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나라와 사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메드 라시드, 혼란을 향해 추락하다 (2008년, 바이킹, 484쪽)
Ahmed Rashid, Descent into Chaos (2008, Viking, 484 pages, $27.95)
아메드 라시드는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정통한 파키스탄 언론인이다. 그가 2000년에 펴낸 ‘탈레반’(Taleban)은 9-11 테러 후에 22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15만부가 팔렸다. 2002년에는 중앙 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문제를 다룬 ‘지하드’(Jihad)를 펴냈다. 2008년에 나온 이 책 ‘혼란을 향해 추락하다’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패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과의 관계 등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아메드 라시드는 영국에서 사립학교를 다닌 후에 라호르의 파키스탄 국립대학을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을 1960년대 말에 졸업했다. 대학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파키스탄 서남부의 발로치스탄(Balochistan) 산간지역으로 돌아왔다. 라시드는 그 곳에서 10년 동안 머물면서 동료들과 함께 발로치스탄을 파키스탄의 군부통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주민자치 활동을 했다. 게릴라 같은 생활을 하는 동안에 건강을 해쳐서 라호르로 돌아온 그는 영국의 데일리 텔리그라프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파키스탄 주재기자를 지냈다. 9-11 테러 후에 그는 탈레반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로 유명세를 탔다. 2000년에 펴낸 ‘탈레반’에서 라시드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두고 있다면서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9-11 테러는 그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미국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및 중앙 아시아에서의 국가건설 실패’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9-11 후 미국이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정당한 전쟁’(‘just war’)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파키스탄의 군부정권과 미국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책은 9-11 테러와 전쟁, 9-11 이후의 정치, 그리고 국가건설(nation-building) 실패와 그로 인한 혼돈을 분석하고 있다.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정당한 것이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미국은 카불에 새로운 정권을 세웠지만, 아프가니스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도 알케이다의 양성소로 되었고, 알케이다는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의 도움으로 세력을 늘려가고 있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9-11 후에 생긴 미국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실천에 옮기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미완(未完)으로 남겨 둔 채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라크 침공을 결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었다. 이라크 전쟁이 테러와의 전쟁이 된 것은 미국의 침공이 있은 후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알케이다가 전세계의 과격한 테러리스트를 이라크로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네오콘들은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와 ‘국가재건’(‘nation building’)에 집착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다른 나라를 재건하는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저자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국가재건을 성공적으로 이룩해야만 과격 이슬람의 확장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 등 네오콘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케이다 간부들을 소탕하기를 포기하고 이라크 침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다시 혼돈에 빠져 버렸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1979년 12월의 소련군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아프가니스탄 내의 친소(親蘇) 세력간의 분쟁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소련군이 침공하자 500만 명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탈출했다. 1981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이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하겠다고 공언함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은 냉전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었다. 미국과 나토 회원국, 그리고 사우디 등 친(親)서방 아랍국가들은 수십억 달러를 아프간의 부족 지도자(물라)들에게 지원했다.
하미드 카르자이
저자의 친구이자 현재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는 1957년에 칸다하르에서 그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인 압둘 카르자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소련군이 침공하자 카르자이 가족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까운 파키스탄의 케타로 탈출했다. 인도에서 대학을 마친 하미드 카르자이는 파키스탄 내의 아프간 해방전선에 가담했다. 외국어 능력과 탁월한 매너, 그리고 조정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정치명문가인 무자데디가(家)의 시브가툴라 무자데디의 대변인을 지냈다. 이슬람 민병대 무자헤딘의 공격에 시달린 소련은 1989년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무자헤딘은 카불을 탈환하고 무자데디는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카르자이는 외무차관이 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북부의 타지크족(族) 군대가 카불을 장악해서 실권을 장악하자, 다수파인 파슈툰족(族) 군대가 카불을 다시 공격했다. 타지크족이 장악하고 있던 아프간 정부의 차관이던 카르자이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던 중 건물이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지자 카르자이는 카불을 간신히 탈출해서 파슈툰족(族) 지역인 프레스와로 피신했다. 아프가니스탄은 각 지역의 군벌이 통치하면서 서로 싸우는 내란의 혼돈에 빠져들었다. 탈레반은 이런 혼란 속에서 생겨났다. 소련 점령군과 싸웠던 젊은이들은 소련군이 물러난 후에 파키스탄의 마드라스(종교 학교)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들은 소련군과 영웅적으로 싸웠던 모하메드 오마르를 그들의 지도자로 숭배했다. 오마르를 중심으로 이런 젊은이들이 뭉친 단체가 바로 탈레반이다.
