률시장 다 장악하는데 뻔하지 않나. 그걸 막기 위해 만든 것이다. 최근 시장경제, 시장경제 하지만 시장경제는 무정부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강력해서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게 만들어야 그게 제대로 된 시장경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 더 강하게 드는 생각인데 이윤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게 시장경제가 아니다.
이상돈 =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금 건강이 매우 나쁜 상태다. 비자금 문제 등으로 당시의 북방정책 같은 업적은 전혀 가려져 있는 것 같다. 정해창 당시 비서실장, 이춘구 당시 여당 사무총장 같이 노태우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한 분들도 완전히 잊혀지다시피 한다. 대통령 개인 비리를 제외하고 노태우 정권의 공적과 과오, 그리고 한계를 듣고 싶다.
김종인 = 비자금 사건은 개인적인 문제고,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해야 한다. 그때 우리나라 경제의 중·장기적인 기틀을 쌓았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했을 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700달러였는데 끝나고 정권을 넘겼을 때 7000달러를 넘었다. 경제적 성과는 나무랄 게 없다. 장기적인 기반시설 확충도 그때만큼 많이 한 적이 없다. 인천공항과 경부고속철도도 그때 다 시작했다. 북방정책으로 수출시장도 두 배로 늘렸다. 그 정도 업적은 인정해줘야 한다.
이상돈 =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는데.
김종인 = 죽지 않은 경제를 어떻게 살리나. 당시 경제 상황이 제일 좋았다. 삼성차도 막고, 정주영 회장도 막아서 과잉 투자를 못하게 했는데 이 사람들이 김영삼(YS) 대통령한테 가서 ‘경제활동을 못해서 침체됐다. 해소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YS가 ‘신경제 100일 계획’으로 노태우 정권이 정한 룰을 다 깨버렸다. 돈도 맘대로 은행서 가져가고, 투자도 과잉으로 하더니 외환위기로 가버렸다.
김호기 =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자문그룹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초대 총리 내지 재경부 장관 등 하마평이 적지 않았는데, 정작 노무현 정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뒀다.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노무현 정부의 명암을 어떻게 보는지.
김종인 = 처음에 도움을 요청받았을 때 이분이 대통령이 되면 많은 것이 변화할 수 있겠다 싶어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분이 후보가 되고 점점 더 상황이 좋아지니까 태도의 변화가 보였다. 내가 그분한테 충고도 몇 번 했는데 나중에 자신과 사이클이 안 맞는 거 같다고 하더라. 그렇게 헤어졌다. 한 정권의 성패는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하는 취임사와 인사를 보면 아는데, 별로 그게 성공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동산 투기 문제를 조기에 수습하지 않으면 경제정책이 어렵다고 충고했다. 그런데 9·11테러 이후 결국 경기 부양한다고 부동산 규제 풀어서 투기로 가게 만든 데 참여한 김진표씨를 부총리 시켰다. 노 대통령이 일은 하고 싶었으나 국가 운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고한 청사진이 없었다. 제일 잘못한 게 수도권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이분이 당선되면 자기들 편을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경제정책 보니까 양극화를 깊게 해 더 어렵게 만든 거다.
김호기 =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전은 신자유주의의 절정기였다. 노 전 대통령이 ‘진보의 미래’에서 안타깝게 회고하듯 진보적 정책을 추진하기에는 대외적 여건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종인 =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부터 양극화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최소한 더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는 취했어야 했다. 경제정책을 자문하는 사람들이 전부 신자유주의자 아니냐.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 그대로 받아서는 안된다. 결국 대통령의 책임이다.
이상돈 = 정운찬 전 총리가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으로 추진하는 초과이익공유제 같은 것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기업에 초과이익이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지. 기업은 이윤을 축적해서 적기에 보다 큰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거기에 정부가 개입해선 안된다고 본다. 어떤 중견기업이 창업 때부터 해온 두부 같은 업종에 대해 “당신들은 많이 컸으니까 두부는 중소기업에 내놓아라”고 말하는 것도 제가 보기엔 헌법 위반이다. 정 전 총리에 대한 비판도 많은데.
김종인 = 정부가 하지 못한 걸 민간기구인 위원회를 만들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발상이 잘못된 거다. 초과이익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협력업체에 나눠주겠다는 발상인데 합리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른바 중소기업 고유업종이란 것도 경제 환경을 개선하니, 글로벌화하니 해서 다 터놓고 있지 않았나. 이제 와서 새로 지정하려고 하면 마찰만 생긴다.
