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학을 떠나면서

작성일 : 2013-03-09 21:46조회 : 2,548

대학을 떠나면서

이상돈 (2013년 3월 8일)

2월 28일에 대학 연구실을 비웠으니 이제 열흘이 흘렀다. 평소부터 60세까지만 대학에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정년을 4년 앞두고 명퇴를 택한 결정은 나에게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법학은 원래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전공은 아니었지만, 법학을 공부하게 되어 논리적 사고(思考)와, 윤리와 규범의 중요성, 그리고 법과 현실의 괴리 같은 문제를 40년 넘게 고민했으니 법학을 전공해서 얻은 것도 많다.

30년 대학 강단에서 환경법, 국제경제법, 국제환경법 등을 가르쳤고, 교양과목으로 법학개론과 여성과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초창기에 내 강의를 들은 학생으로는 이재명 성남시장이 있다. (이재명 시장은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장학생으로 입학해서 숱한 신화와 일화를 남겼다.) 1983년부터 몇 년 동안은 서울대에서 법학개론을 가르쳤는데, 권영세 전 의원의 부인이 내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1980년대 말부터 5년간 서울대에서 환경법을 가르쳤는데, 조해진 의원과 이두아 전 의원이 수강했다고 한다. (물론 나는 학생들 이름이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비슷한 시기에 경찰대학에서 환경법을 가르쳐서, 이름도 기억 못하는 총경 제자가 수두룩하다고 전해 들었다.

중앙대에서 1990년대 말부터 2011년까지 영어 원강을 가르쳤는데, O. J. 심슨 재판과 클린턴 탄핵에 관한 TIME지 기사를 교재로 사용했다. 이 두 사건은 미국의 헌법과 법률 외에도 역사, 정치, 문화, 사회 등 미국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절대로 가르칠 수 없다. 감칠맛 나는 영어 표현을 해석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에 나온 졸업생이 나를 만나자 “교수님 영어 원강이 대학 재학 중 가장 인상 깊은 강의였습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30년 교수 생활에 미련이나 후회는 없고, 그간 교수 생활을 뒷받침해 준 중앙대학교에 깊이 감사하는 생각뿐이다. 가까운 교수들에게는 일찍이 내 생각을 밝혔지만, 그 때마다 이들은 “정년까지 가셔야 한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2011년 말 새누리당 비대위원에 발탁되면서 나는 2012년이 교수로서 마지막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업으로 정치를 하다시피 했는데, 인내심으로 참아준 대학이 너무나 고마울 뿐이다.

몇 년이라도 빨리 은퇴해서 책을 쓰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이제 그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됐다. 평생 교수를 한 사람이 대학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성(城)인 연구실을 비우고, 그 다음날부터 갈 곳이 없는 것이 서글프다고 한다. 무엇보다 퇴직하면서 연구실을 비우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남들에게는 아무런 용도가 없는 오래된 책과 자료를 집으로 끌고 갈 수도 없고, 자기가 버릴 용기도 없는 교수들은 꼭 필요한 것을 들고 나가고 후배 교수에게 처리를 부탁하고 다시는 학교 쪽을 쳐다보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평생을 모은 자료라고 해도 도서관도 받기를 꺼려하는 것이 요즘 실정이다. 도서관 공간이 좁아서 묶은 자료를 폐기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작년 여름부터 시간 나는 대로 불필요한 자료와 책을 가려내서 폐기했는데, 웬 자료가 구석구석에서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나도 놀랐다. 중앙대 법대 11층 남측 연구실은 공간이 11평(보통의 경우 교수연구실은 6 ~ 7평이 기준이다.)이나 되어 자료와 책을 많이 쌓아 두었던 셈이다. 몇 년 전부터는 기자 등 내방객이 많아서 제법 좋은 푹신한 소파세트까지 들여 놓았었다. 인터넷과 렉시스(법률자료 인터넷 서비스)가 없던 시대에 공부한 나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에 관심분야 저널을 많이 구독했다. 그것들을 속절없이 보관하다가 연구실을 옮길 때마다 정리하고 했는데(30년간 연구실 이사를 세 번했다.), 버리기 아까워서 보관해온 저널 2종은 서울법대와 튤레인 대학 후배인 서 아무개 변호사가 로펌 도서실에 두겠다고 가져갔다. 집에는 책장 네 개와 그 보다 많은 분량의 책과 자료가 들어와서 집안 정리하는데 꼬박 열흘이 걸렸다. 10여 년간 사용했던 책상과 책장도 괜찮은 브랜드로 멀쩡했는데, 어느 시민단체가 쓰겠다고 가져가서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대학을 떴지만 한국 대학의 앞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중반까지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학생들은 취직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7년 경제위기 후에 취직이 어려워져서 불안한 미래를 안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역시 우울할 뿐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부터 대학원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대학원 입학에 경쟁이 있었지만 지금은 입학생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현상이 거의 모든 대학에 걸쳐 발생하고 있어서. 포스텍(포항공대)도 대학원은 동남아 유학생들이 많은 실정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은 학부 학생마저 부족한 지방대학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지만, 이는 우리 대학의 앞날에 검은 그림자를 던져 주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런 짐을 후배 교수들에게 넘겨 버린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c) 이상돈
사진은 중앙대 법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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