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존 디긴스, 로널드 레이건 (2007년)(계속)
2015-06-28 22:13 2,536 이상돈


존 디긴스, 로널드 레이건 (2007년) (계속)


암살 시도를 이겨내다

1981년 3월 30일, 레어건이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열린 노조 회합에서 연설을 하고 나와서 리무진을 타려 던 순간 6발의 총성이 울렸다. 경찰관과 경호원이 부상을 당했고 공보비서 제임스 브래디가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 처음에 레이건은 총을 맞지 않을 줄 알고 레이건을 태운 리무진은 백악관을 향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입에서 피를 흘렸고 리무진은 조지 워싱턴 대학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 의사들은 20분이나 걸려서 레이건의 몸에 난 총탄 구멍을 찾았다. 총탄은 리무진에 맞아서 납작해 진 후 튀겨 나가서 레이건의 몸 속 깊이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 온 낸시 여사는 창백해 진 레이건의 얼굴을 보고 놀랐고 레이건이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자 병원의 예배실에서 기도를 했다. 수술실에서 레이건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당신들이 모두 공화당원이면 좋겠다”고 조크를 했다.

레이건을 저격한 범인은 존 힝클리라는 25세난 젊은이였다. 그는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대통령을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레이건이 수술을 하는 동안 쾌유를 비는 촛불기도가 병원 밖에서 이루어 졌다. 수술에서 회복한 레이건이 병원 창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시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저격 사건은 레이건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낸시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낸시는 남편을 더욱 더 보호하려고 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점성가 조안 퀴글리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되었다.

레이건이 병원에 수술에 들어갈 때 부시 부통령은 텍사스를 방문 중이었다. 소식을 듣고 부시는 워싱턴으로 돌아 오기 전까지 누가 정부를 지휘해야 하는지는 모호했다. 이 때 헤이그 국무장관은 “부통령이 돌아 오기까지는 국무장관인 내가 백악관을 지휘한다”고 발언해서 구설수에 올랐다. 헤이그는 지휘 계통을 말한 것이지만 마치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레이건과 소련

1981년 4월, 레이건은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긴 서신을 보냈다. 레이건은 미국이 소련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레이건은 미국이 소련에 대한 곡물 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했음을 지적하고 양국이 ‘의미있고 건설적인 대화’ meaningful and constructive dialogue 를 하자고 제안했다. 1주일 후 브레즈네프는 냉랭한 답신을 보내왔다. 브레즈네프는 미국이 냉전을 시작했고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했다.

레이건은 미국이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문제를 다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레이건은 윌리엄 버클리가 펴내는 <내셔널 리뷰>와 주간 시사잡지인 <휴먼 이벤츠>를 즐겨 읽었다. 1979년에 레이건은 조지타운 대학의 정치학 교수 진 커크패트릭이 <코멘터리>에 기고한 논문 ‘독재와 2중 기준’을 흥미롭게 읽었다. 진 커크패트릭은 민주당원이었으나 카터의 진보적 정책에 환멸을 느꼈다. 커크패트릭은 “전통적인 독재는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침범하지는 않으나 공산주의는 위로부터 사회를 장악해서 문명사회와 인권이 존재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통적 독재정부는 변할 수 있으나 공산체제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커크패트릭을 유엔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레바논

197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카터 행정부는 소련군에 대항하는 부족 군벌들에 소규모 무기를 공급하는 등 지원에 나섰다. 레이건은 아프가니스탄을 냉전의 전장(戰場)으로 생각했다. 노먼 포드호레츠 같은 네오콘은 아프간 사태가 소련 제국주의 물결로 파악했다. 소련 지도자들은 아프간 부족들의 거센 저항에 놀랐다. 아프간 정규군 대위 출신인 이스마일 칸은 공산정권에 대항하는 지하드를 조직하고 소련군을 공격해서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은 아프간 사태를 신중하게 접근했다. CIA는 파키스탄 군부를 통해서 소련군에 대항하는 아프간 저항세력, 즉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레이건 정부의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는 미국과 사우디, 파키스탄, 아프간 저항군을 잇는 포위망을 구상했다. 케이시는 냉전이 협상 테이블에서 종식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자헤딘 지도자 중에선 북부에 기반을 둔 아메드 마수드가 가장 용맹스러운 군사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CIA는 사우디 명문가문 출신으로 무자헤딘을 지원하고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은 의심스럽게 보았다.

