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울법대 : 김철수 교수

작성일 : 2024-12-24 23:43조회 : 193

서울법대 : 김철수 교수

1971년 내가 서울법대 2학년일 때의 이야기이다. 2학년 1학기의 중요한 과목은 민법총칙과 헌법이었다. 1971년 그 시절 서울법대에는 헌법 교수가 김철수 교수뿐이었다. 그래서 법A반은 김철수 교수가 담당하고 내가 속한 법B반은 국민대 강병두 교수가, 그리고 행정학과는 고려대 한동섭 교수가 강사로 담당했다.

재작년(2022년) 3월, 89세로 타계한 김철수(金哲洙 1933년~2022년) 교수는 한국헌법학계의 거목(巨木)이라고 할 만하다. 1933년 대구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김철수는 타고난 수재로, 어려서 부유한 친구 집에 있는 책을 많이 읽었다고 전해진다. 경북중을 나오고 고도 근시로 군대를 가지 못했고 1952년에 서울법대를 입학해서 1956년에 졸업했다. 서울법대 졸업기수로는 10회가 된다.

수재 청년 김철수

김철수는 대학을 다닐 때에도 독일어를 무척 잘하는 등 수재 중의 수재로 뽑혔다고 전해진다. 대학 재학 중 경기여고를 나오고 서울법대 한 학년 아래인 전혜린(田惠麟, 1934년 1월~1965년 1월 10일)을 알게 되었다. 헌병사령관으로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을 은폐하고 나중에 대한변협회장을 지낸 저명한 변호사 전봉덕(田鳳德 1910~1998)의 큰 딸인 전혜린은 부친의 강권(强勸)으로 좋아하는 문학을 하지 못하고 서울법대에 입학해서 공부하던 중 한 학년 위인 김철수를 만났다. 법학이 싫은 전혜린은 문리대 독문과 강의를 듣더니 3학년 올라갈 때 독문과로 전과(轉科)를 했다. 전혜린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지 못하고 1955년 독일 뮌헨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대학을 졸업한 김철수도 23세 나이로 일찍이 서독 뮌헨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철수가 워낙 수재라서 전봉덕 변호사가 김철수룰 사위감으로 찍었다는 이야기가 1970년대 초까지 서울법대에 전설처럼 전해 왔으나 그것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뮌헨대학 유학 중이던 1957년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전혜린은 문학을 전공해서 뮌헨대학을 졸업했다. 전혜린은 1959년에 딸 정화를 낳고 1960년에 먼저 귀국해서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고 성균관대 전임강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전혜린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고 탁월한 독일어 실력으로 중요한 역서(譯書)를 펴냈다. 한편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 김철수는 1962년에 귀국해서 서울법대 전임강사가 됐다. 오랜 시간 동안 독일에서 공부했음에도 박사학위를 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서울법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박사학위는 지도 교수 운(運)도 있어야 하는 등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연유로 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대의 아이콘 전혜린

전혜린은 자기가 다녔던 서울법대에서 독일어 강사로 출강도 해서 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됐으나 김철수와 전혜린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1964년에 이혼을 했다. 1965년 1월, 전혜린은 31세 나이로 자살했다. 김철수는 그 후 재혼을 했고 딸 정화를 키웠다. 전혜린의 수필을 모아서 1966년에 출판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전혜린의 자살은 당시 큰 사건이었고, 그 이유에 대해선 이런저런 말도 많았다. 서울법대 선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설(傳說)에 의하면 공부만 하는 김철수 교수와 자유분방한 생활을 좋아하는 전혜린은 애당초 힘든 결합이었고, 전혜린은 자기와는 세계관이 다른 부친 전봉덕과도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 즉 내가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번역해서 나온 헤세의 <데미안>과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서울 장안(長安)의 지가(紙價)를 올린 스테디셀러였다. 두 책은 많은 고교생과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나 역시 두 책을 읽었는데, 사실 <데미안>은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무조건 읽어야 하는 줄 알았다. 31세에 요절한 여성 독문학자가 남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그 시대의 로망이었다. 특히 뮌헨의 밤거리와 슈바빙의 생맥주집을 그린 수필은 우리 세대에게 독일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해 주었다. 지금은 70~80대가 된 노년들이 뮌헨에 가면 슈바빙 거리를 찾았다고 하니 그 수필집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 하다.

