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대학원 시절

작성일 : 2025-03-04 19:34조회 : 67

나의 대학원 시절

50년 전인 1974~75년 동안 나는 서울대 대학원에 적(籍)을 두고 헌법 등 공법분야를 공부하면서 알리앙스 프랑세스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1974년 늦가을부터는 석사학위 논문을 미국 대법원에 대해 쓰려고 작정하고 미국 헌법과 대법원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지금도 미국 헌법과 대법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서는 별로 없으니까 그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어서, 나는 흔히 원서라고 부르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 때 읽었던 책들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서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책은 역시 하드커버로 만들어야 세월이 흘러가도 변치 않는다.

그 때 내가 읽고 영향을 받은 학자로는 에드워드 코윈, 체카리아 채피, 헨리 에이브래햄, 유진 로스토우, 그리고 알렉산더 비켈이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학자들이었고, 나는 이들의 책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유신 체제 하에서 우리나라 헌법은 공부할 것 자체가 없었을 뿐더러 당시 우리나라 학계의 수준도 사실 별로였기에 나는 이들의 책을 통해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었다.

에드워드 코윈(Edward S. Corwin 1878~1963)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정치학박사를 하고 1908년부터 프린스턴 대학에서 헌법과 헌법사를 가르쳤다. 그는 정치학자로서 미국 헌법을 가르치고 주목할 만하 헌법 책을 여러 권 펴냈다. 1920년에 펴낸 <The Constitution and What It Means Today>는 미국 헌법에 관한 가장 유명하고 권위적인 주석서(Commentary)로 그 후 꾸준히 수정판이 나왔고 사후에는 제자 교수가 수정판을 펴냈다. 그 외에도 <The President, Office and Powers (1940)>, <Total War and the Constitution (1946)>, <The "Higher Law" Background of American Constitutional Law (1965)>을 펴냈다.

체카리아 채피(Zechariah Chafee Jr. 1885~1957)는 표현의 자유를 주창한 헌법학자로 유명하다. 브라운대학과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채피는 1916년에 하버드 로스쿨 조교수가 됐으나 1차 대전 중임에도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주장해서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서 교수직을 잃어버릴 뻔 했다. 그는 1956년까지 하버드 교수로 있었고 여러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채피가 1941년에 펴낸 <Free Speech in the United States(미국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저술로 손꼽힌다. 이 책은 1차 대전이 끝난 1920년에는 나온 <Free Speech>를 보완하고 확대한 것이다. 채피는 올리버 홈스 대법관(Justice Oliver Wendell Holmes)과 루이 브랜다이스 대법관(Justice Louis Brandeis)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채피의 조카 존 채피(John Lester H. Chafee 1922~1999)는 로드아일랜드 주지사와 해군장관을 지내고 상원의원을 오래 지냈다.

헨리 에이브래햄(Henry J. Abraham 1921~2020)은 미국의 사법과정과 대법원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로 유명하다. 독일에서 태어난 에이브래햄은 독일에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 아버지에 의해 미국에 보내져서 공부를 하던 중 부모와 형제가 간신히 미국에 도착해서 피츠버그에 정착했다. 에이브래햄은 오하이오에서 학부를 나오고 컬럼비아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정치학박사를 했다. 1949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의 사법과정과 헌법사, 특히 대법원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1972년에 버지니아 대학을 옮겨서 1997년까지 반세기 동안 교수생활을 했다. 반세기 동안 가르친 정치학부 학생 중에는 상원의원, 연방판사, 주 법원 판사 등이 배출됐다.

1962년에 나온 <The Judicial Process: An Introductory Analysis of the Courts of the United States, England, and France(사법과정)>는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사법제도와 사법과정을 비교해서 다룬 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은 1998년에 7판이 나오고 절판됐다. 1972년에 나온 <Freedom and the Court: Civil Rights and Liberties in the United States(자유와 법원)>는 미국 대법원의 기본권 판례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책으로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98년에 7판이 나왔고 2003년에 바버라 페리 교수에 의해 8판이 나왔다. 에이브래햄 교수는 대법관이 임명되는 과정에서 대통령과 상원의원들의 역할을 조지 워싱턴 시절부터 연구한 책도 펴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아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임명하는 과정까지 다룬 5판 <Justices, Presidents, Senators: A History of U.S. Supreme Court Appointments from Washington to Bush II>가 2007년에 나왔다. 그는 100세 생일을 앞두고 사망했다.

유진 로스토우(Eugene Victor Debs Rostow 1913~2002)는 예일 로스쿨 학장을 지내고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을 지낸 국제법과 헌법 학자다. 그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유대계 부모 사이에서 뉴욕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자인 그의 아버지는 큰 아들 이름을 노동운동가이고 사회당 대선 후보였던 유진 데브스(Eugene Victor Debs 1855~1926)를 따서 지었다. 유진 로스토우는 예일대 학부를 다녔고 예일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동생이 경제발전 5단계설을 주장했고 존슨 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낸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이다.

