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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함락과 파리협정 이면 합의

작성일 : 2025-04-23 09:00조회 : 34

사이공 함락과 파리협정 이면 합의

사이공이 공산군에 함락된 후에 미국과 통일된 공산 베트남국(베트남민주공화국)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로 종식됐다. 협정은 미군과 연합군이 60일 이내에 철수하고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인민해방전선)은 그 시점에서 장악한 영역을 유지하도록 했다. 미군 지상전투부대는 1971년 연말에 이미 철수를 했고 미군은 군사고문단과 헬기 부대 등 지원부대만 남아 있었다. 소규모 병력을 파견한 호주와 뉴질랜드도 1971년까지 철수를 했기 때문에 남베트남에 남아 있던 연합군은 한국군이 유일했다. 우리 군은 1972년에도 지상전투부대(맹호와 청룡)를 주둔시켰고 그 해 춘계 대공세를 겪었다. 따라서 파리 협정에 나온 연합군은 바로 한국군이었다. 파리 협정이 체결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주월 한국군 철수를 명령해서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왔다.

파리협정은 휴전을 감시하기 위한 합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캐나다 헝가리 인도네시아 폴란드대표가 위원으로 참여하도록 했으며, 포로 석방과 실종자 문제를 다루도록 했다. 또한 전쟁의 상처(wounds of war)를 치유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인도차이나 전체의 재건을 위해 미국이 기여한다는 조항(21조)을 두었다. 하지만 그해 3월부터 북베트남군은 남쪽으로 군사력을 보강함에 따라 남베트남군은 공산군과 전투를 재개했으며 미군의 공중지원이 끊어진 남베트남군은 외로운 전투를 해야만 했다. 더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닉슨 대통령의 리더십은 땅에 추락한 후였다. 1973년 가을에는 중동에서 4차 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해서 미국은 이스라엘에 군사지원을 해야만 했다. 1974년 8월, 닉슨은 사임했고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의회는 남베트남에 대한 미군의 개입을 금지하고 베트남 군에 대한 지원마저 삭감해서 남베트남은 탄약과 연료가 부족한 지경에 처했다. 사이공 정부의 운명은 시간문제로 보였고, 1975년 초부터 북베트남 군은 전면 공세를 취해서 고도(古都) 후에가 함락되고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등 대혼란이 일어났다. 전력(戰力)을 상실한 남베트남은 붕괴했고 결국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됐다.

사이공 함락 후 미국에 남겨 진 가장 큰 문제는 수천명에 이르는 실종 군인이었다. 파리 협정에는 실종자 문제를 규정했으나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위반해서 남베트남을 장악함에 따라 미군 실종자 문제는 전혀 진전을 볼 수 없었다. 1975년 12월, 폴 매클로스키 등 하원의원 몇몇이 미군 실종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민간 자격으로 하노이를 방문했다. 이들을 만난 북베트남 관리들은 미군 실종자 문제와 베트남 재건 문제를 같이 해결해나가자고 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매클로스키 의원 등은 이듬해 1월 포드 대통령을 만나서 실종자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언론에 알리지 않고 포드 대통령에게 그들이 하노이에서 듣고 온 바를 전했다.

북베트남 관리들은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 미국이 북베트남에게 전후(戰後) 재건 비용으로 32억 5천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면서 그 이행을 미국 의원들을 통해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매우 민감함을 알고 있는 의원들은 이를 공표하지 않고 포드 대통령에게 전했으나 결국 뉴스가 새어 나와서 1976년 2월 2일자 뉴욕타임스에 보도가 됐다. 기자들은 파리 협상의 미국측 협상대표였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으나 키신저는 이를 회피했다. 파리협정이 체결된 후 협상을 진행한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과 협정문에 서명을 한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은 평화협정에는 이면(裏面) 양해가 전혀 없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었다. 하지만 백악관과 국무부는 파리협정 체결 당시에 이면 약속이 없다는 키신저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1977년 1월,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자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해온 리차드 닉슨은 하원 아시아-태평양 문제 분과위원장 레스터 울프 의원에 보낸 서신을 통해 자신이 파리 평화회담 진척을 위해 키신저를 통해서 북베트남 팜 반동 수상에게 미국이 22억 5천만 달러 재건 자금과 10억에서 15억 달러에 달하는 식량 및 생필품 원조를 약속했으며, 키신저는 이런 내용을 담은 비밀 메모랜덤을 평화협정이 서명된 후 나흘이 지난 2월 1일에 북베트남 협상대표인 팜 반동에게 전달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닉슨은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준수하지 않고 남베트남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 메모랜덤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언급했다. (워싱턴포스트 1977년 5월 20일자 기사)

