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왕적 대통령’

작성일 : 2023-05-28 18:59조회 : 494

‘제왕적 대통령’

1960년대에 인사동 길(지하철 안국역에서 탑골공원으로 가는 도로)은 헌책방과 골동품상, 표구점이 있었다. 1970년대 들어서 인사동 길에는 표구점을 겸한 고서화상(古書畵商)과 작은 화랑이 생겨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더럽고 냄새나는 청계천을 복개하고 고가도로를 건설하고 삼일빌딩이 들어서자 그 주변지역이 확 바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닌 시기인 1973~75년, 지금의 청계광장 건너편(동아일보 반대편)에 들어선 건물 1층에 미국 책과 잡지를 파는 작은 중고 책방이 있었다. 나는 그 곳을 자주 들렀다.

주로 소설과 베스트셀러 포켓북을 팔았는데, 대부분 새 책과 다름없었다. 거기서 나는 <The American Presidency>, <The Imperial Presidency>, <The Pentagon Papers> 같은 책을 샀으니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이 책들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해서 미국 헌법과 정치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나 마찬가지다. 50년 동안 갖고 있다 보니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책 상태가 좋지 않다. 특히 <The Imperial Presidency>는 부서져서 없어질 듯하다.

하버드의 역사학 교수 출신으로 케네디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을 지낸 아서 슐레진저(Arthur M. Schlesinger Jr. 1917~ 2007)가 펴내서 베스트셀러가 된 <The Imperial Presidency>(1973)는 닉슨을 비판한 책이다. 슐레진저는 미국 대통령이 대외정책에서 지나친 재량권을 갖고 의회의 통제를 벗어나서 전쟁을 하더니 베트남 전쟁을 야기했고 대통령의 권한이 고삐 풀리듯 커지더니 워터게이트 같은 권력 남용 사태를 초래했다면서 이를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지칭하고 헌법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대통령 권력을 견제하자고 주장했다. ‘제왕적 대통령’이란 용어는 이 책에서 유래한다.

1973년 11월, 의회는 닉슨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상․하원 각각 2/3 이상 찬성으로 ‘전쟁권 결의’(The War Power Resolution)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는 워터게이트로 하원이 탄핵을 위한 절차를 개시한 시점이었다. 대통령이 미군을 해외 전투임무에 파견하는 것을 제한하고 그 절차를 규정한 법률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법률은 제대로 시행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실제로 9.11 후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이 법률은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전쟁권 결의’법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反)작용의 결과였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케네디가 시작하고 존슨이 확대한 전쟁이며, 닉슨은 베트남 전쟁을 명예롭게 종식하기 위해 대규모 폭격을 하는 등 전쟁을 지속했을 뿐이다.

대학 교수로서 아서 슐레진저는 국정운영에서 대통령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설파하면서 케네디의 대선 캠프에 참여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슐레진저에게 하찮은 대사직을 제안했는데, 슐레진저는 케네디에게 자기 같은 역사가가 백악관에 있어야 한다고 설득을 해서 특별보좌관이란 직책을 받았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의 사무실을 웨스트 윙이 아닌 이스트 윙에 배치해서 거리를 두었다. 대통령 보좌관으로서 아서 슐레진저는 피그스 만 침공 사건과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에 대한 미군 파병 등에서 역할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백악관에서 일어나는 일을 매일매일 기록했다. 케네디가 암살되자 백악관을 나와서 뉴욕시립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백악관 일지를 토대로 <A Thousand Days>라는 책을 펴내서 퓰리처 상(償)을 탔다. 슐레진저는 케네디가 빨리 죽어서 추모(追慕)의 대상이 되자 거기에 편승한 이 책으로 부(富)와 영화(榮華)를 누린 것이다.

<The American Presidency>는 코넬대 정치학 교수를 지낸 클린턴 로시터(Clinton Rossiter III 1917~1970)가 1956년에 펴낸 책이다. 로시터 교수는 미국의 대통령제를 매우 성공한 모델로 평가하면서, 미국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며 집행권자이고, 대외정책 수립자이며 중요한 입법권자이고 예산권자라면서 이 같은 대통령 권한의 확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해리 트루먼 같은 평범한 사람도 대통령직을 훌륭하게 해 냈다는 점에서 대통령 정부는 미국에서 성공한 제도라고 평가했다. 그는 1970년에 이른 나이에 사망해서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나는 케네디는 과대평가된 대통령이고 닉슨은 부당하게 평가절하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교수나 언론인 중에는 닉슨은 권모술수에 능란한 정상배이고 케네디는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미국 정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까 그런 수준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은 입법권과 예산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는 교수가 개헌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데 간여하는 것도 역시 우스운 일이다.

사진 (1) : 백악관 집무실에서 케네디 부부, 존슨 부통령과 함께 한 슐레진저. (왼쪽 두 번째)
사진 (2), (3). 50년 된 포켓북. 1960~70년대 미국 정치에서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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