파키스탄과 탈레반
파키스탄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 에머레이트 등 산유국가를 설득해서 탈레반에게 재정 지원을 하도록 했다. 파키스탄의 정보국(ISI)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시키기를 원했다. 파키스탄 서남부 지역의 주민들은 탈레반을 지지하는 파슈튼족(族)과 인종적으로 가까웠다. 군사장비와 자금을 지원받은 탈레반은 1996년에 수도 카불과 남부의 도시들을 장악했고, 1998년에는 북부의 요지인 마자르를 점령했다. 북부의 우즈베크족(族) 군벌인 도스툼 장군은 터키로 탈출했다. 오직 북부의 타지크족(族) 군벌인 용맹한 마수드 장군만 탈레반과 맞서 싸웠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러한 사태를 방관했다.
1996년 가을, 탈레반의 수장인 오마르는 오사마 빈라덴을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거점도시 칸다하르로 초청했다. 탈레반은 이제 알케이다와 함께 글로벌 지하드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99년 7월, 파키스탄의 케타에 망명 중인 압둘 카르자이가 탈레반에 의해 암살되었다. 하미드 카르자이는 파키스탄과 탈레반 당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파키스탄에 망명 중인 아프간 조문객을 300대의 차량에 태우고 사망한 부친의 시신을 칸다하르의 가족 묘지로 운구해서 매장했다. 탈레반은 이 대담한 장례행렬을 저지하지 않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하미드 카르자이는 반(反)탈레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2000년 9월, 탈레반은 마수드 장군의 마지막 보루이던 탈로관을 장악했다. 탈로콴 전투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무슬림 전사(戰士)들이 참여했고, 파키스탄의 국경군단 요원들이 포격과 통신망을 지휘했다. 2000년 10월, 알케이다는 예만의 아덴항(港)에 정박 중인 미국 구축함 콜호(號)(USS Cole)에 자살공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2001년 들어서 카르자이는 파키스탄에 망명 중인 파슈튼 지도자 압둘 하크 등 탈레반에 반대하는 아프간 지도자들과 회동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2001년 8월, 카르자이는 압둘 하크 등과 함께 런던을 방문해서 영국의 관료들을 만나서, 빈라덴이 탈레반을 조종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정보국은 알케이다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지만 마땅한 대책을 갖고 있지 못했다. 카르자이는 워싱턴도 방문했지만 아프가니스탄 지역과 알케이다에 대한 미국 관료들의 무관심에 실망했다.
마수드 암살과 9-11 테러
2009년 9월 9일, 북부 작은 도시에서 북부 동맹군을 지휘하던 마수드 장군은 TV 기자를 가장한 암살범들에게 살해당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를 놀라게 한 9-11 테러가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그 날 파키스탄 정보국(ISI) 국장인 메부드 소장은 워싱턴을 방문 중이었다. 파키스탄 정보국은 미국이 탈레반을 오해하고 있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9월 12일, 조지 W. 부시는 방송연설에서 세계를 향해 “우리와 함께 가던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와 함께 하는가”를 물었다. 리차드 아미티지 국무차관은 메부드 국장에 대해 “당신들은 어디에 서있냐”고 물었고, 당황한 메무드 국장은 “우리는 미국과 함께 있다”고 답했다.
