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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나트라 1964~1971
작성일 : 2024-06-07 07:37조회 : 109


시나트라 1964~1971


케네디가 암살된 후 시나트라는 음악에 집중했다. 1964년에 펴낸 'My Kind of Town', 1966년에 나온 ‘Strangers in the Night'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6년 7월, 시나트라는 2년 여 동안 사귀어 온 미아 패로우(Mia Farrow 1945~)와 결혼을 했다. 당시 시나트라는 50세였고 미아 패로우는 21세였다. 미아 패로우는 시나트라의 큰 딸과 아들보다 나이가 어렸다. 이 결혼은 비아냥의 대상이기도 했다. 시나트라의 친구인 딘 마틴은 “우리 집에는 미아 보다 나이가 많은 위스키가 있다”고 했고, 시나트라의 어머니 돌리 여사는 손녀 보다 더 젊은 며느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났다.

미아 패로우의 아버지는 영화감독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패로우가 17세 때 사망해서 패로우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미아 패로우는 영화 배우를 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고 TV 연속극에 나오다가 시나트라를 알게 됐다. 미아 패로우는 시나트라의 부인이 아닌 연기자로서 성공하고 싶었다. 세대 차이 때문에 두 사람 사이는 처음부터 원만하지 않았다. 시나트라는 사교 댄스를 추고 패로우는 트위스트 댄스를 하고, 시나트라는 담배를 피고 패로우는 마리화나를 피는 식이었다. 결혼은 1년 만에 파탄을 맞았는데, 패로우가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를 트위스트 파티에서 만나 미친듯이 춤을 춘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화가 치민 시나트라는 밀튼 루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혼 서류를 작성하라고 지시했고 패로우는 촬영장에서 이혼 통보서를 전달 받았다. 두 사람은 1968년 8월에 정식으로 이혼했다.

1967년은 시나트라 부녀(父女)에게 최고의 해였다. 시나트라가 큰 딸 낸시와 같이 부른 ’Something Stupid'가 크게 히트를 했다. 낸시 시나트라가 작곡·작사가인 리 헤이즐우드(Lee Hazlewood)와 같이 부른 ‘Summer Wine', "Some Velvet Morning'이 큰 성공을 거두었고, 낸시는 그해에 나온 007 시리즈 ’You  Only Live Twice' 주제가도 불렀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음악은 이때부터 반문화(反文化 counter-culture)라는 큰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시나트라 부녀가 전통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The Animals', 'Jefferson Airplane', 'Credence Clearwater Revival', 'The Doors' 등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는 이름을 내건 그룹들이 팝 음악의 주류(主流)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반(反)문화’(Counter-Culture)가 대중문화(Pop Culture)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 것이다. 1967년 6월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Int’l Pop Festival)과 1969년 8월 우드스톡 페스티벌(Woodstock Rock Festival)은 반(反)문화의 절정이었다. 반문화 운동은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과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미국 사회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1968년 6월, 로버트 케네디가 LA에서 총을 맞고 사망했다. 시나트라는 로버트 케네디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을 지지했다. 로버트 케네디가 죽은 데 대해 시나트라가 공식적으로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시나트라는 속으로 시원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케네디 형제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시나트라에게 로버트 케네디는 살인자와 배신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시나트라는 그가 순교자로 인식되는 것을 보고 쓴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그해 11월 대선에선 ‘법과 질서’(Law and Order)와 베트남에서의 명예로운 철군을 내세운 리차드 닉슨이 당선됐다.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얼마 후 시나트라는 ‘My Way’ 음반을 출시했다. 'My Way'는 스테디하게 인기를 얻어서 시나트라의 대표곡으로 지위를 굳혔다. 그리고 1971년 봄, 시나트라는 은퇴를 선언하고 6월에 LA에서 은퇴 공연을 했다. 그해 5월 1일 워싱턴 DC에선 수십만 군중이 모인 메이데이 반전(反戰) 시위가 있었고 닉슨 대통령은 군 병력을 투입해서 연방정부 건물을 지켜야 했다. 그야말로 혼돈의 세월이었다.

시나트라가 가수로서 인기를 얻을 1940년대에는 젊은 여학생들이 시나트라를 열렬하게 좋아했다. 1971년 6월, 55세의 시나트라가 은퇴공연을 하는 자리에는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 등 공화당 정객들이 앞좌석을 차지했다. 시대가 바뀐 것인지, 사람이 바뀐 것인지는 보기 나름이다. 시나트라는 이 시기에 민주당적을 버리고 공화당으로 갈아탔다.

- 사진 : 시나트라와 딸 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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