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우드로 윌슨 (주간경향)
2016-01-24 11:11 725 이상돈


주간경향 2016년 1월 26일자 1161호

[이상돈의 책을 통해 세상읽기]

세계평화를 향한 우드로 윌슨의 꿈과 좌절


- 스콧 버그, 윌슨  (2013년, 퍼트남, 818쪽)
- Scott Berg, Wilson (2013, Putnam. 818 pages)


미국 프린스턴대학 총장과 뉴저지 주지사를 지낸 후 1912년에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우드로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국제연맹을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윌슨은 1856년에 버지니아주 스탠턴에서 태어났다. 장로회 목사였던 부친은 오하이오주에서 버지니아주로 이주해서 정착했고,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등 남부를 도왔는데, 이는 어린 윌슨에게 영향을 미쳤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윌슨 가족은 부친의 목회활동을 따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노스캐롤라이나주로 옮겨 살았고, 윌슨은 작은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한 후에 부친이 프린스턴대학의 목사로 취직이 되자 프린스턴으로 학교를 옮겼다.

윌슨은 에드먼드 버크, 월터 배지홋 등 영국의 정치사상가와 헌법학자에 심취했다. 윌슨은 미국 정부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고, 대통령이 영국처럼 의회에서 토론하고 내각과 의회가 함께 정부를 운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대학 졸업 후 버지니아대학 로스쿨에 1년간 다녔으나 건강이 나빠져서 부모가 살던 노스캐롤라이나주로 돌아와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변호사 업무를 싫어한 윌슨은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해서 ‘의회 정부’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윌슨의 논문은 책으로 출판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아서 학자로서의 성공을 예고했다. 윌슨은 목사의 딸인 엘렌과 결혼했고, 새로 생긴 여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 후 윌슨은 웨슬리언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프린스턴대학의 정법학부장으로 초빙돼서 10년 만에 모교로 돌아왔다.


모교 프린스턴 총장 취임 명문으로 키워

 윌슨의 정치학 강좌는 많은 학생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여러 대학이 윌슨을 총장으로 초빙하려 했으나 그는 모교에 남기로 했다. 1902년 프린스턴대학 이사회는 윌슨을 총장으로 선임했다. 총장으로서 윌슨은 성적이 나쁜 학생과 무능한 교수를 퇴출시키는 등 학업 수준을 강화했다. 윌슨은 앤드루 카네기를 만나서 지원을 부탁했고, 카네기는 10만 달러를 기부해서 프린스턴은 명문 대학으로 발돋움했다. 윌슨 가족은 총장 공관에서의 생활을 즐겼지만 윌슨은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윌슨은 흑인이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하는 데 거부감을 가졌다. 윌슨은 집단으로서 흑인은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윌슨은 유태인과 가톨릭 신자는 교수로 채용해서 흑인에 대한 태도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1910년 선거를 앞두고 뉴저지주 민주당 간부들은 이미지가 좋은 윌슨을 주지사 후보로 내세우고자 했다. 윌슨은 개혁적 공약을 앞세우고 주지사에 무난히 당선됐다.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윌슨은 조지프 투멀티와 윌리엄 맥아두를 만났는데, 이들은 그 후 윌슨과 정치적 행로를 같이하게 된다. 1912년 대선을 앞두고 적절한 대통령 후보감이 없던 민주당은 인기 높은 뉴저지 주지사를 후보로 생각하게 됐다. 텍사스주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에드워드 하우스가 이 때 윌슨을 알게 되어서 대통령 선거를 돕게 되는데, 군대를 가지 않은 그는 하우스 대령으로 불렸다.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세 차례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급진적 개혁주의자 윌리엄 브라이언이 윌슨을 지지함에 따라 윌슨은 민주당 후보로 지명됐다. 공화당 후보로는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이 나왔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공화당을 탈당해서 개혁당 후보로 독자 출마했다. 윌슨은 유효투표의 41.9%를 얻어서 27.4%를 얻은 루스벨트와 23.2%를 얻은 태프트를 누르고 당선됐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윌슨은 435표를 얻어 다른 후보를 압도했다. 오랜만에 민주당은 백악관을 차지했고, 대학총장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 윌슨은 브라이언을 국무장관에 임명하고, 자신의 선거를 도운 맥아두와 투멀티를 재무장관과 백악관 비서관으로 기용했다. 하우스 대령은 공식 직책을 맡지 않았지만 윌슨에 대해 참모 역할을 했다.