전혜린은 수필에서 딸 정화에 대해 언급해서 우리 세대는 전혜린의 딸이 ‘정화’임을 그 때부터 알았다. 아마도 전혜린은 자기가 딸을 키울 수 없음을 알고 그런 아쉬움을 글로 남겼을 것이다. 글에 자기 딸 이름을 남긴 사람으론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피천득 교수도 있다. 피천득(皮千得 1910~2007) 교수는 딸 ‘서영’에 대해 수필 속에 여러 번 언급했다. ‘서영’과 ‘정화’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수필 속에 등장한 유명한 딸로 우리 세대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피서영(皮瑞英, 1946년~)은 보스턴 대학 물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헌법교수 김철수

이혼과 전 부인의 자살이란 힘든 시간을 지난 김철수 교수는 하버드 엔칭학회 장학금으로 1966년 1년 동안 하버드 로스쿨에서 머물면서 미국 헌법을 연구했다. 다시 서울법대로 복귀한 김철수는 ‘위헌법률심사제도’에 관한 논문으로 1971년에 서울대에서 박사학위(舊制)를 받았다. 1971년에는 기존의 헌법 교과서와는 차원이 다른 <헌법학> 책이 나오는 등 그야말로 ‘김철수 헌법 시대’가 열렸다. 서울법대에는 헌법 과목이 2학년 필수과목인 ‘헌법’ 외에도 3학년 1학기 ‘비교헌법’과 4학년 1학기 ‘헌법 연습’이 있었다. 헌법은 필수과목이라서 법B반에 속한 나는 다른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나는 3학년과 4학년 때 김철수 교수가 담당하는 선택과목인 ‘비교헌법’과 ‘헌법연습’을 수강했고 두 과목 모두 가장 좋은 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이 두 과목은 사법시험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었고, 시사성 있는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내가 대학 3학년이던 1972년 10월 17일, ‘유신 쿠데타’가 발생했다. 당시 김철수 교수는 헌법 교과서를 준비 중에 있었는데, 유신 헌법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부분이 있어서 중앙정보부는 그 책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해 버렸다. 당시 김 교수도 곤욕을 치룬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문제된 부분을 수정한 교과서가 1974년 초에 나왔으니, 우리는 대학시절을 그런 일을 보면서 지냈다.

유신 헌법은 흔히 ‘한-갈-이 헌법’으로 불리웠다. 한태연, 갈봉근, 이후락이 기초를 했다는 의미이다. 한태연(韓泰淵, 1916~2010)은 일제 통치기간 중 와세다대학을 나오고 고등문관시험 행정과를 합격하고 해방 후 서울법대에서 헌법 교수를 지냈는데, 그는 명강(名講)으로 유명했다. 5.16 후 3공화국 헌법 제정에 참여했고, 그 인연으로 1963년 총선에서 공화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 그 후 변호사를 하다가 10월 유신 후 유신헌법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9대와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갈봉근(葛奉根 1932~2002)은 서울법대를 나오고 독일 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중앙대에서 헌법 교수를 지냈다. 한태연과 함께 유신 헌법 제정을 주도했고 그 덕분에 한태연과 똑 같이 9대와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태연은 서울법대 교수를 지냈고 갈봉근은 서울법대를 나와서 독일에서 박사를 한 수재였으나 두 사람 모두 곡학아세(曲學阿世)를 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반면에 김철수 교수는 유신 체제 하에서 심적으로 큰 고생을 했으나 학자로서의 자존심과 지조를 지켰다.

대학 4학년 2학기이던 1973년 가을, 긴급조치라는 것이 발동돼서 대학은 또 휴교를 했다. 우리는 리포트를 써내고 학점을 받고 이듬해 2월 졸업을 했다. 김철수 교수는 필력(筆力)이 뛰어나서 중앙일보는 그를 논설위원으로 위촉했다. 성균관대학 양호민 교수와 함께 비상임 논설위원이 아닌 정규의 논설위원으로 중앙일보에 매일 출근했다. 당시는 대학 교수 겸직 금지가 없었거나 사실상 용인된 것 같은데, 1974년 말에 그것이 금지되었다. 나는 교수님을 만나러 중앙일보 논설위원실을 찾아 간 적이 있었는데,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서울법대 건물과 달리 중앙일보 논설위원실은 우아하고 시설이 매우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우리나라 대학의 시설은 모두 그랬다.

서울법대는 학생 숫자가 늘었음에도 헌법 교수가 김철수 교수 밖에 없다가 1977년에 권영성(權寧星 1934~2009) 교수가 부임했다. 김철수 교수의 서울법대 1년 후배이면서 괴팅곈 대학에서 박사를 한 권영성은 중앙대 교수를 지내다가 모교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김철수 교수와 권영성 교수는 인간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교과서 시장을 두고 경쟁을 했다. 1990년대 들어서 권영성 교수의 교과서가 헌법 교과서의 왕좌(王座)를 차지했다. 1980년대 들어서 김철수 교수는 한국공법학회 회장과 한국법학교수회 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김철수 교수는서울법대 학장을 하지 못했고 1980년대 후반기에 법학연구소장을 지내는데 그쳤다. 김철수 교수는 이수성, 권영성 등 서울고와 PK 출신 교수가 주류를 이룬 서울법대에서 외로운 소수자였다. 김철수 교수는1998년 정년 은퇴 후에도 상도동 자택에서 정재황 교수 등 제자들과 함께 헌법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토론하다가 2022년 3월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철수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사람으론 황우여 전 국회의원과 양건 전 감사원장이 있다.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서울신문, 2022년 3월 27일자)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327500062

사진 : 김철수(2011년), 김철수 (1982년), 전혜린과 딸 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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