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로메시 라트니사르, 이 장벽을 허무시오 (계속)
2014-05-04 14:58 2,503 이상돈


로메시 라트니사르, 이 장벽을 허무시오 (2009년, 사이먼 앤드 슈스터, 229쪽, 27달러) (계속)

Romesh Ratnesar, Tear Down This Wall (2009, Simon & Schuster, 229 pages, $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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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1987년 6월 12일

6월 12일, 레이건 부부는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났다. 그 시간에 기자단 300명은 이미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9시 30분, 레이건은 숙소를 떠나서 보트를 타고 부근의 헬기장에 도착했다. 해병대 1호 헬기를 탄 레이건 부부는 14분 후 공항에 도착했고, 10시 23분 공군 1호 전용기는 베를린을 향해 이륙했다. 비행기 속에서 레이건은 브런치를 먹고, 그 날 하게 되어 있는 두 개의 연설문을 훑어 보았다. 하나는 브란데브르크 문에서 할 연설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를린 공수작전을 기념해서 템펠호프 공항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할 연설이었다.

레이건은 브란덴브루크 문 연설문을 읽어 보면서 만년필로 강조할 부분과 띠어서 읽을 부분 등을 표시했다. 레이건은 독일어로 되어 있는 부분은 괄호로 처리했다. 이렇게 해서 “고르바쵸프 서기장, 만일에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소련과 동유럽에 번영을 원한다면, 당신이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곳 문으로 오시요, 고르바쵸프 씨, 이 문을 여시오. 고르바쵸프 씨,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문장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몇몇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부분이 너무 강하다고 빼는 것이 어떠냐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했으나 레이건은 이를 거부했다.

백악관은 전날 레이건의 연설문을 대통령을 수행하는 기자들에게 엠바고 조건으로 사전에 배포했다. 그러나 워싱턴 타임스가 엠바고를 깨고 금요일 조간에 연설문 내용을 게재했다. 이 소식을 들은 UPI의 헬렌 토머스 기자가 미리 써둔 기사를 송고했고, 워싱턴 포스트가 토머스의 기사를 받아서 전재했다. 서 베를린 시장 에버하르트 디프겐은 연설문 내용을 알고 나서 독일 주재 미국 대사에 전화를 걸어서 레이건의 연설이 동독을 자극한다고 항의했다.

11시 42분 템펠호프 공항에 레이건이 도착했고 오후 1시에 베를린 제국의회 건물에 도착했다.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레이건을 영접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행사장에 도착한 콜 총리는 동독 정부가 모든 대화를 도청할 것이라고 레이건에게 말했는데, 레이건은 이 말에 대해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6월 12일 브란덴브루크 문 행사에 과연 얼마나 많은 군중이 모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존 콘블럼은 4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고 썼다. 반면 서 베를린 경찰은 약 2만 명이 참가했다고 평가했다. 앞 부분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레이건은 제국의회 건물에서 베를린 장벽을 내려다 본 후에 리무진을 타고 3분 만에 브란덴브르크 문 앞에 도착했다. 장벽 건너편 동 베를린에는 레이건의 연설을 엿들으려는 동독인 약 500명이 모여 있었는데, 이 들 중 절반은 스타시 요원들이었다. 동독 당국이 접근선을 장벽에서 멀리 쳐 놓아서 레이건의 연설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서독 시장 에브하르트 게프겐 서 베를린 시장이 먼저 인사말과 소개를 하고, 다음에 헬무트 콜 총리가 연단에 올랐다. 콜은 “베를린의 분단은 결코 용인할 수 없다”면서 “장벽과 장애물, 그리고 사살명령은 독일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다”고 말했다. 콜의 연설이 끝나자 레이건이 연단에 올라왔다. 열렬한 박수가 나왔으니 곧 조용해 졌다.