레이건 행정부는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스팅거 견착식 대공미사일을 공급하는 문제를 두고 고심을 했다. 개당 6만 달러인 스팅거 미사일은 소련군 헬기와 수송기, 심지어 대당 2천만 달러에 달하는 미그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스팅거 미사일이 테러 단체에 흘러 들어가서 민간 항공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1986년에 드디어 스팅거 미사일을 무자헤딘에게 공급하기 시작했고 소련군은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르바쵸프는 1985년에 서기장으로 지명됐을 때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기로 결심했었다. 1989년 초에 퇴임한 레이건은 자신이 지원한 아프간 저항군 세력이 극단적인 이슬람 교리를 신봉하는 집단인 줄을 알지 못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과 전쟁 중이던 이라크를 지지했다. 레이건의 특사로 이라크에 파견된 도널드 럼스펠드는 사담 후세인을 만나서 미국이 이라크를 지지함을 분명히 했다. 레이건은 리비아에 대해서 강경책을 동원했다. 레이건은 워싱턴의 리비아 대사관을 폐쇄하도록 명령했고 6함대로 하여금 리비아가 영해라고 주장하는 시드르 만(灣)을 초계하도록 했다. 1981년 1월, 리비아의 전투기가 리비아 해안에서 60마일 밖에서 정찰활동을 하는 미 해군 F-14 두 대를 공격하자 미군 조종사들은 리비아 전투기를 격추해 버렸다. 1986년에 리비아 테러 조직이 베를린의 디스코 텍을 폭파해서 휴가 중이던 미군 사병이 죽는 일이 발생했다. 레이건은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공격하는 명령을 내렸고 미군기의 공습으로 가다피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가디피는 간신히 피했으나 민간인 150명이 사망했다. 리비아에 대한 공격은 미국인들 사이에선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레이건은 미국이 이스라엘, 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와 함께 이 지역에 침투하려는 소련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었으나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중동의 수렁에 깊숙이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2년 8월, 레이건 행정부는 미군을 남부 레바논에 진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과 합참은 이에 반대했으나 레이건은 미군 파병을 주장하는 조지 슐츠 국무장관의 의견을 지지한 것이다. 1983년 10월 23일, 레바논에 주둔 중이던 미 해병대 숙소에 자살폭탄 공격이 발생해서 미 해병대원과 수병 24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레이건은 이 사태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낸시 여사와 함께 캠프 르준에서 열린 영결식에 참석했다. 레이건은 그 날이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슬펐던 날이라고 기록했다.

앙골라, 그러나다

레이건 행정부는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이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군대를 파견해서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첫 시험대는 앙골라였다. 앙골라에는 마르크스주의자 정부가 들어서 있었는데, 쿠바는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CIA의 주장을 받아 드려서 앙골라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시도하고 있는 유니타 세력에게 1500만 달러 상당의 지원을 보냈다. 앙골라 내전은 레이건 임기가 거의 끝날 무렵에 협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아프리카 여러 곳에 파견됐던 쿠바 군은 최대 5만 명까지 증가되었는데, 그 중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리브 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그러나다는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총리이던 모리스 비숍은 단순한 사회주의자였으니 부총리 버나드 코드는 레닌식 독재정권을 만들려고 했다. 1983년에 코드가 비숍을 체포하자 소요가 발생했고, 그러자 코드는 쿠바가 원조한 탱크 등으로 반대세력을 장악하고 비숍을 처형했다. 당시 그러나다에는 쿠바 기술자와 근로자들이 와 있었고, 또한 미국인 학생들이 현지 의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그러나다가 쿠바의 전진기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레이건은 그러나다 침공을 명령했다. 미군 함정과 지상군은 1983년 10월 25일 그러나다를 침공했다. 해군 실 특수부대, 해병대, 육군 레인저 부대 등 5000명 병력이 작은 섬나라를 침공했는데, 미군은 지휘와 통신에 혼란을 겪었고, 그러나다 군대와 쿠바 근로자들은 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틀 동안 미군 19명이 전사했고 11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쿠바인 24명과 현지인 67명이 사망했다.

레이건은 현지에서 공부하는 미국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고 말했지만 설득력이 부족했다. 레이건은 카리브 해에 또 다른 공산국가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취해진 그러나다 침공에 대해선 비판도 많았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과거에 영국 식민지이던 국가에 대해 미국이 사전양해도 없이 침공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팁 오닐 하원의장은 레이건이 레바논에서의 해병대원 참사를 덮기 위해 그러나다를 침공했다고 비난했다.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그러나다 침공은 미숙했지만 레이건의 지지도는 상승했다.

니카라과

1979년 니카라과를 통치해 오던 독재자 소머사가 사임하자 공산주의자 집단인 산디니스타가 정권을 장악했다. 레이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나카라과를 교두보로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터 행정부는 산디니스트 정부가 쿠바의 지원을 받는 것을 알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건은 산디니스트를 매우 위험한 공산주의자들로 파악했고,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유엔 주재 대사 진 커크패트릭은 공산독재는 개선이 가능한 우익 독재와 다르다면서, 카터 행정부의 묵인 정책을 비난했다.

