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베벌리 디프와 팜 쑤안 안

작성일 : 2023-03-16 10:53조회 : 529

베벌리 디프와 팜 쑤안 안

통일된 베트남에선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들은 남베트남 공무원과 장교 등을 재교육 캠프에 보냈고 거기서 죽지 않은 사람들은 15년 후에야 풀려났다. 경제상황도 나쁜 베트남은 미국과 싸울 때는 동지였던 크메르 루지 군과 12년 동안 전쟁을 하고 캄보디아를 점령했다. 그런 와중에 중국과의 국경에서 중국군과 충돌이 벌어졌다. 캄보디아 전쟁에서 베트남군 3만 명이 전사했고, 베트남의 민생과 경제는 파탄이 나버렸다. 1985년 베트남 공산당에서 비로소 개혁파가 주도권을 잡고 ‘도이 모이’(Doi Moi)라는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했다. 소련에서 고르바쵸프가 집권할 때였다.

사이공을 장악한 북베트남군은 팜 쑤안 안(‘안’)이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재교육 캠프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안은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귀국하라고 연락을 해야 했다. 안의 가족이 북유럽을 거쳐 어렵게 베트남으로 돌아가자 안을 알던 미국 기자들 사이에는 무언가 이상한 일이 있음을 느꼈다. 1980년 들어서 안이 북베트남 간첩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자들은 놀라면서도 그전에 가졌던 의문을 기억해 냈다. 라오스 작전을 취재했던 데이비드 그린웨이(David Greenway 1935~) 타임지 기자는 안이 전황(戰況)을 너무 정확히 내다보아서 놀랐던 기억을 되살려 냈다. 타임지는 안이 취재한 베트남 전쟁 기사를 전면적으로 조사했다. 혹시 안이 잘못된 정보를 주어서 여론을 왜곡했을 가능성을 조사한 것이다. 타임지는 그런 가능성을 찾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개방정책에 따라 베트남 정부가 미국 기자의 입국을 허용하자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하노이와 이제는 호지민시(市)로 불리는 사이공을 방문했다. 이들은 사이공에서 안을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났다. 1988년 봄, 뉴요커지(誌) 특파원으로 안과 가까웠던 로버트 샤플렌(Robert Shaplen 1917~1988)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안과 재회했다. 암에 걸려있던 샤플렌은 미국으로 돌아 온 후 병세가 악화해서 곧 사망했다. 이어서 닐 쉬핸(Neil Sheehan 1936~2021), 스탠리 카노우(Stanley Karnow 1925~2013) 등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쉬핸은 베트남 전쟁은 애당초 잘못된 전쟁이라면서 안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스탠리 카노우는 자신의 책('Vietnam : A History') 1990년 개정판에서 안에 대해 사실만 간략하게 언급했다.

안의 네 아이 중 큰 아들 쑤안이 총명했다. 쑤안은 1983~88년간 소련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안은 큰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베트남과 외교관계가 없었을 뿐더러 경제제재를 할 때라서 유학은 불가능했다. 닐 쉬핸 등 안을 아는 기자들이 국무부에 청원을 해서 쑤안은 방콕에서 유학비자를 받고 노스캐롤라이나 대학(UNC)에 올 수 있었다. 쑤안은 부친처럼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닐 쉬핸 등은 쑤안의 학비를 모금해서 전달했고 UNC 총장은 장학금 혜택을 부여했다.

쑤안을 위해 장학금을 모으는 노력에 앞장선 기자 중에는 로버트 앤선(Robert Anson 1945~)이 있었다. 타임지 특파원으로 사이공에 도착한 25세 나이의 젊은 앤선은 겁 없이 캄보디아 국경으로 넘어갔다가 공산군에 잡혔다. 처형 위기에 처한 그는 3주일 동안 잡혀 있다가 갑자기 풀려나서 사이공으로 기적 같이 돌아 왔다. 안이 베트콩 본부에 앤선을 풀어 달라고 비밀리에 연락을 해서 풀려난 것임을 앤슨은 뒤늦게 알았다.

UNC에서 학부를 마친 쑤안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베트남 외교부에 일했다. 미국과 베트남은 1995년에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9년 쑤안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듀크 로스쿨을 다녔다. 쑤안은 미국 로펌에서 일할 기회를 사양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2006년 11월 18~19일 간 하노이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응웬 민 뜨릿 베트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부시를 위해 통역을 한 베트남 외교관이 바로 쑤안이었다.

안과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가까이 지낸 기자는 베벌리 디프였다. 디프는 안이 북베트남의 간첩이었음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는 안과 연락을 하지 않았고 베트남도 가지 않았다. 안의 부인과 아이들을 자기 집에서 머무르게 할 정도로 디프는 안과 가까웠지만 애정이 깊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던 모양이다.

담배를 많이 핀 안은 폐가 서서히 나빠져서 말년에는 산소통에 의존해야 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고 안은 책을 쓰기 위해 자기를 찾아 온 래리 버만 교수에게 “죽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디프와 연락을 해보고 싶다”고 자신의 희망을 전했다. 2006년 9월 20일, 안은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79세로 눈을 감았다. 금년에 87세인 베벌리 디프는 하와이에서 황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사진 : 2006년 11월 미국-베트남 정상회담. 부시 대통령 뒤에 있는 통역관이 안의 장남인 쑤안

이전글정당 지도부 선출, 이대로 좋은가?

다음글베벌리 디프

리스트로

이상돈닷컴

이상돈

LEESANGDON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