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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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문학자, 과학기술을 탐하다 ('법과 환경')(고즈윈)
작성일 : 2012-04-15 09:44조회 : 3,017
이인식 기획 <인문학자, 과학기술을 탐하다>(고즈윈 출판사, 2012. 3) 186-193쪽
(*저작권은 고즈윈에 있습니다.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법과 환경
이상돈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학에 자리를 잡아 강의하고 연구한지가 거의 30년이 되어 간다. 먼 이야기 같던 정년이 몇 년밖에 안 남았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끼게 된다. 여러 분야에 대해 논문을 썼으나 환경법에 관한 것이 가장 많았고, 박사학위 논문도 환경에 관한 것이니 환경법은 나의 전공인 셈이다. 예전에는 인문․사회과학 전공자 가운데 환경을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경위로 환경에 관심을 갖고 환경법을 공부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면 서울대 법대를 가야 한다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서울 법대에 진학하기로 했다. 당시 서울 법대 입시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사회, 독일어였는데, 고교 3학년 때 별안간 입시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과학도 공부해야만 했다. 뒤늦게 물리 화학을 공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는데, 그때 처음 고교 교과과정에 포함된 지학(地學)은 자연에 관한 역사 같아서 할 만 했다. 특히 그 당시 지학을 가르치신 선생님이 훌륭해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서울 법대에 무난하게 합격한 것은 전적으로 국어 영어 독어 3과목 때문이었다. 100점 만점에 수학은 25점, 과학은 간신히 50점을 받았는데, 과학에서 그나마 점수를 건진 것은 지학 덕분이었다. 도무지 이런 점수로 어떻게 서울대, 그것도 법대를 들어갔는가 하고 궁금하겠지만, 그해 서울 법대 커트라인은 550점 만점에 269점이었다. 서울대 단독출제로 문제가 어려웠기 덕분에 수학과 과학에서 그런 알량한 점수를 받아도 여유있게 법대 법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입시제도 변경으로 공부하게 된 지학
서울대 1학년 교양과정에서도 자연과학 과목을 택하여야만 했는데, 수학은 간신히 낙제를 면했지만 지학은 좋은 점수를 받았다. 지학은 지금은 은퇴하신 해양학과 정종률 교수님이 가르치셨다. 당시 30대초 초임교수이던 정 교수님은 과제를 많이 내어서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는데, 그 때 지학을 열심히 공부한 것이 자연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고 생각된다.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한 일 중의 하나는 <타임>지를 정기 구독한 것이다. 경기중․고등학교 다닐 때 서울대 교복을 입은 대학생이 붉은 테두리가 선명한 <타임>지를 접어 갖고 다니는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서울대에 입학하고 보니 <타임>지를 읽는 학생은 극소수였고, 그것도 대개 여대 앞 다방으로 여학생을 만나러 갈 때나 폼으로 들고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하튼 그 때부터 <타임>지를 정기구독해서 오늘날까지 보고 있고, 미련하게 결호도 없이 보관해 오고 있다. 당시 우리 신문이나 잡지엔 변변하게 읽을 것이 없어서 <타임>지는 내가 세상을 보는 창구가 되다시피 됐다.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등 중요한 사건을 <타임>지를 통해 보았는데, <타임>지에는 ‘생태(Ecology)' 섹션이 있었다.
미국 유학 중 ‘환경’과 본격적으로 만나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70년은 환경원년과 같은 해였다. 미국에서 ‘지구의 날’ 시위가 있었고 환경보호처(EPA)가 설립됐고, 미국 의회는 역사적인 대기보전법을 제정했다. 나는 그런 뉴스를 <타임>지를 통해 접했다. 언젠가는 <타임>지가 “빙하기가 다시 오고 있다”는 ‘지구냉각화(Global Cooling)'를 표지기사로 다루어서 흥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법대를 다녔지만 법학은 나에게 잘 맞지가 않았고 사법시험 공부는 하기 싫어서 한동안은 심각한 우울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엉뚱하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대학원에 진학해선 미국 헌법을 공부하느냐고 원어 논문과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자 의욕과 활기를 다시 찾게 됐고 생활도 제 페이스로 돌아왔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미국의 역사, 정치, 헌법에 대해 정말 많이 읽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는데, 첫 학기에 수강한 환경법은 만만한 과목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경법을 가르친 토머스 쉔바움 교수는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친절해서 결국은 그가 지도교수가 되어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환경법을 공부하다고 보니 자연히 환경문제에 관한 책이나 논문도 읽게 되었는데, 주로 정책적으로 환경문제에 접근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에서 환경법을 공부하면서 자연과학 책을 더 읽을 필요는 없었다. 환경정책과 환경법을 다룬 책과 논문에 필요한 자연과학 지식이 충분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튤레인 대학이다. 영화 <펠리칸 브리프>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튤레인 로스쿨 학생으로 나오는 데, 영화에도 등장하듯이 루이지애나는 석유개발을 둘러싼 논쟁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뉴올리언스를 휘감아 흐른 후 멕시코 만으로 들어가는 미시시피 강과 주변의 광활한 늪지대는 자연과 환경에 관해 살아있는 교실이었다.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하나 더 받았는데, 해양법과 국제법을 공부했다. 플로리다의 길고 긴 해안선을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가 보았고, 그러면서 연안역(沿岸域) 보호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실핏줄 같은 작은 하천과 습지로 이어진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과 오커초비 호수를 찾아보고 수(水)생태계의 복잡성과 중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주말이면 노스 마이애미 비치, 키 비스케인 등지에서 해수욕을 즐기곤 했는데, 모래사장을 보호하고 비치를 공공에 개방하는 그들의 노력에 감명을 받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자란 탓에 정작 우리나라 자연환경을 접해 볼 기회가 드물었던 나는 이처럼 미국 유학 중에 소하천, 습지, 해안 등 환경적으로 예민한 지역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으니, 나의 환경관은 그런 과정을 통해 형성됐다고 하겠다. 