엘살바도르에서도 좌익 게릴라와 우익 정권의 테러로 인해 내란과 같은 상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1980년에는 우익 집단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암살했고 미국인 수녀 4명을 살해했다. 1984년 선거에서 온건한 우파 지도자 호세 두아르떼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엘살바도르의 상황을 호전되기 시작했다. 니카라과에서는 1990년에야 우파 지도자 비올레타 차모로가 산디니스트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소련과의 군비축소 협상

1948년 소련군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 후로 미국 대통령은 동유럽의 이러한 비극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레이건은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소련에 대해 너그러웠던 루스벨트가 어리석었고 철의 장막을 알아차린 처칠이 현명했다고 믿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으나 고르바쵸프가 집권한 후에는 소련과 군축을 협상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동유럽 공산체제가 무너지자 네오콘들은 레이건이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고르바쵸프가 공산체제를 붕괴로부터 구하기 위해 군비축소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는 전략무기 확충을 밀고 나간 리차드 파이프스 같은 강경론자가 백악관에 포진하고 있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확장이 과잉대응이라고 생각했다. 레이건은 미국의 군사력이 강해야만 상대방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 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지 슐츠가 국무장관이 된 후에는 레이건은 네오콘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핵 공격이 있으면 대량보복을 당할 것임을 소련에 알림으로써 소련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다는 이론을 폐기했다. 레이건은 1983년 3월 23일, ‘스타워스’라고 불리는 미사일 방어체계에 대한 유명한 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던 1979년 여름, 콜로라도 주 샤이언에 있는 북미항공방위사령부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미국이 소련의 미사일에 대해 방어할 능력이 없다는 브리핑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레이건의 안보보좌관이던 리차드 앨런은 레이건의 미사일 방어체계 구상에 찬성했지만 과학자들은 물론이고 국방부도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란-콘트라 사건

레이건 행정부는 비밀리에 나카라과의 항구 밖에 기뢰를 부설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의회는 발끈했고, 결국 의회는 니카라과 반공 반군에 대한 지원을 금지시켰다. 이 즘 이라크와 힘든 전쟁을 하고 있던 이란 정부가 미국에 대해 다른 아랍 국가들을 설득해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켜 주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이에 레이건 정부는 이란 정부가 레바논에 억류되어 있는 미국인 인질이 석방되도록 도와 줄 것을 기대했다. 레이건 백악관은 또한 사우디의 거부 카쇼기를 통해 사우디 정부 자금 320억 달러를 니카라과 반공 반군에 전달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은 이란이 미국산 대전차 미사일 TOW를 구매하고 싶어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백악관은 극비리에 TOW 미사일은 이스라엘에 판매하고 이스라엘은 이렇게 입수한 TOW를 이란에 인도하고 이 거래에서 남은 이익을 니카라과 반공 반군에 전달하고 그러면 이란은 레바논에 억류되어 있는 미국인 인질을 석방하도록 압력을 넣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986년 11월에 이런 불법 거래가 미국언론에 의해 보도되었다.

이런 거래는 자체가 대외비밀 작전을 금지하는 볼랜드 수정법을 위반하는 것이기에 다음해 3월 4일, 레이건은 TV에 나가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면서 사과를 해야만 했다. 이란-콘트라 거래는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에서 극비로 추진했던 것이라서 이를 전혀 알지 못했던 슐츠 국무장관과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보도를 보고서 크게 분노했다. 이란과 비밀리에 무기거래가 이루어 지던 때에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던 로버트 맥팔레인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예비역 해병장교였는데, 그는 이런 거래가 불법임을 알고 만류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1985년 말에 사임했다. 나중에 의회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심문에 시달린 그는 나중에 술에 빠져 들었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의회 청문회에서 보다 당당하게 정부를 변호한 사람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근무하던 올리버 노스 해병중령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노스 중령은 법률을 위반한 데 대해 개의치 않는 듯이 발언했고, 레이건 대통령이 알고 있었을 것임을 암시하는 발언도 했다. 1994년에 노스가 공화당 후보로 버지니아에서 상원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 낸시 레이건은 노스에 부정적 의견을 내놓아서 노스가 근소한 표차로 패배하게 된다. 연방대배심은 올리버 노스, 맥팔레인의 후임으로 안보보좌관이 된 존 포인덱스터, 그리고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을 의회 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했고, 맥팔레인은 경미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이들은 모두 유예 판결을 받았고,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이란-콘트라 사건은 레이건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레이건은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를 알았을 것이며, 또한 이로 인해 레바논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인 인질들이 석방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노스 중령이 이란에 판매한 무기 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에게 지원한 것을 레이건이 알았다는 증거는 없었다. 레이건은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미국인 인질들을 구출해 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레이건의 정치적 감각

정치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에 일종의 연기와 같은 데,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비서실 차장이던 마이클 디버, 스피치 라이터이던 페기 누넌, 그리고 공보보좌관이던 데이비드 거겐이 레이건의 홍보를 책임졌다. 거겐은 레이건이 왜 대통령을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레이건은 “우리는 배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여기 왔다”고 말했다. 이들뿐 아니라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 등도 대통령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잘 알았다. 이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격전지인 뽕뒤옥, 그리고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레이건이 연설을 하도록 연출했다.