9-11 테러는 파키스탄을 충격에 빠뜨렸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는 좋아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도시에 거주하는 교육을 받은 계층은 이 기회에 파키스탄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미국과 협력할 것을 약속했고, 미국은 그 대가로 경제제재를 풀고 경제지원을 할 것을 약속했다. 많은 파키스탄 국민들은 파키스탄 군부가 이 기회에 근본주의 이슬람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9년에 극적인 반전(反轉)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무샤라프는 미국과의 협력으로 불안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국은 여전히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9-11 테러 후 알케이다는 아프가니스탄의 캠프를 버리고 잠적해 버렸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은 불가능했다. 미 국방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미 정보당국은 파슈툰 지역에 아무런 연락거점을 갖고 있지 않았다. CIA가 갖고 있던 유일한 창구는 북부의 마수드였으나 마수드는 9-11 직전에 죽었다. CIA는 현지 언어를 할 줄 아는 퇴직한 요원 개리 쉬렌을 다시 불러들여서 10명으로 구성된 비밀 팀을 조직했다. 암호명이 ‘조브레이커’ (Jawbreaker)인 이 팀은 9-11 테러가 있은 후 2주일 만에 아프가니스탄이 판셔 밸리 지역에 잠입했다. 이들은 공작금을 갖고 들어가서 북부동맹군 군벌 지도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했다. 마수드의 후임자인 파임 장군과 터키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도스춤 장군 등에게 수백만 달러씩 전달되었다. 미국으로선 매우 작은 비용을 들여 대리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 전쟁을 이라크로 확산시킬 생각을 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네오콘들은 9-11 테러가 이라크의 조력으로 이루어 졌다고 믿었다. 북부 동맹군이 쿤두즈와 칸다하르를 포위하고 탈레반에게 항복을 요구할 즈음인 2001년 11월 21일, 부시 대통령은 중부군 사령부에 이라크 침공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군 지휘부가 이라크로 관심을 돌리게 됨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군의 작전 집중도는 저하되었고, 이로 인해 빈라덴은 피신할 수 있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개전 초에 나토와 러시아, 그리고 이란과 협력할 수 있었던 기회를 상실했다. 탈레반이 파멸되기를 바랬던 이란은 미국에 대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협력하겠다고 제의했으나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 미군은 우즈베키스탄의 독재정권과 협력해서 북쪽으로부터 미군 병력을 침투시킬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국가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파키스탄 군부의 이중적 태도도 미국에 문제를 야기했다. 무사라프는 미국과 협력하겠다고 하면서 경제원조까지 받았지만 파키스탄 정보국은 탈레반에 정보와 자금을 계속 지원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 중인 CIA 팀은 북부 동맹군 지도자들과 협의해서 탈레반 소탕 작전을 수립할 수 있었다. 2001년 11월에 들어서 북부 동맹군은 미군의 폭격으로 약해진 탈레반에 대해 대공세를 취했다. 탈레반은 궤멸되기 시작했고, 북부 동맹군은 카불을 향해 진격했다. 미국의 고민은 아프가니스탄의 다수 인종인 파슈툰족으로 탈레반에 저항해 싸우는 인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아프가니스탄에 잠입해서 활동해 온 카르자이를 만난 CIA 팀은 카르자이가 탈레반과 싸우는 거의 유일한 파슈툰 지도자라고 본부에 보고했다. 그 후 미국 당국은 카르자이가 자유 아프가니스탄을 이끌 지도자라고 판단하고 카르자이의 신변을 철통같이 보호했다. 또 다른 파슈튼족 지도자인 압둘 하크가 탈레반에 붙잡혀서 처형된 후에는 특히 그러했다.
