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닉슨, 히로히토를 만나다

작성일 : 2022-12-17 10:51조회 : 1,397

닉슨, 히로히토를 만나다

1970년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적어도 1970년도 전반기까지 일본에선 사회당과 공산당, 그리고 거기에 동조하는 좌익 학생세력과 노동세력이 강력했다. 재일교포 사회도 민단 보다 조총련 세력이 더 강했다. (도쿄에 가서 만나는 한국 사람, 특히 한복을 입은 여자는 조총련 계열일 가능성이 크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자민당 정부는 미일 관계 발전을 위해선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유로 쉽지 않았다.

1960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원래는 일본 방문이 함께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좌익 세력의 시위로 인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막판에 취소되었다. 1965년 1월 사토(佐藤榮作 1901–1975)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해서 존슨 대통령을 만났을 때 존슨에게 일본 방문을 요청했지만 베트남 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험프리 부통령이 1965년 12월 말에 도쿄를 방문했다. 험프리는 이어서 필리핀과 대만을 방문하고 1966년 1월 1일 한국에 도착해서 박 대통령을 만났다. 험프리 부통령은 우리에게 베트남 파병을 늘려 줄 것을 요청하고 이튿날 귀국길에 올랐다.

존슨 대통령은 1966년 10월 24일 마닐라에서 열린 베트남 참전 7개국(미국, 한국, 베트남, 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호주, 뉴질랜드, 타일랜드를 거쳐서 10월 31일 서울에 도착해서 이틀을 보내고 귀국 길에 올랐다. 이에 대해 일본은 소외감을 느꼈다. 닉슨 행정부에 대해서도 일본은 섭섭한 바가 많았다.

일본 정부는 1971년 6월 키신저가 비밀리에 중국을 다녀가고 그 이듬해 봄에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한 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그 해 8월 15일 닉슨은 달러화 금(金)태환을 중단시켜서 달러화를 평가절하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은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 언론은 이 조치를 ‘닉슨 쇼크’라고 불렀다. 일본 외무성과 대장성은 이런 미국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연거푸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미일 관계는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돌았다. 그 계기는 ‘앵커리지의 밤’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이 2차 대전 후 처음으로 유럽 6개국(영국 프랑스 서독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순방을 위해 1971년 7월 1일 한밤중에 앵커리지에 잠시 기착을 하게 됐다. (소련 영공이 폐쇄되어 있던 시절이라서 일본이나 한국에서 유럽을 가는 항공기는 알래스카를 거쳐 북극을 넘어가야 했다.) 닉슨 대통령이 알래스카의 석유개발 등 현안 문제를 다룰 현지 일정을 만들어서 앵커리지를 방문해서 천황 내외를 만났다. 심야에 공항에서 의전행사를 치르고 닉슨 부부와 천황 부부는 한 시간 동안 공항 대합실에서 환담을 나누었다. (사진 1, 2) 닉슨은 알래스카에 며칠 더 머물면서 현안 문제인 송유관 건설에 대해 주민들과 의견을 나누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알래스카에는 현직 대통령이 방문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닉슨이 가는 곳마다 환영 인파가 넘쳐났다.

1973년 7월 31일~8월 1일간 일본의 다나카(田中角栄 1918–1993)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해서 닉슨 대통령과 회담을 했다. 1972년 8월 하와이에서 회담을 한 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동북아 안보와 한반도 안정에 대해서도 견해를 같이 한다는 공동입장을 발표했다. 그 때 1974년 말까지 닉슨이 일본을 방문하고 히로히토 천황이 워싱턴을 방문하기로 합의를 했다. 당시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열리는 등 닉슨의 심기는 불편했지만 닉슨은 “작은 소란함이 있기는 하나 문제는 없다”고 애써 태연해 했다. 하지만 그 후 워터게이트 파문은 갈수록 커져서 결국 닉슨은 1974년 8월에 사임하고 만다.

따라서 양국 국가 원수의 상호 방문은 키신저 국무장관한테 숙제로 남았다. 그해 11월 미소 정상회담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게 되자 키신저는 일본에 연락해서 역사적인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성사된 것이다. 그리고 기왕에 일본에 가는 김에 서울을 들르기로 해서 한미 정상회담이 이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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