김호기 = 이익공유제가 주목받은 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공정한 시장 룰이 작동하지 않아서다. 현 정부 들어 하도급 위반 비율이 증가하고 서면계약과 현금결제 비율이 감소하는 등 하도급 관행이 악화됐다.
김종인 = 하도급법도 제대로 집행을 못하는 정부가 어떻게 동반성장을 할 수 있나. 정부가 하지 않고 있는데 위원회가 무슨 힘으로 할 수 있나. 초과이익을 낸다는 기업에 제대로 임금을 못 받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수두룩하다. 그들 임금도 제대로 안 주는데 이익을 공유해보라고 해본들 의미가 없다. 동반성장위원회 구성원들이 고환율 정책을 철폐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왜 못하나. 경제정책의 대부분이 대기업을 도와주는 것뿐인데 결과로 나타나는 것만 시정하려고 하면 시정이 안된다. 원천을 봉쇄하지 않고 말단을 시정하겠다는 것은 정치적인 쇼다. 정운찬 전 총리도 자기 평판에 손해를 봤다.
이상돈 = 노무현 정부의 실패도 부동산을 세금으로 틀어막겠다고 하다가 중산층의 분노를 산 게 근인이었다.
김종인 = 세금으로 부동산을 어떻게 잡나. 거꾸로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투기를 아무리 해도 괜찮다는 거 아니냐. 풍토 전체를 바꿔서 그렇게 안되도록 만들어야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김호기 = 우리나라에서 보수세력은 미국식 모델을, 진보세력은 유럽식 모델을 선호한다. 창의적 수용이 필요할 터이지만, 점증하는 사회 양극화를 고려할 때 유럽식 복지국가의 구축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국가비전의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이른바 ‘리틀 아메리카(little America)’와 ‘빅 스웨덴(big Sweden)’ 중 어떤 모델로 가야 한다고 보나.
김종인 = 둘 다 답이 못된다. 지금 우리 현실은 모든 분야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다. 양극화 현상으로 점점 더 복잡해지고, 이익집단들이 자기 몫 챙기자고 하는데 내버려두면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도 다 없어져버릴 수 있다. 기본적으로 조화롭게 안정시키고, 경제발전 사이의 균형을 만드는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 구성상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영합하면 사회적으로 변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다. 중산층이 자꾸 무너지는 과정에서 저소득층과 영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복지도 누릴 수 없는 정도로 여유가 없냐 하면 그건 아니다. 통치자의 의지가 얼마나 거기에 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다음에 집권할 사람이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내놔야 한다. 실행 가능한 것을 내놓고 끌고 가려고 해야 비전으로 받아들이지, 이제는 말만 해서는 안되는 시대다.
김호기 =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은 60년대 이후는 산업화, 80년대 이후는 민주화였다. 최근에는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복지국가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하고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어떻게 생각하나.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 대한 평가도 듣고 싶다.
김종인 = 박 전 대표는 국회에 있을 때 만나봤고 손 대표도 몇 번 찾아와서 만났다. 나는 대통령이 탐욕스럽지 않아야 하고 주변이 간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데서 박 전 대표는 강점이 있다. 특정 이익집단과 연계관계가 없는 것도 중요한데 이 점에서 박 전 대표가 강점이 있다고 본다. 독일 메르켈 총리를 벤치마킹해보라는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사람들은 손 대표가 한나라당과 비슷할 것이라는 심정을 갖는다. 진보진영을 통해서 야당 단일후보론이 세게 나올 텐데 단일후보가 되려면 진보 목소리를 계속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 후보라도 대통령이 되면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같이 진보정책을 과도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이 갖고 있다.
이상돈 = 한나라당이 4·19 이후 자유당 비슷하게 스러지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김종인 = 우리나라 선거역사를 보면 서울 선거에서 전패한 정당은 그 다음에 모두 망했다. 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에서 자유당이 전멸했고, 8대 국회선 공화당의 서울 전패로 유신이 났다. 10대 선거서도 두 명씩 뽑다 보니 공화당이 당선은 됐지만 2등밖에 못해서 전멸한 뒤 10·26이 났다. 지난번 지자체 선거 보면 내년 선거도 예측이 가능하다.
김호기 = 내년은 대선과 총선이 있다. 무엇이 화두가 돼야 하는가.
