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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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외조부 춘곡 고희동에 대한 추억
작성일 : 2015-10-23 22:41조회 : 2,488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 <한국 근대화단의 선봉> 2015. 10. 22
* 2015년 10월 22일 춘곡 고희동 화백 50주기를 맞아서 원서동 고희동 가옥에서는 기념식이 열렸고 특별전시가 연말까지 열리고 있다. 이 날 출간된 도록 <한국 근대화단의 선봉>에 후손인 외손 4명의 글이 권말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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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 춘곡 고희동에 대한 추억
이상돈 (외손)
외조부는 1965년 10월 22일에 세상을 뜨셨으니 금년이 50주기가 된다.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 있는 광장에서 치른 영결식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데 벌써 50년 세월이 흘렀다. 그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양쪽에 늘어선 조화에서 나는 국화향이 매우 강렬했다. 영결식장 앞줄에 앉아 계시던 백낙준 박사와 장면 박사의 모습도 역시 생생하다.
1.4 후퇴 때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나는 거기서 태어났다. 서울이 공산군 치하에 있을 때 납북될 위기를 간신히 넘긴 외조부님도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고 피난지에 태어난 나를 외조부는 무척 귀여워 하셨다고 한다. 외조부에 대한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수송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정초에 부모님과 함께 원서동 외가로 세배를 갔던 일이다. 지금은 화실로 보존된 큰 방에는 손님들이 북적거렸고, 마당에서 올려보면 집이 꽤나 높아 보였다. 집밖으로 나오면 창경궁에서 흘러나온 맑은 개천을 볼 수 있었다. 그 즈음 늦가을에 경복궁 경내에서 열린 국전을 보러갔더니 사람들이 외조부를 에워싸고 무슨 말을 하던 장면도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 당시 외조부가 대한민국 예술원장이셨다는 사실은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됐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즈음 외조부는 원서동 집을 팔고 제기동이란 낯설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제기동은 우리가 살던 도렴동에서 멀기도 하거니와 집도 작아서 실망이 컸다. 외삼촌 사업이 잘못돼서 그리로 이사를 가셔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60년 봄에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우리가 살던 도렴동 집 마당에서 보면 지금은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서있던 경찰 무기고 건물이 보였다. 그 때 나는 무기고 3층 창에서 총을 들고 세종로 거리를 내려다보는 경찰관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총소리를 들으면서 며칠을 지냈더니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4.19 후 집안 분위기는 흥분된 듯이 보였다. 그 때 나의 아버지는 무슨 사업을 하신다면서 자가용 지프를 갖고 계셨는데, 외조부님이 타고 다니시도록 했다. 어머니는 외조부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신다고 했고, 그런 탓인지 온 집안이 분주해 졌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유세 현장을 가서 보기도 했다. 한복을 입으신 외조부가 연단에 올라가서 무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같이 갔던 누군가는 외조부와 같이 앉아계신 분이 백낙준 박사라고 알려주었다. 7월 29일 총선에서 외조부와 백낙준 박사는 참의원에 무난히 당선됐다. 그 즈음 외조부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우리 집에 자주 오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2공화국 국회가 개원을 하는 날에 나는 국회 앞 도로 옆에 세워둔 지프 차 속에서 외조부가 최연장 의원으로 제2공화국 국회 개원 사회를 보시는 것을 라디오 중계로 들었다.
그 즈음 우리는 보다 넓은 내자동 집으로 이사를 갔다. 원래부터 사회명사이신 외조부가 참의원이시고 또 장면 국무총리와도 가까우셨으니 흔히 하는 말로 온 집안이 신바람 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1년도 가지 못했다. 5.16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은 종로구청이 자리 잡고 있던 수송초등학교에 가려면 세종로를 건너야 했는데, 5.16이 발발한 날은 아버지는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다. 세종로 거리에는 장갑차와 무장군인들이 서있었고, 그 모습을 본 부친은 연거푸 한숨을 내리쉬셨다. 어린 나이에 나는 4.19에 이어 5.16도 현장을 목격한 셈이다.