북부 동맹군의 공격으로 탈레반은 남부의 칸다하르와 북부의 쿤두즈에 포위되었다. 쿤두즈에는 탈레반을 지원하던 파키스탄 정보국 요원들과 파키스탄의 국경여단 병력이 있었다. 무샤레프는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서 쿤두즈에 대한 폭격을 잠시 중지해 줄 것과 파키스탄 공군 수송기가 파키스탄 요원들을 실어 올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시와 체니는 극비리에 이에 동의했고, 2001년 11월 15일 두 대의 파키스탄 군용기가 쿤두즈에 착륙해서 파키스탄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 때 파키스탄 병력 뿐 아니라 알케이다 등 과격 단체에 속한 전사(戰士)들도 이 수송기편으로 쿤두즈를 탈출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북부 동맹군이 쿤두즈를 함락시켰을 때 그들은 예상보다 훨씬 적은 탈레반 병력을 포로로 잡았을 뿐이다.
파키스탄은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탈레반과 협력했던 것이다. 파키스탄은 북부 동맹군이 카불을 접수하는 상황을 가장 우려했기 때문이다. 빈라덴이 이끄는 알케이다와 탈레반 병력은 험준한 산간지역인 토라 보라로 숨어 들었고, 미군은 토라 보라를 맹폭했다. 현지의 CIA 요원은 미군 지상병력을 요청했으나 중부군 사령부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덕분에 빈라덴과 수행원들은 토라 보라를 탈출해서 파키스탄 접경지대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12월 3일, 카르자이는 미군 군용기 편으로 칸다하르에서 카불에 도착했고, 독일 본에서 미리 합의한 대로 파슈툰족인 카르자이가 대통령을 맡고 다른 중요한 직책은 북부 동맹군이 차지하게 되었다.
인도와 파키스탄
캬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은 오래된 것이다. 파키스탄과 가까운 탈레반은 인도를 적대시했다. 과격 이슬람 세력은 인도령(領) 카슈미르에서 종종 테러를 일으켰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인도는 미국이 파키스탄을 테러지원국가로 지정할 것으로 생각했다. 무샤라프가 미국의 편을 들기로 하고 미국이 파키스탄에 경제지원을 하게 되자 인도는 경악했다. 2001년 10월 1일, 파키스탄에 근거를 둔 테러단체가 인도령 카슈미르에 자폭테러를 감행해서 29명이 사망했다. 2002년 1월 초,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국경지대에 대규모 군대를 배치했고, 이에 대응해서 파키스탄도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 주둔군을 인도와의 국경지대로 이동시켰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이러한 대립은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영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은 파키스탄의 핵 기술자들이 알카에다와 접촉하고 있음을 파악했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에 파키스탄 핵 개발의 주인공인 칸 박사의 연구활동을 중단시키도록 요구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았고, 2005년에 칸 박사가 리비아에 핵 기술을 팔려고 시도하다가 적발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2007년에 부시 대통령은 인도를 방문해서 미국과 인도 사이의 관계가 향상되었다.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적대적 관계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군벌(軍閥)
미국은 소련군에 대항하는 무자헤딘을 지원했고, 그런 과정에서 민병대를 이끄는 지역 군벌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번에 미국은 탈레반에 저항하는 군벌을 지원했다. 미국은 각 지역을 지배하는 이 같은 군벌의 실체를 인정했기 때문에 카불의 중앙정부를 이끄는 카르자이 보다 각 지역을 관장하는 군벌의 영향력이 더욱 큰 실정이다. 미국이 아프간의 군벌에 너무 의존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발전을 가로 막았다는 평가도 있다. 2002년 12월, 카르자이는 아프간 국방군을 창설하는 명령을 발부하면서 각 지역의 군벌에게 1년 내에 무장을 해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무샤라프의 실패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로 파키스탄을 심각한 정치적 위험에 빠뜨렸다. 인도와의 관계는 전면전 직전까지 갔고, 파키스탄 곳곳에선 반미 시위가 발생했다. 혼란을 틈타서 알케이다와 탈레반 수천 명이 무장을 하고 파키스탄으로 넘어 들어왔다. 미국와 서유럽 국가들은 파키스탄이 테러집단에 대해 보다 단호하고 서방과 관계를 개선하기를 원했다. 파키스탄의 식자층은 무샤라프 정부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과격 세력을 차단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무샤라프는 어느 누구의 기대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파키스탄 정보국(ISI)는 무샤라프에게 탈레반이 2002년 봄까지 미군에 저항할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탈레반은 6주만에 패퇴했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의 접경지대인 발로치스탄에는 탈레반 무장세력이 대거 잠입해서 무정부 상태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2002년 1월, 월스트리트 저널의 다니엘 펄 기자가 카라치에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곳곳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그 해 4월 한 달 동안 카라치에서 수십 명의 의사 교사 공무원 등이 괴한에게 연이어 피살되었다.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소수의 기독교인들도 테러의 표적이 됐다. 무샤라프 정부는 테러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보다는 뒷거래를 통해 타협을 하려고 했다. 미국은 대규모 군사원조로 무샤라프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극단적 세력은 무샤라프를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등 혼란은 가중되어만 갔다.