레이건은 푸른색 양복 보다는 브라운 색 양복을 즐겨 입었는데, 이는 중산층에 친근한 느낌을 주기 위함이었다. 레이건은 캘빈 쿨리지 대통령을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쿨리지는 언론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레이건도 마찬가지였다. 쿨리지는 미국이 대통령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던 대통령이었다. 레이건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레이건이 백악관을 캐주얼하게 운영하는 데 대해 놀라곤 했다. 레이건은 대통령은 골격만 정하고 나머지는 각료 등 자신의 지휘 하에 있는 사람들이 채워나가야 하고 대통령이 이들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레이건의 이 같은 정부 운영 방식은 대체로 성공적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레이건이 내무장관으로 임명한 제임스 와트는 실패작이었다. 환경운동을 적대시 했던 와트를 내무장관에 임명한 행위는 환경보호처와 시에라 클럽 같은 환경단체에는 조종(弔鐘)을 울린 격이었다. 레이건은 환경주의자들을 일종의 관료제라고 생각했다.  산타바버라의 야생자연을 사랑했던 레이건이 환경주의를 연방정부의 관료제와 동일시했는데, 연방정부가 자연을 보호해온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와트는 워싱턴 모뉴먼트 앞에서 비치 보이스가 공연을 하도록 허용해서 낸시 여사를 화나게 만들었고, 결국 레이건은 와트를 해임했다. 와트가 물러나자 화학회사 법률고문을 지내다가 환경보호처장이 된 앤 고석이 새로운 타깃이 되었고 결국에는 고석도 사임하고 환경보호처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레이건은 초대 환경보호처장을 지낸 윌리엄 러클샤우스를 다시 환경보호처장에 임명해서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흑인 등 소수인종에 대해서도 레이건은 자유와 선택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노동장관 윌리엄 브록은 소수인종 우대 정책을 지지했지만 교육장관 윌리엄 베넷은 이에 반대해서 보수단체의 지지를 받았다. 레이건은 예일 로스쿨을 나온 젊은 법률가 클라렌스 토머스를 교육부 민권담당 차관보에 임명하고 이어서 균등고용위원회 위원장으로 승진시켰다. 흑인 우대정책을 비판한 토머스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됐다. 레이건은 애리조나 주 출신으로 스탠포드 로스쿨을 나온 샌드라 오코너를 연방대법원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1987년에 레이건은 연방항소법원 판사로버트 보크를 대법관으로 지명했으나 민주당의 극렬한 반대 끝에 상원에서 인준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레이건은 더욱 보수적인 앤서니 스캘리아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는데 성공했고, 또한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관을 대법원장에 임명하는데 성공했다. 

1984년 대선

1984년 대선은 레이건의 1기 임기가 심판을 받은 선거였다. 1982년에서 83년에 걸쳐 미국은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었고 실업률은 10%를 넘었다. 베이루트에서 미 해병대원들이 무더기로 사망한 사건과 미국이 니카라과 내란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 등으로 레이건의 지지도는 35% 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다에서의 성공이 그나마 레이건의 체면을 세워주었을 뿐이다. 1984년 들어서 원유가격이 하락하고 폴 볼커가 이끄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인하해서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섰다.

민주당은 레이건 보다 스무살이나 젊은 미네소타 출신의 역동적인 진보정치인 월터 먼데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고, 먼데일은 뉴욕 출신 하원의원 제랄딘 페라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로서 최초로 여성이 부통령 후보로 선거에 나서게 됐다. 많은이들은 대선이 팽팽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먼데일은 정부 부채를 줄이기 위해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민주당은 레이건이 75세나 되어서 국정을 이끌어 갈 수가 없다고 공세를 폈다. 첫 번째 후보 토론에서 레이건은 먼데일의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느냐고 끌려 다닌 모양을 연출했다. 누가 보아도 첫 번 토론에서는 젊고 잘 생긴 먼데일이 승리했다. 두 번째 토론에서 레이건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보자의 나이가 논란이 되자 레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상대방의 젊음과 무경험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겠어요.” 순간 청중을 폭소를 터뜨렸고 먼데일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먼데일은 나중에 그 순간 자신이 선거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결과는 레이건의 대승리였다. 레이건은 먼데일의 고향인 미네소타와 워싱턴 DC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승리했다. 1980년 선거에 이어서 1984년 선거에서도 공화당은 대승을 거둔 것이다. 공화당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59%를 득표했고, 여성 유권자의 54%를 얻었다. 민주당은 여성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레이건의 여성 득표율은 1980년의 47%에서 54%로 늘어났다. 흑인과 중남미계 유권자들은 아직도 절대 다수가 민주당을 지지했지만 공화당은 블루칼라 노동자 유권자들의 지지를 넓혔다.

1984년 선거는 1960년대에 대한 심판과 같았다. 레이건은 자신은 루스벨트의 뉴딜을 지지하지만 존슨의 ‘위대한 사회’는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1984년 선거는 미국민 다수가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민주당이 일부 부유층과 저소득층에 기반을 두고 있는 데 비해 공화당은 중산층에 지지를 확대한 것이다. ‘리무진 리버랄’과 ‘복지의 여왕’ 사이에 있는 미국 중산층이 공화당을 지지한 것이다.  페미니즘, 동성애, 낙태, 마약 자유화 같은 진보적 라이프 스타일에 식상한 중산층이 레이건을 구원자로 본 것이다.

