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Honorarium'

작성일 : 2023-07-17 12:30조회 : 510

‘Honorarium'

대학 시절에 공부한 민법에 자연채무(自然債務)라는 개념이 있다. 자기가 상대방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갖고 있으나 그것을 소송을 통해 구현(具顯)시킬 수는 없으나 상대방으로부터 받으면 그것은 정당한 것으로 추후에 반환을 요구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돈을 지급해야 하는 채무이되 채무자가 스스로 지급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법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채무를 의미한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시효가 완성돼서 돈을 갚을 필요가 없는데 채무자가 스스로 돈을 갚는 경우를 자연채무를 이행했다고 보는 것으로 기억된다. 또한 유흥가에서 종업원에게 약속한 거액의 팁이 자연채무인가를 두고 학설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대학시절에 사법(私法), 즉 민법과 상법에 도무지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법대 교과목에선 민법과 상법의 비중이 컸다, 우리 클라스는 민법을 작고하신 곽윤직 교수님에게 배웠다. 곽 교수님은 수업도 철저하게 하시고 학점도 ‘악’ 소리가 날 정도로 박했다. (절반이 D나 F를 받았다.) 곽 교수께서 자연채무를 설명하실 때 학자들의 원고료를 언급하신 것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교수는 자존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야. 교수는 외부에 글을 쓸 때 얼마 줄 거냐고 묻는 게 아니야. 알아서 주는 대로 받는 거야. 그것도 일종의 자연채무란 말이야.” (“____란 말이야”는 그 분 특유의 어법이었다.)

우리말로 번역이 어려운 영어 단어인 ‘honorarium'도 일종의 자연채무다. 통상적으로 강연료를 ‘honorarium'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아마도 강연을 하는 사람은 ’명예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사전에 얼마를 준다고 약정을 하는 것은 신사적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honorarium'이 기대보다 적다고 그것을 두고 법적 청구를 하는 일은 생길 수 없다. 그렇게 받은 ‘honorarium'도 수입이기 때문에 국세청에 신고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에선 국회의원과 공직자는 ‘honorarium'을 받을 수 없다. 다만 초청을 받아서 회의에 참석하는 경우에 여비와 체재비용을 지원받을 수는 있으나 그 경우도 이해충돌 회피 의무가 까다롭게 적용된다. 우리나라도 국회의원이 강연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은 윤리강령으로 금지되어 있다.

교수는 학자이고 학자는 자존심이 생명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됐다. 그럼에도 아직도 대부분의 교수들은 신문 잡지에 기고를 할 때 원고료 금액을 따져서 묻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년보장(tenure)이 되어 있는 교수들은 그런 신분상의 특권이 있는 대신에 자기 생각을 펴는데 구태여 돈을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오래된 ‘직업윤리’가 그나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교수의 견해가 권위를 갖는 것은 그들은 정년보장이 되어 있어 독립적인 판단을 한다는 ‘가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어떤 법적, 정책적 사안이 발생하면 이해 당사자들은 교수들의 의견을 내세우려 한다. 그렇기에 교수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표명하는 것은 바람직하기도 하다. 그런 경우에 의견을 의뢰한 쪽에서 감사의 뜻으로 약간의 ‘honorarium'을 보답하는 것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교수가 아예 작정을 하고 본격적으로 컨설팅을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법적으로나 직업윤리적으로나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판사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곽윤직 교수께서 만든 모임이 ‘민사판례연구회’로, 대법관과 법원장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이들 대부분은 법관을 퇴직한 후 큰 로펌에서 성공적인 변호사로 변신을 했다. 이런 풍조에 반기(反旗)를 든 모임이 우리법연구회 등이며 이들이 추진한 것이 로스쿨이고 또 이른바 검찰개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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