아프가니스탄 국가재건 실패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하고자 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미국 정보당국과 국무부 대외지원처(USAID) 직원들 중 현지 언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적으로 아프간 통역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아프간 통역들은 탈레반 테러리스트의 손쉬운 타깃이 됐다. 오랜 내란과 전쟁을 아프가니스탄의 사회기반은 완전히 붕괴되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2002년 3월, 유니세프와 USAID의 노력으로 실로 오랜만에 학교가 아프가니스탄 곳곳에서 문을 열었다. 180만 명이 등교할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첫날 300만 명이 등교했다. 더 놀라운 일은 학교에 나온 학생 중 45%가 여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2005년에는 520만 명이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2003년-05년간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였던 잘메이 칼릴자드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위한 노력에 힘을 실어 주었다. 2003년에는 아프간 국방군이 창설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자르카이 대통령은 각지의 군벌들과 힘겨루기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빠져들어감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줄어 들었고, 이 틈을 타서 탈레반이 다시 세력을 확장했다.
돌아온 탈레반
2001-2002년 겨울에 탈레반 전사(戰士)들은 미군의 공습과 북부 동맹군의 공격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의 발로치스탄 지역으로 대거 몰려왔다. 이들은 결코 몰래 국경을 넘어 오지 않았다. 트럭, 버스, 낙타 등을 타고 무장을 한 채로 국경을 지키는 파키스탄 군대와 정보국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무리를 지어 넘어 왔다. 발로치스탄에 가족과 친지를 두고 있던 탈레반들은 이들의 집에서 따듯한 환영을 받았고,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마을 유지들이 마련한 숙소에 찾아 들었다. 이곳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였고, 단지 그 미래가 올 때까지 이들을 숨겨 두고자 했다.
파키스탄 군부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미군은 소수의 CIA와 특수부대 요원을 보내는데 그쳤고 지상전투는 북부 동맹군에 맡겼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토라 보라에 지상군 병력 1000명을 투입하자는 현지 지휘관의 요청마저 거부했다. 이를 본 파키스탄 정보국은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서 곧 철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탈레반의 수장 오마르는 2002년 겨울에 파키스탄의 케타에 도착했고, 파키스탄 정보국은 그를 안전가옥에 보호했다. 파키스탄 정보국은 미국 특수부대가 추적하던 탈레반 지휘관들을 은밀하게 도피시키는데 성공했는데, 이들도 오마르와 합류하게 되었다. 2003년 들어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헬만드와 자불 지역에서 테러를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을 돕던 기술자와 적십자사 직원, 그리고 미군 특수부대원 2명이 탈레반에 의해 살해됐다. 파키스탄의 케타에선 탈레반이 자동차 등 물자를 사들여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2004년 가을로 예정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군은 특수부대를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투입해서 빈라덴을 잡으려 했다. 2004년 5월, 자발에서 미 특수부대는 500-800 명으로 추정되는 탈레반에 포위되어 4명이 전사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미군은 최대의 인명손실을 입은 것이고, 탈레반이 건재함이 확인된 것이다. 2004년 10월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카르자이는 유효투표의 55%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
파키스탄 서남부에 위치한 발로치스탄 지역의 북쪽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지역은 파키스탄 중앙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Federally Administered Tribal Areas : FATA)이다. FATA는 7개 부족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데, 정작 이들 부족의 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하다. 이 지역에 스며든 빈라덴은 거기서 런던과 마드리드 등에서 일어난 테러를 지휘했다. FATA는 일종의 주인이 없는 지역이다. 그곳에 사는 부족민들은 참정권이 없고 법원에 제소할 자격도 없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 지역에 외국인이나 국제기구의 접근을 금지하고 있다.