레이건은 “24년 전에 존 F. 케네디가 베를린을 방문했다”고 화두를 열었다. 그리고는 “나는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항상 베를린에 여행가방을 두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왔다”고 하자 폭소가 터졌다. 레이건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내 뒤에는 장벽이 있습니다. 이 장벽은 이 도시의 자유지대를 포위하고 있는데, 이는 유럽대륙 전체를 갈라 놓은 거대한 시스템입니다”고 했다. 그리고는 마셜 플랜과 서 베를린의 발전 등을 언급한 후에 “우리는 모스크바로부터 개혁과 개방이란 새 정책을 많이 듣고 있다”고 했다. 레이건은 소련이 진정으로 평화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이것을 입증할 방법이 있다면서, “고르바쵸프 서기장, 만일에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소련과 동유럽에 번영을 원한다면, 당신이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곳 문으로 오시요”라고 했다. 그리고 높은 데를 바라보면서 숨을 고른 후에 “고르바쵸프 씨, 이 문을 여시오”라고 힘있게 외치듯 말했다. 그러자 20초 동안 청중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잠시 쉰 후에 레이건은 “고르바쵸프 씨”하고 말을 끊었다. 청중은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르바쵸프 씨, 이 장벽을 부수시오!” 청중은 일어서서 다시 한번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 연설문을 기초한 피터 로빈슨은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의 아파트에서 TV를 통해 지켜 보았다. 그는 나중에 “레이건이 연설을 하면 원래 작성한 것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전달이 된다”고 술회했다. ‘장벽을 부수시오’라는 표현에 반대했던 하워드 베이커 비서실장도 연설을 실제로 들어 보고 나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 당시 레이건의 옆에 앉아있던 서독 대통령 리차드 본 바이체커는 레이건이 “문장 한 개로 문제의 본질을 장악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서독의 보수성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는 “레이건의 말이 동독과 다른 공산국가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1면에 사진을 실었지만 연설 내용은 속지로 보내 버렸다. 3대 네트워크 TV는 레이건의 연설을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NBC의 크리스 월러스는 이 연설이 “1963년을 연상시킨다면서, 오늘날 미-소 관계는 한층 복잡하다”고 논평했다. 헨리 키신저는 ABC와이 인터뷰에서 “이 연설을 매우 효과적이었다. 소련은 약간 유연해 질 수는 있지만 장벽을 허물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을 끝낸 후 레이건은 템펠호프 공항을 방문해서 미군 장병들과 함께 베를린 시 750주년 기념 파티를 즐겼다. 베를린을 출발하기 전에 레이건은 마가릿 대처 영국 총리와 3분간 통화를 했다. 레이건은 총선에서 또 다시 승리한 대처에게 축하인사를 했고, 대처는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후에 레이건과 수행원들은 본을 방문했고, 레이건과 콜 총리는 공항 귀빈실에서 담소를 했다. 저녁에 레이건은 공군 1호기에 올랐고, 밤 10시에 앤드류 공군기지에 도착했고, 헬기 편으로 백악관에 도착했다.

레이건과 고르바쵸프

워싱턴으로 돌아 온 레이건은 집무실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자신의 유럽 방문 성과를 설명하고, 중거리 핵 미사일을 유럽에서 철수하고 단거리 핵 미사일을 전세계에서 없애는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하면서, 자신은 고르바쵸프가 세계를 향해 개방하는 신호로 장벽을 허물도록 촉구했다고 말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크렘린이 동독 정부에 대해 베를린 장벽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음을 도청을 통해 확인했다. 레이건은 고르바쵸프가 워싱턴을 방문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고르바쵸프는 자신은 단지 미소 양국이 장거리 미사일을 감축하고 스타워스 미사일 방어체제 개발을 취소하는 경우에만 워싱턴을 방문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는 양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을 워싱턴으로 보내서 사정거리 500 Km에서 5,500 Km에 이르는 모든 미사일을 철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번에는 스타워스 방어체제에 대해 고르바쵸프는 아무런 조건을 내지 않았다. 세바르드나제를 만난 레이건은 고르바쵸프가 12월 7일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다.

고르바쵸프, 워싱턴을 방문하다

1987년 12월 7일, 고르바쵸프는 워싱턴에 도착했다. 앤드류 공항에서 슐츠 장관이 고르바쵸프를 영접했다. 워싱턴 시민들은 고르바쵸프의 방문을 환영했다. 12월 8일 오전, 고르바쵸프는 백악관에 도착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두 사람은 통역만 대동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이건이 소련의 인권침해를 비판하자 고르바쵸프는 소련시민이 미국인 보다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점심 후에 두 사람은 이스트 룸으로 가서 중거리 미사일 협정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합의를 이루어 냈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른 사람임을 확인했다, 고르바쵸프는 상세한 문제를 다루고 싶어 했다. 반면 레이건은 기술적인 사항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회담 내내 농담을 해서 고르바쵸프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레이건은 이런 조크도 했다. 미국인이 소련에 가기 위해 공항을 가면서 젊은 택시 기사에게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나?”고 물었더니 “나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모스코바 공황에 내려서 택시 기사에 같은 질문을 했더니 “그들은 아직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고 답했다고 조크를 했다. 고르바쵸프는 이런 조크에 흥미가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알아챈 슐츠 국무장관과 베이커 비서실장이 레이건 대통령을 밀어 내고 고르바쵸프와 상세한 부분에 대한 회담을 했다.
 