김종인 = 2008년 금융위기로 시장 만능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정부가 어느 정도 보완 기능을 하지 않으면 시장 자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부는 작아야 하지만 대신 강력해야 한다. 그래야 조정 능력이 생긴다. 기업이 사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면 시장만능주의가 왜 나쁘겠나. 하지만 시장은 해결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재벌 만능시대가 돼서 재벌이 제멋대로 가게 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몇 개 재벌에 맡겨서는 장래를 보장할 수 없다. 잘나가는 기업도 갑자기 안될 수 있다. 안되면 또 국민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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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돈 교수 후기
김종인 박사님은 서강대 교수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서 우리나라가 건강보험을 일찍 도입하는 계기를 만드셨고, 그 후 국회의원과 보사부장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내셨다. 노태우 정권의 경제수석으로서 삼성의 자동차 진입에 반대하신 탓에 재계는 김 박사를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부암동에 자리잡은 김 박사님 사무실에는 조부이신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의 사진이 가운데 놓여 있다. 나는 강의시간에 “우리나라 역사상 사법부가 독립을 지키고 제 구실을 한 적은 김병로 대법원장 시절 밖에 없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고 종종 이야기 하는데, 그러면 학생들은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김 박사님의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조부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에 교수가 된 나는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 정권을 거쳐 김영삼 정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오늘날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은 ‘비자금’ 덕분에 노태우 정권 자체의 업적이 아예 잊혀 지거나 평가절하된 것이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던 그 기간에 우리 경제가 체질을 강화하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과연 OECD 회원국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자기가 물가를 잡았다고 자랑했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노태우 정권 들어서 집값이 폭등하고 물가가 한꺼번에 오른 것은 전두환식 물가통제의 한계를 보여 준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인위적인 물가통제를 풀어 시장기능을 회복시켰고, 분당 등 신도시 개발로 주택공급을 늘리면서도 주택가격에 대한 통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미 무역마찰과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으로 인한 대외개방에도 원만하게 대처해서 정권 말기에 균형재정과 무역흑자를 달성했는데, 김종인 박사님이 경제수석을 지냈던 시기였다. 나는 김 박사님 뿐 아니라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집권당 사무총장으로 정부를 무탈하게 이끌고 그 후로는 아예 공직을 떠난 정해창, 이춘구 같은 ‘6공 공신’도 이제는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경제가 구조조정이 일단락되고 재정과 무역 지수가 좋아진 1992년에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경제를 살리겠다”고 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김종인 박사님도 같은 생각이셨다. 김영삼 정부는 멀쩡한 경제를 인수해서 경제위기를 초래했지만, 금융실명제를 한 부분은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6공화국에 대해선 기사에 나온 것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지면 때문에 전부 담지 못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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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 후기
김종인 선생을 처음 뵌 것은 2007년 대통령 선거 때였다(김종인 선생은 교수, 수석비서관, 장관, 국회의원 등 다양한 직함을 가졌던 분이다. 대화 도중에 나온 이야기이지만 학계에서의 최고의 호칭인 선생으로 부르고자 한다). 선거가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의 경제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을 처음 뵙고 한국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87년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을 관철시킨 분이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공부했던 빌레펠트대학에서 가까운 뮌스터대학에서 공부하신 분이라 학문적·정치적 궁금함이 적지 않았는데, 시장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날카롭고 공감할 수 있는 바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특히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미국 학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독일에서 5년 동안 공부를 하고, 미국에서 2년 동안 연구를 했던 내가 보기에 미국식 학문과 독일식 학문 사이에는 가깝지 않은 거리가 존재한다. 대중적 관점에서 보면 그 거리는 이른바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담론과 독일유학 출신 지식인들의 담론(예를 들어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문화평론가 진중권씨의 담론) 사이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김종인 선생의 장점은 바로 독일적 전통, 기민당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사민당의 케인스주의를 아우르는 국가와 시장 간의 생산적 균형 담론을 펼쳐 보인다는 데 있다. 더욱이 이러한 장점은 경제수석과 보사부장관, 그리고 국회의원 등을 포함한 김 선생의 풍부한 정치적 경험과 용해되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중도적 경제 이론과 정책으로 구체화돼 왔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모두 김 선생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날씨가 제법 무더워진 지난 금요일 오전, 이상돈 교수와 자하문터널 너머 선생 사무실을 찾았다. 70년대 후반 의료보험부터 최근 이익공유제를 둘러싼 토론, 그리고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슈들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가 이뤄졌다.
대화를 마치고 이상돈 교수와 자하문 터널을 다시 넘어와 청운초등학교 앞 한 남도음식점에서 소박하지만 맛깔스러운 백반으로 점심을 함께 하면서 최근 정세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이상돈 교수와 헤어져 학교로 돌아오는 택시를 타니 내 얼굴을 알아 본 기사 아저씨가 대뜸 내년 대선에 누가 될 것 같냐고 물었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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