정부 규제를 의심의 눈초리로 본 레이건

레이건은 정부 규제에 대해 매우 안 좋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에이즈 문제에 대해서도 레이건은 무관심했다. 레이건은 에이즈가 성적 방종으로 인해 생긴 질병으로 보고 수혈이나 태아 감염에 의한 에이즈에만 관심을 가졌다. 연방 보건국장과 낸시 여사는 레이건에 대해 에이즈에 대처할 것을 주문했지만 레이건은 자신의 친구였던 영화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 환자로 밝혀지자 비로서 정부가 나서도록 했다.

레이건은 연방 교육부를 없앨 것처럼 말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레이건에 의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테릴 벨은 공립학교의 수준 저하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연방정부 내에서 교육정책은 우선순위가 한창 뒤떨어 졌다. 벨의 후임으로 임명된 윌리엄 베넷 장관은 교육이 도덕성을 회복하고 서구 문명의 우수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넷 장관은 낸시 여사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마약 퇴치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장관에서 물러난 베넷은 라스 베가스에서 도박에 몰입해서 6백만 달러를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건 행정부는 린 체니를 국가인문연구원(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 원장에 임명했다. 나중에 부통령이 된 딕 체니의 부인인 린 체니는 역사 교육의 개혁을 위해 UCLA 역사학부로 하여금 ‘표준 역사’(The National Standards for History)를 집필하도록 했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표준이 될 이 책이 나오자 여론은 격앙했다. 상원은 만장일치로 이 책을 규탄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린 체니는 UCLA 역사학부 교수들의 성향이 어떤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에는 백인남성 정치지도자가 아예 사라져버렸고, 무슬림 세계에선 노예와 빈곤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서방세계는 악이고 제3세계는 선이라고 주장하는 이 책은 히틀러의 공포는 가르치면서 스탈린의 죄악은 언급하지 않았다.

레이건은 복지과잉이 초래하는 부작용과 싸웠다. 레이건은 주지사를 끝내고 라디오 시사방송을 할 때에 그 같은 복지의 폐단을 ‘복지 여왕’(‘welfare queen’)의 예를 들어 이야기했다. 레이건이 들었던 복지 여왕의 실제 인물은 린다 테일러라는 47세 흑인여성이었다. 그녀는 캐딜락 등 자동차 3대를 갖고 있고 주택도 3채를 임대 주면서 잘 살았는데, 그녀는 다른 이름과 주소를 이용해서 한 해에 복지급여 154,000 달러를 타냈다. 그녀는 결국 복지 사기와 위증 혐의로 시카고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1984년에 찰스 머레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정신과 개인 책임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복지사회는 교회, 가정, 그리고 공동체가 해 왔던 역할을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 책을 펴내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레이건은 임기 중 복지체계를 개혁하지는 못했다.

레이건은 낙수 이론(trickle down theory)를 믿었는데, 실제로 레이건 임기 중에는 ‘파도가 차 오르면 모든 보트를 들어 올린다’(“The rising tide lift all boats.”) 효과가 나타났다. 1988년에 상위 5%가 전체 세금의 45,5%를 납부했는데, 이는 1986년의 41.8%에서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상위 45%는 1986년에 전체 세금의 51.6%를 납부하다가 48.7%로 떨어졌다. 레이건 행정부는 카터 시절의 높은 인플레이션을 잡았고 1982-83년간의 불황시기를 제외하면 경제는 매우 좋았다. 레이건은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의 중요성을 미국민에게 다시 한번 확실하게 심어 주었다.

핵무기 군축협상에 나서다

이란-콘트라 사건은 레이건 대통령의 리더십이 단점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레이건은 세부 사항을 캐주얼하게 대했고, 참모들 사이의 라이벌 의식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으며, 자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참모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이란-콘트라 사건은 과연 레이건이 백악관을 통제하고 지휘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마저 자아냈다. 레이건은 소련의 고르바쵸프에 대해선 회담을 통해서 대화를 추구했지만, 니카라과의 오르테가 정권에 대해선 불법적인 비밀전쟁을 치렀다.

레이건은 소련의 핵 공격위협에 대해 미국이 전통적으로 견지해 왔던 대량보복 전략에 대해 매우 좌절했다. 레이건은 미소 간의 핵무기 대치상황이 영화 ‘OK 목장의 결투’와 같다고 생각했다. 1983년 말,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소련에 대해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다고 믿었다.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미사일을 새로이 유럽에 배치하려는 것을 보고 소련에 대한 핵 공격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소련 군 당국은 나토군의 전쟁 연습에 대해 비상경계령을 발동해서 감시했다.

