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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토머스 제퍼슨의 사생활
작성일 : 2022-07-18 17:08조회 : 44


토머스 제퍼슨의 사생활


지난 6월 20일 MBC가 '쇼킹 받는 차트'라는 저질 프로에서 “美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흑인 노예와 불륜으로 사생아 낳았다?”라는 쓰레기 같은 방송을 했다. 어디서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 알 수도 없는 딴따라 출연자들이 역사에 대해 히히덕거리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그 내용도 너무 저질이다. 출연자들은 제퍼슨의 “족보가 너무 꼬였다”는 등 망언을 이어갔다.

그런 쓰레기 방송 내용을 <뉴시스>는 그대로 옮겨서 “美 건국 아버지, 흑인 노예와 불륜 사생아 낳아…"너무 막장"”이란 쓰레기 기사를 내보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창피한 일이다. 나는 MBC가 토머스 제퍼슨에 대한 저질 방송을 한데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임자를 징계하고, '쇼킹 받는 차트'라는 국어 맞춤법도 안 되는 타이틀을 내건 이 프로는 당장 폐지해야 한다. “쇼킹 받는다”는 표현이 도무지 문법이 되는가. 공영방송이 저질방송과 국어파괴에 앞장서는 것이 아니면, 그 무엇인가 ?  무엇보다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우스개 잡담으로 떠들어서는 안 된다. MBC는 이런 몰상식한 프로를 중단하고 사과해야 한다.

무엇보다 토머스 제퍼슨과 이른바 여자 노예와의 관계는 1990년대에 확인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새삼스럽 게 떠드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다. 도무지 MBC는 자체 심의 기능이 있기나 한가 ? 공영방송 간판을 내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다.

인간으로서 토머스 제퍼슨, 즉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토머스 제퍼슨은 물론이고 조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대통령도 농장주였고 노예 소유주였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패트릭 헨리도 버지니아의 농장주였고 노예소유주였다. 조지 워싱턴의 처가인 커스티스 가문, 토머스 제퍼슨의 사돈인 랜돌프 가문도 모두 대농장주였고 노예 소유주였다. 미국 건국은 북부와 남부, 큰 주와 작은 주와의 타협이었고, 당시에는 흑인 노예를 백인과 똑 같이 시민으로 취급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백인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도 1920년대 들어서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노예 제도가 한계가 왔으며 어느 시점에서는 없어질 것으로 보았지만 갑자기 없앨 수는 없음을 잘 알았다. 그 시절에 백인 농장주가 흑인 여자 노예와 아이를 갖는 경우는 흔히 있었다. 노예의 자식은 노예임이 제도화 되어 있었지만 괜찮은 농장주는 그렇게 태어난 피부색이 밝은 혼혈 흑인 자식에게 남자는 목수와 대장장이, 여자는 옷 제작과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고, 죽음을 앞두고 그런 자식들을 자유인으로 해방 시키기도 했다. 그러면 그런 혼혈 흑인은 북부로 올라가서 정착해서 살았고, 그 후손들은  교육을 받고 엘리트 혼혈 흑인사회를 구성하게 된다.

토머스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 지사와 대통령을 지냈으나 지사와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업적은 그다지 자랑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퍼슨은 죽기 전에 자기 묘비에 ‘독립선언문 기초자이고 버지니아 대학의 창설자’라고만 새기도록 했다. 제퍼슨은 인간적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던 아내 마샤가 9살과 4살인 두 딸을 남기고 34세로 죽었기 때문이다. 마샤 여사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제퍼슨에게 재혼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고 제퍼슨은 그러하겠다고 임종을 앞둔 마샤에게 약속했다. 마샤 자신이 어머니가 빨리 죽어서 아버지와 재혼한 새 어머니 아래서 컸기 때문에 두 딸이 자기처럼 새 어머니 아래에서 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제퍼슨은 그 약속을 지켰다. 

제퍼슨과 결혼하기 전에 마샤는 자신의 아버지가 흑인 혼혈 여자 노예 엘리자베스 헤밍스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과 가까이 살면서 자랐고, 제퍼슨과 결혼을 하면서 이들 중 몇 명을 제퍼슨의 농장인 몬티첼로로 데리고 왔는데, 그 중 막내가 샐리 헤밍스였다. 그리고 마샤 여사는 34세 나이로 죽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 제퍼슨은 39세로 독립선언서를 기초해서 명성이 높을 때였다. 아내 마샤가 죽자 비탄에 빠진 제퍼슨은 혼절을 해서 9살 난 큰 딸 마샤는 저러다가 아버지도 죽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혼혈 노예 엘리자베스 헤밍스가 마샤 여사의 아버지인 존 웨일스 사이에서 낳은 막내 딸이 샐리 헤밍스이다. 따라서 샐리 헤밍스는 마샤 여사의 이복동생인 셈이다. 샐리 헤밍스는 제퍼슨의 큰 딸 마샤 보다 한 살이 적었기 때문에 이들은 때로는 주인님과 하인으로, 때로는 친구처럼 지내면서 자랐다.