미국에서 이런 논란이 일어나자 베트남(하노이) 정부는 베트남에 대한 지원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발표했다. 레스터 울프 의원은 로저스 전 국무장관과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의회와 국민을 기만했다고 비난하면서도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위반하고 남베트남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 약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닉슨의 입장을 지지했다. 카터 대통령도 베트남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이 경제적 지원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의회는 베트남(하노이 정부)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는 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베트남(하노이) 정부가 미국에 대해 파리협정의 이면 약속을 이행하라고 나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비록 남베트남을 완전히 장악해서 통일을 이루었으나 베트남 경제는 완전히 파탄이 나버렸기 때문에 하노이 정부는 닉슨이 약속한 경제지원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여기서 공산주의자들의 멘탈리티를 엿볼 수 있다. 자신들이 파리협정을 파기하고 사이공을 점령했으면서도 그것과 무관하게 미국에 대해 경제원조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으니 공산주의자들은 참으로 뻔뻔하다고 할 만하다.

미국 의회의 격앙된 부정적 반응을 접한 하노이 정부는 1978년 들어서 경제지원 요구를 내세우지 않고 관계정상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카터 행정부는 포드 행정부에서 취한 무역봉쇄(trade embargo) 정책을 유지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베트남에 대한 봉쇄정책을 지속해서 베트남의 경제적 상황은 심각한 곤란을 겪었다. 결국 1986년에 하노이 정부는 ‘도이 모이’라는 개방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클린턴 정부 들어서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무역제재를 해제함에 따라 양국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1995년, 양국은 상호간에 대표부를 설치했으며 1997년에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베트남은 미국이 파리협정 이면합의로 약속한 경제지원 요구를 포기하고 그 대신 남베트남이 미국에 대해 지고 있던 부채 1억 4천만 달러를 승계하기로 했다.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 오히려 베트남이 미국에 돈을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전쟁, 특히 베트남 전쟁 같이 전선(戰線)이 불분명한 전쟁에선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많이 발생한다. 전투원 살상 외에도 민간인 피해와 상호간의 민간인 학살, 건물과 자연생태계 파괴 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파리 협정은 이를 ‘전쟁의 상처’라고 명명하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미국이 노력한다고 규정했는데, 북베트남이 파리 협정을 파기함에 따라 이 조항 자체가 효력을 상실했다. 미국은 베트남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으며, 밀라이 학살의 경우에도 책임자들을 형사처벌하고 민간차원에서 화해를 위한 노력이 있었을 뿐이다. 파리협정은 미군의 연합군(allied force)인 한국군에게도 효력이 있다고 본다면 한국군과 관련된 문제도 파리협정 실효로 인해 함께 소멸됐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한다.

사진 1 : 사이공에 입성한 북베트남 군. 4월 30일.
사진 2 : 사이공 미국 대사관에서 헬기에 탑승하는 장면. 4월 29일.
사진 3 : 계속 되는 헬기 착륙을 위해 먼저 도착한 헬기를 바다에 버리는 장면. 4월 29일 항모 블루리지.
사진 4 : 사이공 미국 대사관을 이륙한 미 해병대 헬기. 4월 30일. 사이공 미국 대사관은 널찍한 헬기 착륙장이 있어서 대형 헬기가 이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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