레이건은 두 번째 임기에 접어 들자 리차드 파이프스 같은 네오콘 이론가들의 주장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란-콘트라 사건을 일으킨 중앙정보국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게 됐다. 1985년 정상회담에서 레이건을 만나 본 고르바쵸프도 레이건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이 빌리 그레이엄을 만났을 때 “누가 레이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고 물었는데, 이에 대해 그레이엄은 “당연히 레이건의 아내”라고 답했다. 고르바쵸브와의 회담에 대해 반대하는 참모들이 있었음에도 레이건이 고르바쵸브와 만나게 된 것은 낸시의 힘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1985년 11월 제네바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공군기에 의해 격추되자 레이건은 유엔이 강력한 결의를 채택하도록 우방국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이 사건에서 레이건은 핵 전젱이 우발적 사건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레이건 1기는 미소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기였는데, 이런 시기에 레이건은 소련과 협상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1984년 1월 16일에 행한 대외정책에 관한 연설에서 레이건은 핵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는 것이 1순위 급선무라면서 소련과 건설적 대화를 통해서 협상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 해 9월, 레이건은 소련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두 사람은 3시간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때 레이건은 “미국은 소련을 강대국으로 인정하며 소련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킬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도브리닌 대사는 고르바쵸프가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원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정상회담이 빨리 열리기는 어렵다고 알려 주었다. 당시 미국의 매파들은 MX 미사일을 배치하기 원했고, 의회는 MX 예산을 다루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5년 11월,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소 정상회담이 열렸다. 고르바쵸프는 나중에 “레이건이 서로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고 회고했다.

레이건과 고르바쵸브가 만나게 된 데는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대처 영국 총리의 역할이 있었다. 미테랑은 고르바쵸프에게 레이건이 단지 강경파가 아니고 고착상태에 빠진 핵 협상을 타개할 의지를 갖고 있다고 설득했고, 대처는 레이건에게 고르바쵸프가 협력을 할 줄 아는 전향적 정치인이라고 알려 주었다. 무엇보다 고르바쵸프는 소련 체제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15,000명이 사망했고 아프가니스탄 개입은 실패였음을 알게 되었다. 레이건은 아프간 전쟁을 비난하면서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레이건은 리비아, 니카라과 문제를 거론했고 고르바쵸프는 미 해군의 공격적 존재가 문제라고 맞받아쳤다. 레이건은 유태인 등 소련을 떠나고 원하지만 소련 정부가 출국을 허가하지 않는 사람들 명단을 고르바쵸프에게 전달했다. 고르파쵸프는 미국이 전략방어무기(SDI : Strategic Defense Initiative) 개발에 돈을 퍼붓고 있다고 비난했다. 고르바쵸프는 소련이 상응하는 무기체계를 개발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네바 회의는 레이건이 대소 강경론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진 커크패트릭은 1985년 초에 행정부를 떠났고, 레이건은 이제 보수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제네바 회담 이후 레이건은 네오콘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비트버그 방문, 그리고 필리핀

냉전을 종식시키고 싶어했던 레이건은 나치 전범과 아시아의 반공 독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다루어야만 했다. 1985년 봄, 독일 본에서 경제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었는데, 독일의 콜 총리는 레이건에게 2차 대전 종전 40주년을 맞아 부근 비트버그 군인묘지를 방문해 줄 것을 제안했고, 백악관은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비트버그의 묘지에 잠들어 있는 독일 장병 2만 명 중에는 친위대원 49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백악관은 이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여론을 들끓었다.

레이건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40주년이던 1984년 11월에 오마하 비치와 뿌엔 드혹(Pointe-du-Hoc)을 방문해서 연설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비트버그 방문은 그와는 반대되는 효과를 초래했다. 미국내 유태인 단체들은 친위대원들이 묻혀 있는 묘지를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는데 대해 반대를 분명히 했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낸시 여사는 비트버그 방문을 취소하라고 종용했지만 도널드 리건 비서실장은 계획대로 방문할 것을 주장했다. 레이건은 예정대로 비트버그를 방문했고, 유럽의 해방과 과거에 적으로 싸웠던 두 국가간의 화해에 대해 언급했다. 레이건은 유태인 학살이 이루어진 버겐 벨젠 수용소도 방문했는데, 이는 비트버그 방문에 관해 야기될 비난을 상쇄하기 위함이었다. 유태인 수용소를 동시에 방문하는 방안은 매튜 리지웨지 장군이 제안했는데, 리지웨이는 레이건과 함께 비트버그와 버겐 벨젠을 방문했다. 레이건의 비트버그 방문과 더불어서 유럽에서는 전쟁에서 사망한 독일군들도 전쟁의 희생자라는 주장이 나와서 나치스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일었다.

니카라과와 필리핀 문제는 레이건 행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레이건은 엘살바도르에서 벌어진 우익 테러에 관해 보고를 받고 화를 냈으나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권위주의적 정부를 전복시키면 더 나쁜 공산독재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고 경고한 진 커크패트릭 유엔주재 대사의 견해를 레이건은 받아드렸다.