유진 로스토우는 1937년에 23살 나이로 예일 로스쿨 교수가 되어 국제법과 헌법을 가르치면서 국제관계의 헌법적 기초를 깊이 연구했다. 1955년부터 1965년까지 예일 로스쿨 학장을 지냈고, 1966년부터 1969년 초까지 국무부 3인자인 정치담당 차관보를 지냈다. 닉슨 행정부가 들어선 후 그는 예일 로스쿨 교수로 복귀해서 국제법과 헌법을 가르쳤다. 민주당원이면서도 공산권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그는 레이건 1기 행정부에서 군비통제국(Arms Control and Disarmament Agency) 국장을 지냈다. 예일 로스쿨 학장 시절인 1962년 로스토우는 <The Sovereign Prerogative(주권적 특권)>를 펴냈다 대외관계에 관한 대법원의 역할을 다룬 자신의 논문을 엮어서낸 책이다. ‘주권적 특권’이란 대법원이 헌법과 법률에 관해 최종적 판단을 한다는 의미이다.

알렉산더 비켈(Alexander M. Bickel 1924~1974)은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유럽에서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부모가 미국으로 건너감에 따라 뉴욕시에 정착해서 공부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하버드라고 불리던 뉴욕시립대학(CUNY)을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해서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역시 CUNY와 하버드 로스쿨을 나오고 하버드 교수를 하다가 대법관이 된 펠릭스 프랑크퍼터의 재판연구관을 지냈다. 젊은 나이에 예일대 교수가 된 비켈은 탁월한 논문으로 주목을 받았다. 1962년에 나온 <The Least Dangerous Branch>(가장 위험하지 않은 부(府))는 헌법해석과 사법심사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엮어내 것으로, 불후(不朽)의 명저로 평가된다. 비켈은 의회가 만든 법률을 선출되지 않은 법관들이 위헌으로 판시하는 사법심사는 본질적으로 '반(反)다수적 어려움'(counter-majoritarian difficulty)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켈은 선거라는 정치과정에서 차단돼 있는 연방법관은 ‘냉철한 재고'(sober second thought)를 통해 미국 사회의 ’항구적 가치‘(enduring value)를 구현시킬 수 있으며 구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비켈은 민권을 신장시킨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어 놓은 얼 워렌 대법원장이 이끄는 대법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결과적으로는 옳다고 하더라도 진보라는 이름하에 원칙에서 벗어난 판결 논리를 구사함으로써 법원으로서의 정당한 역할에서 이탈했다고 비판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비켈은 사법자제론(judicial restraint), 또는 사법소극론(judicial passivism)에 서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1970년에 나온 <The Supreme Court and the Idea of Progress>(대법원과 진보 이념)>에 잘 정리되어 있다. 진보적인 대법원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비켈은 흔히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1971년 6월, 펜타곤 페이퍼를 게재한 뉴욕타임스에 대해 법무부가 보도 금지명령을 내려서 대법원이 언론자유의 한계를 다루게 된 NYT v. U.S. 사건에서 비켈은 뉴욕타임스를 대리해서 대법원에서 승리했다. 비켈이 NYT를 대리했기에 중간적 입장에 있던 대법관 2명(포터 스튜어트, 바이런 화이트)이 NYT를 지지해서 6대 3으로 NYT가 승리했다고도 평가된다. 비켈은 1974년 11월, 수술이 불가능한 뇌종양으로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미국 법학계와 법조계에 큰 충격이었다. 예일대 출판부는 비켈의 유고를 모은 <The Morality of Consent>를 1975년에 펴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국 헌법과 대법원을 혼자 공부할 때 나는 알렉산더 비켈에 심취(心醉)해 있었다. 당시 나는 비켈의 논문 본문은 물론이고 논문에 인용된 방대한 문헌에 그만 압도되어 버렸다. 그 때 나는 우리나라 학문의 수준을 절감했다. 그렇게 비켈에 몰두해 있을 때 그의 부음(訃音)을 접하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비켈을 읽고 논문이나 저서에 인용한 교수나 법조인은 없었다. 미국 헌법과 사법부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한 학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내가 비켈에 심취했던 때가 1974~75년이니까 반세기 세월이 흘렀다. 알렉산더 비켈, 유진 로스토우, 그리고 헨리 에이브래함이 모두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미국 내에서 소수자이기 때문에 시민적 자유가 중요함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유대인 법률가들이 미국법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막대하다. 유대인은 과학과 경제에만 두각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헌법학의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요새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공부'를 했는가 싶다.)

다음글헌법재판소

리스트로

이상돈닷컴

이상돈

LEESANGDON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