우드로 윌슨과 두 번째 부인 이디스.

대통령으로서 윌슨은 연방준비제도법을 제정해서 미국의 화폐제도를 안정시켰고, 불공정 거래와 독과점을 규제하는 연방거래위원회법과 클레이튼 반(反)독점법을 제정하는 등 개혁을 이끌었다. 윌슨은 개혁성향의 변호사로서 유명했던 루이 브랜다이스에 자문을 구했고, 1916년에는 그를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브랜다이스는 대법관이 된 최초의 유태인이었다.

윌슨은 아내 엘렌과 사이에 세 딸을 두었다. 막내딸 일리노어는 아내가 사망해서 혼자 살고 있는 재무장관 맥아두와 친해져서 결혼을 하게 됐다. 맥아두는 장관이 대통령의 사위가 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사의를 표했지만 윌슨은 그대로 있도록 했다. 맥아두 장관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금융계에 불어닥친 위기에 적절히 대처했다. 윌슨의 또 다른 측근은 해군 군의관 캐리 그레이슨이었다. 그레이슨은 병약한 대통령 부부를 돌보게 됐는데, 윌슨은 많은 문제에 대해 그에게 의견을 구하곤 했다. 워낙 병약한 엘렌은 그레이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4년에 사망했다. 엘렌은 “남편이 재혼을 하면 좋겠으며, 남편을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을 그레이슨에게 남겼다. 그레이슨은 젊은 미망인 이디스를 윌슨에게 소개했고, 1915년 말 윌슨과 이디스는 결혼했다.


정책 홍보 순회연설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첫 번째 임기 동안 윌슨은 내란의 와중에 빠져 있는 멕시코에 미군을 보냈으나 유럽에서 발발한 세계대전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에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1915년 5월 영국의 대형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어 많은 사람이 죽자 윌슨은 독일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에 항의해서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사퇴하자 윌슨은 로버트 랜싱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1916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윌슨은 독일 잠수함이 북대서양에서 미국 선박을 격침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대규모 지상군을 파견했다. 미군의 참전으로 연합국은 승리했고 미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윌슨은 전쟁 후 세계평화를 위한 14개조를 발표했고,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에도 직접 참가해서 국제연맹을 탄생시키기 위한 베르사유 조약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191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해서 상·하원의 다수석을 장악했고, 미국 여론은 더 이상 유럽에 간여하는 것을 싫어하는 고립주의로 흘러갔다.

의회의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이 베르사유 조약 비준에 반대하자 윌슨은 자신의 세계평화 구상을 미국민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전용 기차를 타고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연설을 했다. 1919년 9월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연설을 하던 중 윌슨은 뇌졸중을 일으켜서 쓰러졌다. 윌슨은 백악관으로 급히 돌아왔지만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미국 대통령은 사실상 유고(有故) 상태였다. 그 후 1년 반 동안 윌슨은 대중 앞에 나타나지 못했고 부인 이디스와 주치의 그레이슨은 윌슨이 문서에 결재를 하도록 돌보았다. 세계평화를 위한 윌슨의 원대한 구상이던 베르사유 조약은 미국 상원의 비준을 얻지 못했다. 192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워렌 하딩이 당선됐고, 윌슨과 이디스는 워싱턴 북서쪽에 마련한 저택에 정착했다. 윌슨은 자신이 이루어 놓은 개혁조치를 하딩 대통령이 번복시키자 분노했지만 하딩이 사망한 후 대통령이 된 캘빈 쿨리지에 대해선 호감을 가졌다. 1924년 2월 3일 윌슨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67세 나이로 사망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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