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북한의 도발과 키신저

작성일 : 2023-01-06 21:01조회 : 1,313

북한의 도발과 키신저

헨리 키신저는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많은 중요한 결정을 해서 세계 질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키신저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위기상황을 두 차례 다룬 적이 있다. 한번은 닉슨 임기 초에 있었던 미군 조기경보/정찰기 격추 사건이고 다른 한번은 포드 대통령 임기 말에 있었던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이었다. 두 사건에서 키신저는 강력한 군사보복을 주장했으나 합동참모본부가 전면전을 우려해서 만류한 점은 흥미롭다.

1969년 4월 15일 일본 기지에서 발진한 미 공군 정보수집 항공기인 EC-121가 북한 해안에서 90해리 떨어져 있는 동해의 공해상에서 비행 중 현지(일본) 시간 오후 1시에서 1시 30분 사이에 북한 미그기의 공격으로 추락해서 승무원 31명이 사망했다.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은 미국 동부시간으로 15일 오전 1시 경 이 사건을 알게 됐다. 키신저는 잠들어 있는 닉슨을 깨우지는 않았다. 키신저는 북한이 닉슨 정권을 실험해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국가안보회의(NSC)는 4월 16일 10시에야 소집됐다. 합동참모본부는 군사 보복 방안을 여러 가지 시나리오로 작성했지만 외교적 해결이 우선이라고 보고했다. 리차드 헬름스 CIA 국장은 미국이 항공지원을 한다고 해도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은 대등한 수준이라고 닉슨에게 보고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공해상에서 항해 중인 북한 소유 선박을 나포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선박에 대한 정보가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당시 오산 미 공군기지에는 팬텀기 편대가 북한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대기했고, 그 중 일부는 핵 폭탄을 장진해 놓고 있었다.

취임하고 3개월도 되지 않아서 뜻밖에 한국에서 발생한 이런 사건에 대해 닉슨 대통령은 사전에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고, 키신저도 마찬가지였다.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과 멜빈 레어드 국방장관은 1968년 푸에블로함(艦) 사건과 달리 승무원이 납치된 것도 아니고, 군사보복은 한반도에 전면전을 불러 올 수 있다면서 잔뜩 화가 난 닉슨을 달랬다. 반면에 키신저는 이런 행동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미국이 우습게 보인다면서 보복 공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을 명예롭게 끝내겠다고 대통령이 된 닉슨은 또 다른 전쟁을 열 수 있는 위험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닉슨은 동지나해에 나가 있는 7함대 소속 항모 전단을 동해로 보내서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북한이 다시 도발하면 좌시하지 않겠음을 보여주는데 만족해야 만 했다. 1주일 후부터 미군 정찰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정찰을 재개했다. 키신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미국의 대응이 약했고 결정적이지 못했으며 조직되지 못했다(“weak, indecisive, and disorganized”)고 술회했다. 닉슨은 그 대신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폭격을 한층 강화하게 된다. 북한에 보복을 하지 못하는 대신에 캄보디아에 폭격을 강화해서 공산권에 시그널을 보낸다는 생각이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비무장지대에서 시야를 가릴 정도로 웃자란 포플라 나무들을 자르는 작업을 지휘하던 미군 장교 두 명(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이 북한군 경비병의 도끼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키신저 국무장관은 캔저스 시티에서 열리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 중인 포드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했다. 포드 대통령은 전당대회 일정을 마치기로 하고 키신저에게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즈는 수술차 병원에 입원 중이라서 키신저는 브렌트 스코크로포트 안보보좌관, 윌리엄 클레멘츠 국방차관, 그리고 합참의장 등 군 수뇌부로 구성된 위기관리 그룹을 소집해서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키신저는 B-52를 한국 상공에 훈련 비행토록 하고 미군의 방위태세를 데프콘 III(DefCon III)로 상향하자고 제안했다. 합참도 이에 찬성해서 평상시 최고 경계태세인 데프콘 III가 발령됐다. 이들은 괌에 있는 B-52와 F-111에 대기명령을 내리고 요코스카 항(港)에 정박 중이던 항모 미드웨이에 출동을 지시했다.

미군이 한국 사태로 데프콘 III를 발령하기는 처음이었다. 주한 미군 사령관 스틸웰 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했는데, 박 대통령은 단순한 군사력 시위로는 부족하며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북한에 교훈을 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미군에 부응해서 한국군 경계태세도 데프콘 III로 올려서 발령했다. 1953년 휴전 후 처음으로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워싱턴에서는 대응책에 분주했다. 합참은 DMZ 부근 북한 경비지역에 대해 포격을 하는 방안도 있으나 전면전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고 보고했다. 1969년 4월 EC-121 사건 당시의 굴욕을 기억하는 키신저는 최소한 판문점 넘어 있는 북한군 시설에 대해 포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른 참석자들은 키신저의 주장은 너무 위험하다고 보았고, 그 대신 스틸웰 대장이 제안한 대로 문제의 나무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강행하기로 했다.

8월 20일, 미군 본토 기지에서 초음속 가변익 중거리 폭격기 F-111 5개 편대 20대가 오산 기지에 도착했고, 이어서 일본 기지에 있던 미 공군 F-4 팬텀 편대가 오산에 도착했다. 전폭기 40대를 실은 항모 미드웨이함(艦)을 위시한 7함대 전단(戰團)도 도착했다. 8월 21일 아침 7시부터 약 40분간에 걸쳐서 공병대가 나무를 베어내는 작업을 강행했다. 북한군은 묵묵히 보기만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북한군 연락장교가 미군 연락장교를 통해 두 미군 장교의 사망이 유감스럽다는 내용을 담은 김일성의 친서를 스틸웰 대장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 서신에 대해 보고를 받은 키신저 등 위기관리 그룹은 김일성의 친서가 이례적으로 솔직하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9월 8일자로 데프콘 III를 해제했고, 한국에 전개됐던 F-111과 F-4 편대는 9월 중으로 원대 복귀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전쟁에 가까이 갔던 위기가 해소됐다.

당시 CIA는 도끼 만행이 계획된 것이며 이는 197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주한 미군이 있으면 한반도에서 베트남 전쟁 같은 사태가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 주한 미군 철수를 노린 것이라고 판단했음이 비밀이 해제된 후에 알려졌다. 이 사태가 있었음에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미 카터는 주한 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결국에는 당선됐다. 카터는 집권 후에 정말로 주한 미군을 철수하려고 했으나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이던 존 싱글러브 소장이 반대하는 뜻을 밝혀서 해임되는 등 반대여론에 부딪쳐서 실제로 철수를 하지는 못했다. 당시 한국군 장교들은 사석에서 카터를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고 ‘카터 그 개XX’라고 지칭하곤 했다.

사진 (1) 1969년 4월 16일자 워싱턴 포스트 (2) 1976년 8월 DMZ 도끼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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