샐리 헤밍스는 흑인 혈통이 1/4이었기 때문에 피부가 하얀 흑인, 또는 거무스레한 백인으로 보였다. 제퍼슨은 미국 대표로 프랑스 파리를 갈 때 큰 딸 마샤를 데리고 갔고, 얼마 후 작은 딸 마리아를 파리로 불러올 때 샐리 헤밍스가 같이 오도록 했다. 파리에 체류하면서 제퍼슨과 두 딸, 그리고 샐리 헤밍스는 파리의 문화와 자유를 만끽했다. 제퍼슨은 파리에 체류하면서 프랑스 여인과 사귀기도 했으나 그 시기에 샐리 헤밍스와 성관계를 갖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버지니아로 돌아온 제퍼슨 가족과 샐리 헤밍스는 다시 농장 생활을 계속했다. 제퍼슨은 샐리 헤밍스와 사이에서 일곱 아이를 출산했는데, 그 중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성장했다. 이 네 명은 농장에서 일하지 않고 몬티첼로 저택을 관리하고 수리하고 의복을 만들고 요리를 하는 등 집안 일을 했다. 제퍼슨의 피를 받은 이 네 명은 흑인 혈통이 1/8이라서 흑인 보다는 백인에 더 가까웠지만 그 시절 남부의 법은 흑인 피가 한 방울 만 섞여도 흑인으로 보았기 때문에(one drop rule) 그들은 법적으로 흑인이었다.

1796년 대선과 1800년 대선을 앞두고 제퍼슨이 노예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소문은 북부에도 알려졌으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제퍼슨을 지지했으나 자리를 얻지 못한 정상배가 신문에서 비난하는 정도였다. 제퍼슨은 대통령 재임 중 작은 딸 마리아가 26살로 죽는 비극을 겪었다. 비탄에 빠진 제퍼슨은 워싱턴에 가지도 않고 두 달 동안 저택에 머물면서 슬퍼했다. (제퍼슨의 충실하고 유능한 국무장관 제임스 매디슨과 앨버트 갤러틴 재무장관 덕분에 국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러한 가정의 비극은 큰딸 마샤와 샐리 헤밍스가 감당해야만 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버지니아로 돌아 온 제퍼슨은 농장 경영에 전념했지만 그 시기에 노예를 이용한 농장 농업이 이미 경쟁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대통령으로 있을 때 손님을 접대하느냐고 많은 양의 프랑스 포도주를 소비하고 또 비싼 책을 사서 모은 제퍼슨은 대통령 시절에 늘어난 빚으로 허덕였다. (제퍼슨의 재무장관 캘러틴은 제퍼슨이 대통령 관저에서 마신 포도주는 정부가 부담할 비용이 아니라고 보았다.) 제퍼슨의 마지막 과업은 버지니아 대학을 세우는 일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때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라파엣이 미국을 방문해서 버지니아 대학에서 제퍼슨을 만났다. 인생의 황혼기에 실로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너무 감격해서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노년에 접어든 제퍼슨은 샐리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네 명 의 앞날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당시 남부의 법은 노예를 탈출시키는 것이 범죄였다. 제퍼슨이 자식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북부로 가게 하면 그 자체가 파문이 클 것이 분명했다. 제퍼슨은 성장해서 기술자가 되어서 자립을 할 수 있는 큰 아들 윌리엄과 큰 딸 헤리엇에게 자립에 필요한 돈을 주고 어느 날 밤 몰래 이들을 마차에 태워서 워싱턴 DC로 탈출시켰다. 제퍼슨이 대통령을 지낼 때 워싱턴 DC를 드나들었던 두 사람은 거기에 정착했거나 이후에 북부로 올라가서 백인사회에서 융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겼기 때문에 두 사람의 후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기가 죽으면 자기 농장의 노예를 해방시킬 생각을 했으나 빚이 너무 많아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제퍼슨은 죽기 직전에 샐리 헤밍스와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자유인으로 만들었고, 이 두 사람은 북부로 올라가서 정착했다. (이들은 자식들에게 자신들이 제퍼슨의 핏줄임을 구전으로 남겼고, 1990년대 들어서 드디어 커밍아웃을 해서 DNA 검사로 확인됐다.) 제퍼슨은 샐리 헤밍스는 자유인으로 만들지는 않고 몬티첼로 근처에서 독립된 삶을 살도록 했다. 샐리 헤밍스는 제퍼슨이 사망한 후 9년을 더 살고 1835년에 죽었다.

제퍼슨의 딸 마샤는 제퍼슨이 죽은 후 10년이 지난 1836년에 64세 나이로 사망했다. 마샤의 남편은 랜돌프 가문으로, 장인 덕분에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냈으나 무능했다. 마샤가 토머스 랜돌프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이 제퍼슨의 공식적인 후손이다. 제퍼슨의 딸 마샤는 아버지의 인간적인 고뇌와 단점을 잘 알고 그것을 감내했으며, 정적(政敵)으로부터 아버지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샐리 헤밍스가 낳은 자식들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라는 거짓말을 만들어서 그 거짓말이 150년 동안 통용됐다. 하지만, 제퍼슨이 샐리 헤밍스와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을 것임은 많은 역사가들이 추측해 왔다. 제퍼슨과 그 딸 마샤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영광의 시기도 있었고 행복한 시절도 있었지만 나는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 사진 (1) 저질 방송 화면 (2) 제퍼슨의 버지니아 저택 몬티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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