FATA에는 명확한 국경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사는 부족민들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생활하고 있다. 탈레반과 알케이다가 활동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인 것이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에 대해 이 지역의 탈레반과 알케이다를 공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2004년 3월 파키스탄 정부는 국경사단을 동원해서 공격했지만 오히려 포위를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많은 부족 지도자들이 탈레반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곳에 주둔하는 파키스탄 군대는 기지에 숨어 지내는 수밖에 없었으니, FATA는 탈레반의 성역(聖域)이 된 것이다.
인권의 사각지대
9-11 후 미국 법무부는 알케이다와 탈레반이 제네바 협정이 적용되는 포로가 아니라는 방침을 정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진출한 CIA와 미 특수부대는 이러한 지침에 따라 수행했다. 미국의 이러한 방침은 북부 동맹군 뿐 아니라 파키스탄 군부도 아프간 전쟁에서 가학행위를 하도록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탈레반 포로가 미군의 관리하는 시설에서 죽는 일이 발생했고, 미군과 같이 운영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시설에서는 그런 일이 더욱 흔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파키스탄 보안군은 국경지대에서 무차별한 체포와 구금을 자행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이러한 가학행위는 관타나모 기지에서 벌어졌던 상황보다 더 심한 것이었으나 외부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마약과 반군(叛軍)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지역에선 1980년대 후반부터 아편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소련 점령군과 게릴라 전투를 벌이는 무자헤딘은 아편을 재배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전쟁 비용을 조달했으며, CIA와 파키스탄 정보국은 이를 묵인했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지자 무자헤딘은 아편을 재배해서 헤로인을 제조해서 전쟁비용을 조달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은 아부다비와 두바이 등 중동지역을 통해 마피아에게 헤로인을 공급했다. 1997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한 아편은 무려 2,800톤에 달했다.
미국와 유엔은 탈레반에 대해 그들이 아편 생산을 중단하면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2001년에 탈레반은 갑자기 아편 재배를 금지했는데, 몇 년 동안 아편을 너무 많이 생산해서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었다. 달리 다른 작물을 재배할 방도가 없는 농민들은 탈레반의 이런 조치에 저항했다. 미군의 공격으로 탈레반이 붕괴하자 농민들은 다시 아편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북부 동맹군의 군벌들도 마약을 제조했기 때문에 미군도 이를 묵인하는 수 밖에 없었다.
2004년에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4,200톤에 달하는 아편이 생산되는 기록을 세웠다. 생산된 아편의 80%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헤로인으로 제조되어 밀수출되었는데, 이러한 마약 경제는 그 해에 28억 달러에 달해서 아프가니스탄 전체 경제의 60%를 차지했다. 아편 생산은 계속 증가해서 2006년에는 6,100톤, 2007년에는 8,200톤을 생산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은 전세계에 공급되는 헤로인의 93%를 차지하고 있다. 마약 생산으로 부(富)를 축적한 세력은 건설회사를 세워서 자금을 세탁하고 다른 분야로 사업을 늘려가고 있다. 아프간 의회의 의원의 상당수가 마약사업자이거나 이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고, 카르자이 대통령은 이런 현상을 개선시키지 못하고 있다.