1983년 8월,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코 아퀴노가 미국에서 3년간의 체류를 마치고 마닐라 공항에 내려서 입국하려는 순간 총탄 세례를 맞고 사망하는 일이 생겼다. 아퀴노가 암살되는 모습은 TV로 생중계되어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레이건과 낸시,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의 고위층 몇몇은 마르코스 부부와 친분이 깊었다. 국무부는 필리핀 정부에 대해 인권상황을 개선하라고 압력을 가했으나 마르코스는 듣지 않았다. 이에 레이건은 노련한 외교관 필립 하비브를 특사로 마닐라에 파견했는데, 하비브는 마르코스가 선거 부정으로 당선됐고, 코라존 아키노를 지지하는 민중봉기가 진행 중에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 상원은 89대 5로 필리핀 대선이 부정선거였다고 규탄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미국 가톨릭 교단은 코라존 아키노를 지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마르코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레이건 행정부는 1985년 2월 25일에야 마르코스에 대한 지지를 접었다. 시위가 내란 양상으로 번져갈 징조를 보이자 마르코스를 퇴진시키고 미국으로 망명토록 한 것이다. 비트버그 방문과 필리핀 사태에 대하는 태도 때문에 자유에 대한 레이건의 신념에 의문을 품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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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셔틀 챌린저, 그리고 체르노빌

1986년 1월 26일, 스페이스 셔틀 챌린저가 발사대를 떠난 후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특히 고교 과학 여교사 크리스타 매콜리프가 타고 있어서 전국민이 관심을 갖고 TV를 보았는데, 공중에서 폭발한 것이다. 레이건은 그 날 저녁 집무실에서 슬픔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는 연설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페기 누넌이 기초한 이 연설문은 대통령 연설문으로서 가장 잘 된 것으로 평가된다.

1986년 4월 말,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해서 방사능이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이 사고는 고르바쵸프 등 소련 지도층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레이건은 고르바쵸프에게 내년 여름 정상회담에서 핵 위험을 우선적으로 다루자고 제안했다. 고르바쵸프는 레이건의 이 제안에 동의하면서 지난 10년간 원자력발전소에서 152건의 사고가 발생했다고 언급했다.

레이캬비크 정상회담

1986년 10월 11일- 12일간 레이건은 아이슬랜드의 레이캬비크에서 고르바쵸프와 정상회담을 갖았다. 놀랍게도 레이건은 레이캬비크에 오면서 별다른 전략을 갖고 있지 못했다. 반면 고르바쵸프는 핵 군축 문제에 대해 충분한 준비를 하고 회담에 임했다. 제네바에서의 경우와 정반대 현상이 생긴 것이다.

고르바쵸프는 공격용 전략무기를 제한하고 모든 중거리 미사일을 폐기하고 우주에서의 군사기술 용용을 금지하는 방안을 준비해 왔다. 통역관만 참석한 두 사람만의 회담에서 고르바쵸프는 레이건에게 미국의 제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준비해 온 안이 없었다. 이어서 슐츠 국무장관과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레이건과 고르바쵸프에 가담했다. 고르바쵸프는 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이 미사일을 동시에 폐기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순항 미사일을 보유할 수 있게 하며 아시아에 있는 소련의 미사일은 의제에서 제외하자고 제안했다.

고르바쵸프는 우주에서 미사일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자고 주장했다. 고르바쵸프의 과학기술 참모들은 레이건의 스타워스 구상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고르바쵸프는 스타워스를 진정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반면 레이건은 스타워스라고 불리는 SDI를 지키고 싶어 했다. 레이건은 고르바쵸프에게 스타워스가 핵 무기 전면 폐기를 촉진할 것이며 미국은 소련에게 그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고르바쵸프는 레이건이 우주로까지 군비를 확산시킬 것이라고 믿고 레이건의 이런 제안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면서도 고르바쵸프는 레이건이 스타워스를 포기할 경우에 미사일방어조약(ABM) 존속기간을 단축하고 군비철폐조약에 인권 조항을 수용하겠다는 등 많은 양보를 했다. 하지만 스타워스에 대한 레이건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 레이건은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회의장을 나왔다.

미국내에서는 레이건이 군비 축소를 가져 올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차 버렸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서 고르바쵸프는 스타워스를 받아드리기 마음을 바꾸었다. 고르바쵸프는 중거리 미사일 조약이 체결되는 대로 동유럽에 비치되어 있는 소련의 단거리 미사일을 철수하고 소련이 위협으로 생각하는 독일에 배치된 퍼싱 미사일은 미국이 독일을 설득해서 폐기하도록 하는데 동의했다. 고르바쵸프는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종식시키지 않는 한 소련 경제개혁을 시작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고르바쵸프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는 대처의 역할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대처는 고르바쵸프가 소련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지도자임을 처음 알아차린 서방지도자였다. 대처는 고르바쵸프에게 스타워스가 기능할 수 없는 구상이라면서 이에 대해 양보하도록 종용했다. 이렇게 해서 군비 축소 협상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1987년 서유럽 방문

1987년 6월, 중거리 핵미사일 협상이 무르익어 갈 무렵에 레이건은 열흘 일정으로 유럽을 방문했다.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시끄러운 워싱턴을 피할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동서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의 브란데부르크 문 앞에서 레이건은 “고르바쵸프 서기장, 당신이 소련과 동유럽에 번영을 가져오고 자유를 원한다면 여기로 오시요. 고르바쵸프 서기장, 이 문을 열고 이 장벽을 허무시요.”라고 끝나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핵 무기 감축을 넘어서 자유를 받아 드리라고 고르바쵸프에게 촉구한 것이다.