다음 날 레이건은 보다 집중력을 발휘해서 두 사람이 모스크바에서 만날 때 전략무기 협정에 서명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면서 레이건은 고르바쵸프에게 아프가니스탄에 소련이 철군을 할 것과 베를린 장벽을 과감하게 허물라고 말했다. 고르바쵸프는 직접적인 답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르바쵸프는 “당신은 검찰관이 아니고 내가 재판을 받으러 온 것도 아니다”고 불편한 심기를 피력했다. 마지막 날에 레이건은 고르바쵸프에게 다시 미국을 방문하라고 말하면서, “캘리포니아를 보기 전에는 미국을 본 것이 아니다”고 했다.

워싱턴 방문은 고르바쵸프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워싱턴 시민들이 자기를 환영해 준 데 대해 놀랐다. 그는 미국이 소련과 전쟁을 할 의도가 없다고 했던 레이건의 말이 진심임을 비로서 깨달았다. 고르바쵸프는 크렘린의 동료들에게 서방의 위협에 대한 조치를 완화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레이건은 임기의 마지막 한 해를 조용히 보내고 있었다. 그가 참모들과 회의를 할 때 자주 졸며, 기억력이 감소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고르바쵸프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인한 지지도 하락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여론은 레이건이 이루어 낸 핵무기 폐기 협정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아직도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설득해야만 했다. 헨리 키신저는 뉴스위크지에 쓴 기고문에서 “중거리 미사일 협정이 유럽에서 세력균형을 소련에 유리하게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레이건은 자신의 지지자에게 쓴 편지에서 “키신저는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해요. 핵 전쟁을 승리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핵 전쟁을 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라고 했다.

레이건, 모스코바를 방문하다

1988년 들어서자 공화당은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 몰입했고, 백악관은 중거리 미사일 협정의 상원 비준과 레이건의 모스코바 방문에 집중했다. 5월로 예정된 레이건의  모스크바 방문시에 연설문은 원래는 사회주의자였던 조시 길드가 쓰도록 결정됐다. 그 해 5월 27일, 상원은 중거리 미사일 협정을 93대 5로 비준했다. 이틀 후 레이건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백악관 참모들은 레이건의 일정을 주도면밀하게 짰다. 레이건은 고르바쵸프와의 회담 사이사이에 러시아 정교 수도원과 교회를 방문하고 소련내 반정부 운동가들과의 만남도 주선했다. 레이건과 낸시는 모스코바 시내 거리를 산책하자 수많은 군중이 이들을 보기 위해 모여 들었고 소련 경찰은 군중을 제압해야만 했다.

모스코바에 머물던 4일 동안 레이건과 고르바쵸프는 여러 번 만났다. 5월 31일 아침에는 레이건과 고르바쵸프는 함께 레드 스퀘어를 거닐었다. 관광객들이 모여 들어서 사진을 찍고 이들과 대화를 했다. 이런 모습은 백악관 참모들에 의해 준비된 것이었다. 그 때 ABC 방송의 샘 도널슨 기자가 레이건에게 “당신은 아직도 당신이 악(惡)의 제국에 있다고 생각합니까?”하고 물었다. 레이건은 “아니에요”라고 답했다. 옆에는 고르바쵸프가 이런 대화를 듣고 있었다.