나토의 실패와 탈레반의 공세
2001년 12월, 독일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회의를 본에서 열었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국제안보지원군(ISAF : 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을 창설해서 카불에 주둔시키기로 하고 나토(NATO)가 이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독일 등 나토 회원국들이 제때에 병력을 파견하지 못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라크에서 발목을 잡힌 미국은 나토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다 큰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미국은 2005년 말에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19,000명 병력에서 3,000명을 철수시켰다. 그 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미군의 절반은 나토-ISAF 통합사령부의 지휘를 받고 나머지 절반은 미국의 독자적 지휘를 받도록 되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치안을 나토에 맡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각국에서 차출되어 온 나토군은 훈련과 장비가 열악했고, 실전 경험이 없었다. 영국군과 캐나다 군대 만이 제대로 전투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 온 군대는 놀란 토끼마냥 겁에 질려 있어서 아프가니스탄 현지민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독일 군대는 가장 괴상한 모습을 연출해서 화제가 됐다. 독일은 마자르-이-샤리프에 1,500명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병력을 보호하기 위해 7000만 달러를 들여서 철과 시멘트 콩크리트로 된 철옹성 같은 기지를 건설하고 병력은 주로 그 안에 쳐 박혀 있었다. 탈레반은 이런 나토군을 우습게 보고 공격했다.
이렇게 나토 군이 기지 속에서 머물고 있자 탈레반은 아프간 군대와 경찰을 마음 놓고 공격했다. 2006년 5월부터 2007년 5월에 이르는 한 해 동안 아프간 군 170명과 아프간 경찰 406명이 탈레반에 의해 살해됐다. 탈레반은 고아나 정신적으로 불안한 소년들을 동원해서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했고, 아프간 정부는 이에 속수무책이었다. 알케이다는 세계 각지로부터 반군(叛軍) 전사를 불러 모아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출몰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자국내의 케타 시에 있는 탈레반 지휘부에 대해 모르는 체했고, 별다른 방도가 없는 미국도 날로 심각해 지는 아프간 사태를 애써 외면했다.
혼란에 빠진 파키스탄
2007년 12월 27일, 8년간의 해외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서 정열적으로 선거유세를 벌이던 베나지르 부토 여사가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귀국 한 지 두 달 만에 그녀를 노린 두 번째 테러로 사망한 것이다. 미국은 은밀하게 부토와 무샤라프가 협력해서 파키스탄의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나, 그녀의 운명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2007년 한해에 파키스탄에는 56회의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서 400명 이상의 보안군이 사망하는 등 치안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은 이제 무샤라프 정부를 직접 위협했고, 무샤라프 정부의 부패에 항의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무샤라프는 민주화를 주장하는 초드리 대법원장을 오히려 부패혐의로 기소해서 법조인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2007년 11월 3일, 무샤라프는 사실상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법관들을 축출하기 위해 모든 법관들로 하여금 선서를 다시 하도록 요구했다. 2008년 1월에 열린 총선에서 부토 여사가 이끌던 파키스탄 인민당(PPP)이 제1당을 차지했다. 무샤라프의 독재에 적신호가 켜 진 것이다. 무샤라프는 2008년 8월에 사임했다.
아프가니스탄의 불안한 미래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할 뿐이다. 카르자이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는 제 구실을 못하고 있고, 나토군 역시 그러하다. 전사자가 나올까 두려운 나토군은 지상작전을 꺼리고 공습에 의존하다 보니 민간인 피해가 많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아프간 주민들이 탈레반에 동조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전사자를 낸 캐나다는 철군하라는 여론의 압력을 받고 있다.
오늘날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뿐 아니라 파키스탄에도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탈레반의 수장 오마르와 그 측근들은 파키스탄의 발로치스탄 지역에 있으며, 다른 탈레반 세력은 보다 북쪽의 FATA에 거점을 장악했다. 알케이다는 FATA를 기지로 삼아 테러를 계속하고 있다. 미국과 나토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막대한 돈을 쓰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지만 이 지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 책의 표지는 첨부를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지도 등 참고자료가 갤러리의 자료사진에 있습니다.)
© 이상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