고르바쵸프 미국 방문

1987년 12월 초, 고르바쵸프는 부인 라이사 여사와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레이캬비크 회담이 결렬된 후 몇 달에 거쳐 이견을 조율한 후 타결된 군축협정에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인들은 고르바쵸프 부부의 미국 방문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고르바쵸프는 러시아 대사관에서 빌리 그레이엄, 헨리 키신저 등 각계 명사를 초청해서 연설을 했다. 백악관으로 가는 길에 고르바쵸프는 차 밖으로 나와서 환영인파와 악수를 했다. 레이건은 백악관에서 열린 환영행사에서 군축 협상이 타결됐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날 레이건이 했던 러시아 체제에 대한 유머는 고르바쵸프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도 발생했다. 고르바쵸프 부부는 서부 해안도 방문했다. 스탠포드 대학 후버연구소의 러시아 자료관을 들러 보고 샌프랜시스코도 방문했다.

하지만 보수파들은 레이건이 냉전에서 패배하는 길을 택했다고 비판했다. 헨리 키신저는 군축협상 내용이 잘못됐다고 논평했고, 레이건의 친구인 윌리엄 버클리와 조지 윌은 군축이 실제로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협상을 비난했다. 레이건을 자신에게 비판적인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레이건은 핵 전쟁은 승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결코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레이건이 스타워스를 포기하려하지 않자 고르바쵸프는 거기에 맞섰지만 그 결과로 오히려 고르바쵸프가 많은 양보를 하고 만 것이다. 훗날 레이건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군축협정 비준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레이건은 도대체 이들이 왜 자신에 대해 반대하는지 궁금해 했던 것이다.

1988년 5월, 레이건 부부는 모스코바를 방문했다. 레이건은 소련 당국이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유태인들에게 출국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스코바 소재 미국 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 출국을 금지 당한 유태인 100명을 초청했고 레이건은 이들을 접견했다.

모스코바에서 레이건과 고르바쵸프는 예정된 군비축소 협상에 대해 개략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이건은 모스코바 국립대학에서 연설을 했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꽉 들어찬 강당에서 레이건은 정치 보다는 과학과 경제, 그리고 기술에 대해 주로 이야기 했다. 레이건은 “정보혁명이 일어나고 있으며 실리콘 칩이 그런 변화의 상징이며, 위성과 광케이블, 컴퓨터와 전화를 결합시킨 네트워크로서 개인은 과거에 가장 큰 정부가 갖고 있지도 못한 자원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레이건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정부가 레닌이 만든 정부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정보화 시대가 개인의 역량을 성장시킬 것으로 말합으로써 역시 은유적으로 소련의 자유화가 시대적 추세임을 전달한 것이다. 그러면서 모스코바 대학생들에게 “당신들 세대야말로 소련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희망적인 시대를 맞고 있으며 - -자유가 당신들 사람과 문화에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기를 기원합니다”고 했다. 청중은 이 같은 레이건의 연설에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낼 때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연설했을 때 받았던 냉랭한 반응을 생각하며 묘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레이건이 남긴 것들

1989년 초 레이건은 백악관을 떠났고,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으며 소련은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대한 군사지원을 중단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은 무너져 내렸다. 은퇴한 후 몇 년이 지나서 행한 연설에서 레이건은 “대학살의 악몽을 떨쳐 버렸다”고 말했다.

레이건이 갖고 있던 가장 확실한 신념은 인간의 욕망은 선하며 모든 사람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표현했다. 레이건은 모든 미국인은 영웅(hero)이라고 믿었고, 정부를 위시한 모든 권위로부터 부담을 지는 것을 거부했다. 레이건은 토머스 페인의 정신을 미국 보다는 오히려 소련에 더 잘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아카데미와 미디어는 레이건을 인정하는 데 매우 인색했다. 레이건은 누구보다도 ‘아카데미-미디어 복합체’ 문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이 레이건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었음을 이제 부인할 수 없다. 조지 H.W. 부시는 1992년 연두연설에서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했습니다.- - 냉전은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냉전은 쟁취된 것입니다(The Cold War didn’t end. – it was won.)라고 말했다. 레이건은 무기 보다 말을 더 신뢰한 이상주의자였고, 그로 인해 공포로 시작된 냉전은 신뢰로서 종식된 것이다. 

&copy; 이상돈 2015


존 디긴스, 로널드 레이건 (2007년) 
로메시 라트니사르, 이 장벽을 허무시오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