5월 31일 오후, 레이건은 모스코바 대학에서 연설을 했다. 소련 당국은 학생 등 사전에 선출해 놓은 청중을 준비시켰다. 에어컨이 되어 있지 않은 무더운 강당에 들어선 레이건은 사전에 준비된 연설문을 읽었다. 조시 길더가 작성한 연설문 초안의 내용을 완화시키려는 국무부의 노력은 실패했다. 레이건은 컴퓨터 칩이 갖고 있는 힘과 자유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자유시장의 지속적인 혁신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레이건은 강당에 모인 젊은 청중에게 “당신들은 소련 역사상 가장 격동적이고 희망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다. 연설이 끝나자 학생들은 일어서서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레이건과 고르바쵸프는 볼쇼이 발레를 보는 등 사교 모임을 가진 후 방문을 마무리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도 간극이 있었다. 레이건은 고르바쵸프에게 자신은 ‘평화적 공존’(‘peaceful coexistence’)이란 용어에 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용어는 데땅트 냄새가 나며 미국내 보수파들이 질색을 하는 ‘순응’(‘accommodation’)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르바쵸프는 모스코바에서는 더 이상 실질적인 합의를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모스크바 회담에서 워싱턴으로 돌아 온 레이건은 공식회의와 의례적 행사로 가득 찬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1988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레이건은 공화당 후보로 나선 조지 H. W. 부시 부통령을 위해서 공화당 모금 행사에 참석하곤 했다. 선거 전 날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롱비치와 샌디에이고에 가서 부시와 함께 대중모임에 참석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부시가 패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대선에서 부시는 캘리포니아에서 3% 승리해서 간신히 캘리포니아 선거인단 표를 장악할 수 있었다. 부시는 선거인단 표 426를 얻어서 111표를 얻은 민주당 후보 두카키스를 물리쳤다. 하지만 그 후 대선에서 공화당은 캘리포니아에서 다시는 승리하지 못했다.

레이건은 고르바쵸프에게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가르쳤지만, 고르바쵸프는 소련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르바쵸프는 그러기 위해선 사회주의를 수출하려는 정책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고르바쵸프는 1989년 초까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한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1988년 12월 7일, 고르바쵸프는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고, 레이건과 차기 대통령 부시를 만났다. 이처럼 레이건과 고르바쵸프 사이의 관계는 냉전 시절의 지도자간의 관계로서는 가장 돈독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훗날 고르바쵸프는 “레이건이야말로 통찰력이 있으며 건전한 판단력과 용기를 가졌던 지도자”라고 평했다.

장벽이 무너지다

1989년 1월 레이건은 퇴임했고 부시 행정부가 들어섰다. 마가릿 대처 영국 총리는 “냉전이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서 부시 행정부의 안보 정책담당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시 백악관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안보보좌관은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했고, 딕 체니 국방장관은 “일시적 일 수 있는 현상에 국가안보를 걸 수는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냉전은 복합적 원인으로 인해 막을 내리고 있었다.
 
변화의 시작은 폴란드에서였다. 자유노조가 이끄는 반정부 운동을 계엄령으로 탄압해 온 폴란드 정부는 고르바쵸프가 무력 진압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자 기댈 곳으로 잃어 버렸다. 1989년 4월 폴란드 정부는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와 협상해서 자유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했다. 두 달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공산당은 당선자가 불분명한 지역구 한 곳을 제외하고 전 지역구에서 패배했다.

바르샤바 조약국 중에서 가장 개방적인 헝가리에서는 30년간 독재를 해 온 카다르가 사임했다. 새로운 당 지도부는 표현의 자유를 회복하고 반대 정당을 용인하겠다고 발표했다. 1989년 5월, 헝가리 정부는 동독과 국경에 설치했던 전기철조망을 철거했다. 그러자 동독인 수천 명이 헝가리로 밀려 들어왔고 일부는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갔다.

