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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윌리엄 멀홀랜드
작성일 : 2022-01-22 09:22조회 : 453


윌리엄 멀홀랜드


영화 <차이나타운>의 무대인 LA는 물이 부족해서 지금과 같은 인구를 지탱할 수 없는 지역이다. 큰 강이 없는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이 사용하는 가정 농업 공업용 물의 2/3는 3개의 도수로(aqueduct)를 통해 다른 지역에서 공급되고 있다. 그 중 오래 된 것이 오웬스 밸리로부터 물을 끌어 온 LA 도수로(LA Aqueduct)인데, 20세기 초에 개통됐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사람이  윌리엄 멀홀랜드(William Mulholland 1855~1935)이다.

1855년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멀홀랜드는 15세 때 집을 떠났고, 결국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했다.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그는 막일을 하면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오게 되었다. 1878년에 민간 수도회사에 취직해서 도랑을 파면서 독학으로 상하수도와 수리공학을 공부했다. 천성이 근면한 그는 8년 후에 회사의 책임자가 되었고, 훗날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된 프레드 이튼(Fred Eaton 1856~1934)을 알게 됐다. LA 시 정부가 이 회사를 인수함에 따라 멀홀랜드는 LA의 초대 수도국장이 되었다.

1890년대 들어 LA는 급성장했지만 도대체 물이 없었다. 물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더 이상 도시가 성장할 수 없었다. 시장 임기를 마친 프레드 이튼은 멀홀랜드과 함께 LA에서 200마일 북쪽에 있는 오웬스 계곡(Owens Valley)의 물을 끌어오는 방안을 연구했다. 1903년 이들은 북쪽 모하브 사막을 건너 오웬스 계곡까지 답사를 했다. 강우량은 적었지만 오웬스 계곡에는 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눈 녹은 물이 서서히 흘러 내려 오웬스 호수까지 흘렀고, 인디언들과 주변에 정착한 백인 농민들은 이 물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물을 로스앤젤레스로 끌어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1890년대 심각한 가뭄으로 물 부족에 시달린 LA 시 당국과 정치인, 기업인들은 이튼과 멀홀랜드의 아이디어를 고려하게 되었다. 200마일에 달하는 도수로를 건설해서 물을 끌어오는 프로젝트는 무모하게 생각됐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LA 시 직원들은 부동산 중개업자로 위장하고 오웬스 계곡으로 가서 토지와 수리권을 사들였다. 막대한 공사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선 공채를 발행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선 주민투표가 필요했다. 지역 여론을 주도하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공채 발행을 열렬히 주장했고, 물 부족에 시달린 시민들은 공채발행에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로스앤젤레스 도수로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는 전적으로 멀홀랜드의 책임이었다. 그는 오웬스 계곡이 높은 지대라는데 착안해서 자연스럽게 물이 아래로 흘러 로스앤젤레스까지 오도록 설계했다. 뜨거운 사막에서 불철주야 공사를 했고, 멀홀랜드는 예산 범위 안에서 공기(工期)를 단축해서 완공했다. 1913년 11월 5일, 드디어 도수로가 개통됐다. 개통식장에서 멀홀랜드는 “여기 물이 있다. 쓰시오”(Here it is. Take it.)라고 말했다. 물 문제가 해결되자 로스앤젤레스에는 부동산 열풍이 불었다. 베벌리 힐스와 샌타 모니카에 저택이 들어섰다. 황량한 사막이 거대한 오아시스로 바뀐 것이다. 멀홀랜드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고속도로와 거리가 생겼다.

도수로 공사에는 어두운 이면이 있었다. 헐값에 땅과 물을 처분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물길을 막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LA 경찰국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관을 도수로 곳곳에 배치해서 물을 지켜야 했다. 오웬스 강물이 흘러 들어가던 광활한 오웬스 호수는 말라 버렸다. LA에 물이 들어오면 황무지가 비옥한 농토와 택지가 될 것임을 알아차린 프레드 이튼 등 로스앤젤레스의 정치 경제계 거물들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사주(社主)와 편집인 일가는 샌 페르난도 밸리의 땅을 미리 사들였는데, 도수로가 개통되자 땅값은 열 배로 뛰었다. 멀홀랜드는 투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는 LA 시장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았다.

1920년대 들어 또 가뭄이 들자 멀홀랜드는 오웬스 계곡에서 오는 물을 담아 놓을 댐을 건설할 필요를 느꼈고, LA 서북쪽에 세인트 프랜시스 댐이 세워졌다. 1928년 3월11일, 댐에서 누수현상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멀홀랜드는 현장에 가보았다. 그는 괜찮을 것이라고 하고 돌아갔다. 그 날 밤 댐이 붕괴되어 150억 갤런의 물이 거대한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려 갔고, 댐 아래 살던 주민 약 500명이 사망했다. 멀홀랜드는 모든 책임을 지고 수도국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말년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다가 1935년 7월22일 사망했다. 로스앤젤레스 시는 시청에 반기(半旗)를 게양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남부 캘리포니아는 계속 물이 부족했다. 콜로라도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 와야만 했다. 후버 댐도 주로 로스앤젤레스와 남부 캘리포니아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그래도 물이 부족하자 오웬스 계곡 북쪽의 모노 호수(Mono Lake)로부터 물을 끌어 오고자 했다. 또한 거대한 샤스타 댐과 캘리포니아 도수로를 건설해야만 했다. 1960년대 들어 환경운동이란 거대한 물결이 닥쳐왔다. 그랜드 캐년에 댐을 세우려는 계획이 환경단체의 소송으로 좌절됐다. LA 시는 모노 호수의 생태계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획기적인 판결이 나왔다. 환경운동가들은 로스앤젤레스는 태어나서는 안 될 도시였으며  멀홀랜드는 자연을 파괴한 악마라고 비난했다.

 멀홀랜드가 사망했을 때 10살을 조금 넘긴 손녀 캐서린이 있었다. 캐서린은 ‘윌리엄 멀홀랜드와 로스앤젤레스의 성장’(‘William Mulholland and the Rise of Los Angeles’)라는 책을 2000년에 펴냈다. 80이 다된 나이에 펴낸 이 책에서 캐서린은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둘러싼 사실을 객관적으로 엮어 냈다. TV 대담에서 캐서린은 할아버지가 위대한 도시를 탄생시켰으며 지금의 잣대로 당시를 평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시는 윌리엄 멀홀랜드를 기념하기 위해 말리부 북쪽 산간에서 LA 도심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멀홀랜드 하이웨이’로 명명했고, 이 도로는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로 명칭이 바뀌면서 베벌리 힐스로 이어진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년)의 현장이 바로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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