그 시절에 미국에는 환경 이슈가 정말 많았다. 다이옥신이 함유된 고엽제(에이전트 오렌지) 문제가 드러난 것도 그 때였고, 석면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의회에서 청문회를 열고 텔레비전 특집방송을 한 것도 그때였다.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전 사고가 난 직후라서 원자력을 둘러싼 논쟁도 뜨거웠다. 러브 카날 사건도 그 즈음에 크게 부각되었다. 결국 카터 행정부 마지막 순간에 종합환경책임법(슈퍼펀드법)이 제정됐다. 멕시코 근처 바다에서 석유시추를 하다가 폭발사고가 나서 해저에서 유출된 기름이 텍사스 해안까지 오염시킨 엄청난 유류오염 사고도 일어났다. 그 사고를 둘러싼 분쟁과 소송은 나의 학위논문의 일부가 되었는데, 휴스턴에 가서 소송을 대리한 양측의 변호사를 만나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처럼 내가 유학 중이던 1979-83년 동안 유명한 환경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해서 자연히 생동감 있는 ‘현장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1983년에 귀국해서 중앙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러면서 당시 법학교수에게는 관심분야가 되지도 않았던 해안지역 관리, 해양유류오염, 원자력 법제, 석면질병 소송 등에 관한 논문을 연거푸 발표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과학, 법, 그리고 정책
정리하자면, 나는 환경문제나 환경정책에 관한 지식과 정보는 거의 영어 문헌으로 얻어 왔고, 그런 지식에 입각해서 우리나라 현실을 보아 왔다. 내가 확신하는 바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 생기는 일은 우리에게도 생기며 거기서 안 되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만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4대강 사업에 대해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반대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런 사업을 다른 나라에서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환경사안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일어났던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는 없는 환경정책을 무리하게 수립하면 항상 문제가 된다. 10여 년 전 음식물 쓰레기 자원화를 환경부가 역점 사업으로 밀고 나갈 때에 나는 비판적이었다. 그런 정책을 전국적으로 추진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정책은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다. 재활용 과정에서 나오는 악성 폐수를 바다에 투기해서 국제적 문제를 야기했으며, 힘들여 만든 사료와 비료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정책 사안에 대해서도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했는데, 나의 판단은 거의 정확했다고 자부한다. 연구비를 정부로부터 얻어야 하는 이공계 교수들은 4대강 사업이나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같은 황당한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반면에 이해관계가 없는 나는 소신껏 성토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전통 법학의 한계를 극복하다
교수에게 전공은 그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야, 그리고 교수가 된 후 주로 연구한 분야를 의미할 것이다. 1983년에 조교수가 된 후에 지금까지 발표한 학술논문이 100편은 넘을 것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환경법, 국제환경법, 수법(水法) 등 환경에 관한 법이다. 그 외에는 헌법, 행정절차법, 국제경제법, 법조윤리 등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에 관한 것들이다. 아무래도 미국법에 기초한 논문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어느 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제 정년도 몇 년 남지 않아서 꼭 발표해야할 논문 몇 편만 더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인데, 한국의 법학은 나 같은 전공자가 설 자리가 별로 크지 않다. 최근에 법학전문대학원이 생겨서 세법, 금융법 등 특화된 분야를 전공한 연구자가 교수가 되었지만 그 전에는 이런 특수법을 공부해서 교수가 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서울대 대학원에서는 미국 헌법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했다. 석사학위 논문은 나중에 보완해서 학술서적으로 출판되어 화제를 모았다. 그래서 람들은 내가 환경법으로 박사학위를 했지만 결국에는 헌법이나 행정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전망은 빗나가고 말았다.
당시 국내에서 환경법은 불모의 영역이었고, 그에 관한 논문이란 것도 대개 민법과 행정법 영역 중 환경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환경법을 주된 전공으로 일구어 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사회적 환경이 큰 역할을 했다. 우선 당시 환경청(환경부의 전신)이 환경 법률을 정비하는 작업을 하는 등 환경법 지식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다음으로 골프장 무더기 허가, 수돗물 불신, 낙동강 페놀 오염사고 등으로 환경문제 자체에 대한 지식 수요가 폭발하다시피 했으며, 마지막으로 유엔환경개발회의, 오존층 보호,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보전 등 국제환경 문제에 대한 지적 요구도 같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환경에 관한 전문지식에 대한 수요가 분출할 시점에 나는 ‘준비된 연구자’였다.
역사와 자연과의 만남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고교 시절에 역사를 공부해서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다. 역사를 공부했다면 아마도 미국사를 전공했을 것이다. 정치 사회 중심의 역사 외에도 자연환경과 문명의 충돌로서 미국 역사를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인디언과 충돌하면서 정착한 백인 문명, 백인의 서부 이주와 이에 따른 자연환경의 변화, 드디어 태평양 연안에 도달해서야 자연의 가치를 깨닫는 과정은 바로 인류가 자연을 대해 온 과정의 축약판이라 할 만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역사책 읽기를 좋아했던 소년이 입시제도 변경으로 지학을 공부해서 자연사에 흥미를 갖게 됐고, 답답하기만 한 수험법학 책 보다 영어 시사잡지와 미국 책 읽기를 좋아했던 대학생이 됐으며, 미국 유학생활도 큰 강과 바닷가 옆에 위치한 대학에서 하게 되어 보니 자연히 ‘환경’과 ‘생태’ 같은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 ] 부분은 책에선 생략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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