새로 들어선 부시 행정부는 이런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백악관 안보담당자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고르바쵸프와의 관계에서 너무 지나치게 나아갔다고 생각하면서, 소련과 동유럽이 정말 변하는지를 지켜 보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부시 대통령은 자기가 강경한 인물로 비쳐지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던 중 4월과 5월에 진짜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은 소련이 동유럽의 자유화 흐름에 개입하면 그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해 5월 부시는 나토 정상회담에 참석하러 유럽을 방문하던 중 독일 마인츠에서 연설을 했다. 그 때 부시는 “동과 서의 분단이 가장 극명한 곳은 베를린입니다. 이 잔인한 장벽이 이웃을 그리고 형제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 - 장벽은 허물어 져야 합니다.”고 하면서, 헝가리와 서방과 장벽이 없어진 것을 들고 “다음은 베를린이 될 것입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베를린은 레이건이 방문한 후 2년 동안 변한 것이 없었다. 1989년 2월에는 동 베를린을 탈출하려던 21살 난 젊은이를 사살했다. 2개월 후 동독 당국은 비밀리에 동독 탈출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거두어 드렸다. 그러나 동과 서를 가르는 철조망과 장벽은 그대로였다. 동독 총리 호네커는 반대자를 탄압했지만 전과 달리 반대자들의 시위와 집회는 더욱 기세를 얻어갔다. 고르바쵸프도 동독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동독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동독을 구하러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중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소재한 서독 대사관에 동독인 1만 명이 몰려 들어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동독 정부는 결국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에 몰려가 있는 자국민들을 ‘추방’하겠다고 발표했다. 호네커는 이들을 창문이 없는 열차에 태워서 서독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이들을 실은 열차가 동독 지방을 지나자 동독 주민들이 찻길에 나와서 환호성을 질렀고 일부는 열차 위에 올라타려고 했다.
 
9월까지 동독인 6만 명이 헝가리로 탈출했다. 고르바쵸프는 헝가리 정부에게 기들이 원한다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해도 좋다고 말했다.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한다고 발표하자 72시간 내에 동독인 22,000명이 서방으로 탈출했다. 그러자 동독인 수만 명이 또 다시 헝가리로 향했다. 몇 주일 후에 고르바쵸프는 동 베를린을 방문했다. 동독인들은 “고르바쵸프, 우리를 구해 주시요”하고 외쳤다. 고르바쵸프는 호네커에게 “미루지 말라. - - 용기있는 결정이 필요하다”고 최후 통첩을 한 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10월 18일, 동독 정치국은 호네커를 축출하고 에곤 크렌츠를 후임으로 선출했다. 크렌츠는 모스크바로 고르바쵸프를 만나서 외채를 탕감해 줄 것과 더 이상의 사태 발전을 막기 위한 조치를 호소했다. 고르바쵸프는 소련 군대는 동독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3일 후 50만 명의 시위군중이 동 베를린 거리에 쏟아져 나와서 자유선거를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국경을 개방하자 동독인 3만 명이 48시간 내에 서방으로 탈출했다. 11월 9일, 동독 정부 대변인 퀸터 샤보우스키가 동독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여행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기자가 언제부터 새 규정이 효력을 발휘하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아는 한, 당장 효력을 발휘했다”고 답했다. 한 시간 후 AP 통신은 “동독 정부가 국경을 개방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이어서 서독 국영방송이 “장벽의 문이 열렸다”고 긴급하게 보도했다. 그 날 밤 11시 30분 동 베를린에서 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보른 홀머 체크 포인트에 사람들이 밀려 들었고, 동독 국경관리들은 이들을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그대로 국경을 개방했다. 12시에는 모든 체크 포인트가 개방되었고, 그날 밤에만 5만 명이 국경을 넘었고 이어서 수십 만 명이 국경을 넘었다.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 베를린으로 넘어 온다는 보고를 스코크라프트로부터 받았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의 동유럽 담당관이었던 콘돌리사 라이스는 부시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라이스도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들은 CNN 뉴스를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말린 프리츠워터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에게 성명을 발표하자고 건의했지만 부시는 거부했다. 부시는 소련을 자극하고 고르바쵸프를 당혹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CBS 방송기자가 부시 대통령에게 “왜 그렇게 조용하느냐?”고 묻자 부시는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야”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곧 “나는 기쁘다”고 말했다.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워싱턴을 방문 중인 코라손 아퀴노 필리핀 대통령을 환영하는 오찬을 하고 있었는데 급히 전해 진 메모를 보고서 삼페인 건배를 들었다.

다음 날 부시는 콜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콜은 “베를린은 축제 분위기다”고 말했다. 콜은 고르바쵸프에도 전화를 걸었다. 고르바쵸프는 “우리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역사적 순간에 서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이 역사적 순간을 환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동독 드레스덴의 KGB 지부에선 블라디미르 푸틴과 그의 동료들이 기밀문서를 화로 속에 넣어 태우고 있었다. 시위대가 KGB 건물을 둘러싸고 위협하자 푸틴은 인근의 소련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푸틴은 소련이 사실상 항복하게 된 데 매우 놀랐다.