5.16으로 참의원직을 잃으신 외조부는 모든 사회활동을 단념하고 제기동 집에 칩거하셨다. 그러면서 외조부는 그림을 많이 그리셨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시고 마지막으로 예술혼을 불태우셨을 것이다. 참의원을 지내시는 동안에 외조부는 민간방송 허가를 얻으셨다. 지금 같으면 국회의원 겸직 규정이 있었겠지만 당시는 그런 제한이 없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송허가는 실제로는 나의 아버지 이승우가 얻은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전기기술자였던 아버지는 민간 라디오 방송을 하고 싶었는데, 4.19 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외조부 명의로 허가를 받아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속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해 개국을 하지 못하고 있던 중 서울에서 민간방송을 하고자 하던 김지태씨가 방송허가를 인수해서 문화방송이 탄생한 것이다. 문화방송은 군사정부에 의해 5.16 장학회로 넘겨져서 오늘날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수장학회 문제가 되고 말았다.
1962년 초, 외조모가 급환으로 돌아가시자 외조부는 충격이 크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평소에는 종교에 초연하셨던 외조부가 장면 박사를 대부로 해서 천주교 세례를 받으셨다. 쓸쓸하신 탓인지 내자동 우리 집에도 자주 오셨고, 한번 오시면 며칠씩 묵고 가셨다. 1964년 3월, 나는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나에게 "잉글리쉬는 컴프리헨션 뿐 아니라 컴포지션과 컨버세이숀도 잘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영어는 독해 뿐 아니라 작문과 회화도 잘 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이니, 얼마나 시대를 앞서 가셨던 분인지 알 수 있다. 외조부는 또한 "장박(張博)과 정박(鄭博)은 영어를 잘 한다"고 말씀하셨다. '장박'은 제2공화국 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를, 그리고 '정박'은 제2공화국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정일형 박사를 말하는데, 두 분 모두 미국에서 유학을 하셨고 민주당 신파 정치인으로 외조부와 가까우셨다.
정일형 박사는 그 때에 내자동에 사셨는데, 우리 집에서 몇 집 걸러서였다. 어머니의 회고에 의하면, 외조부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어떻게 알고 정일형 박사가 댁으로 초대해서 아침을 같이 하셨다고 한다. 한번은 외조부께서 정 박사가 집에 계시는지 알아보라고 하셔서 정 박사 댁으로 뛰어가서 문을 두드리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한 청년이 대문을 조금 열고 "안 계시는데'라고 했는데, 아마도 정일형 박사의 아들인 정대철 전 의원일 것으로 생각된다. 1964년 늦가을, 외조부께서 우리 집에 오셨는데 내자동 성당(세종로 성당)을 가자고 하셨다. 내가 손을 잡아 드리고 성당을 갔는데,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녀님이 나오셔서 "미사가 없다"고 하자 외조부는 "내가 시간을 잘못 알았구나" 하시면서 잠시 앉으셔서 높이 걸려있는 십자고상을 올려보셨다. 집으로 모시고 오는 길에 외조부는 "내가 내년 가을을 못 넘길 것 같다"고 하셨다.
1965년 3월 말, 외조부께서 쓰러지셨다고 전갈이 와서 어머니는 급히 제기동 집으로 가셨고, 나도 학교가 끝난 후 외가로 향했다. 주치의 격인 김동익 박사께서 금방 오셔서 응급 처치를 하신 덕분에 외조부는 일어나 앉으셨으나 표정이 전과 같지 않으셨다. 잠시 후 장면 박사가 문병을 오셨다. 두 분은 한일협정 반대 시위 등 시국에 대해 말씀을 나누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외조부는 병세가 차츰차츰 나빠지셨고, 그해 10월 22일 돌아가셨다.
외조부가 돌아가신지 50년이 되었고, 15세 소년이던 나도 60대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외조부는 일제 식민통치를 싫어했고, 북한 공산주의와 이승만 독재정치에 반대했다. 그런 점에서 4.19 후 1년 동안이 외조부가 평생 동안 희망하고 추구했던 세월이었다고 생각된다. 외조부에 대한 나의 추억은 그것이 주로 4.19를 전후한 몇 년 동안이기에 진하고 선명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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