1990년 고르바쵸프는 노벨상을 받았고, 타임지는 그를 1980년대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의 인기는 본국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경제개혁이 성과가 없었다. 1990년 5월, 통일된 독일이 나토에 가입함에 따라 냉전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하지만 이 결과를 모스크바의 강경파들은 받아 드릴 수 없었다. 1991년 8월 강경파가 주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나서 고르바쵸프를 3일간 감금했다. 그는 곧 풀려 났지만 그의 정치적 우상은 추락했다.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엘친은 소련의 해체를 주장했고, 결국 소련은 해체의 길을 갔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쵸프는 소련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은퇴 후 레이건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 진 후 레이건의 전기를 준비하던 루 캐논은 캘리포니아 센트리 시티에 있는 레이건의 사무실에서 레이건을 만났다. 캐논은 레이건에게 “당신은 이런 일이 일어 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까?”하고 물었다. 레이건은 “언젠가는”라고 답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레이건의 브란덴브르크 문 연설은 다시 각광을 받았다. 11월 9일에 장벽이 무너지자 미국의 3대 네트워크 TV는 레이건의 연설을 다시 방송했다. 샘 도널슨은 센트리 시티에서 레이건을 인터뷰하면서 “고르바쵸프에게 장벽을 허물라고 연설하면서 당신은 그런 때가 곧 올 것으로 생각했나요?” 하고 물었다. 레이건은 “그런 때가 언제 올지는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낙관주의자에요, 나는 그런 날이 미래에 올 것으로 믿었어요.” 하고 답했다. 1990년 9월, 레이건 부부는 모스크바로 고르바쵸프를 만나러 가는 길에 베를린을 들렀다. 레이건은 베를린 장벽이 있던 곳을 가서 콘크리트를 햄머로 부수는 장면을 연출했다. 

냉전 종식과 더불어 세계는 20년에 걸친 경제성장을 지속했으며, 전세계적으로 민주국가의 숫자가 그 후 20년 동안 배로 증가했다.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레이건이 냉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임스 만이 지적하듯이, 레이건이 고르바쵸프에게 정책을 변화할 수 있는 여유를 터주었기 때문에 고르바쵸프는 스스로 포기할 수 있었다. 진보성향 역사학자 숀 윌렌즈는 레이건이 냉전을 종식하는데 기여한 부분은 1945년 이래 미국 대통령이 성취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레이건 시절에 국무장관을 지낸 조지 슐츠는 “소련이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레이건은 그런 통념에 도전을 했다. 레이건은 소련이 부패하고 부도덕하며, 경제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순간도 바꾸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후

브란덴브르크 문 연설을 기초한 피터 로빈슨은 1988년에 백악관을 나온 후 스탠포드 비즈니스 스쿨을 다녔고, 그 후 뉴스 코포레이션과 증권거래위원회에서 일을 했다. 1997년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새로 독일주재 미국 대사가 된 존 콘블럼에 관한 독일 신문 기사를 읽었다. 독일 신문은 콘블럼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구절을 만들었다고 썼다. 로빈슨은 콘블럼이 실제로는 그 구절을 삭제하자고 주장했음을 기억하고, 이런 이야기를 부시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를 지내고 위클리 스탠다드지(誌)를 창설한 존 포드호레즈에게 전했다. 그러자 포드로헤즈는 그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로빈슨은 그런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고, 그 후 그는 이 유명한 구절을 만든 장본인으로 이름이 남았다.

레이건과 고르바쵸프는 1992년 여름에 레이건의 산타 바바라 랜치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고르바쵸프도 이미 권좌에서 물러난 후였다. 그 때부터 레이건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1994년 레이건은 알즈하이머 병을 진단받았다. 레이건은 미국민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를 공개해서 심금을 울렸다. 1995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낸시 여사와 레이건의 자식들은 레이건이 얼마 후 사망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의식불명 상태로 8년을 더 살고 2004년 6월 5일 사망했다. 워싱턴에서 열린 영결식장에는 고르바쵸프가 참석했다. 그의 부인 라이사는 암으로 1999년에 먼저 사망했고, 그는 러시아에서는 잊혀진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련을 해체한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워싱턴에서 고르바쵸프는 아직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는 레이건이 평화를 원했고, 가치와 전통을 수호했던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 c ) 이상돈


로메시 라트니사르, 이 장벽을 허무시오 (2009년) 
스티픈 카인저, 초승달과 별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