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서울 법대 시절 회고
2020-06-27 09:28 18 이상돈

4월 26일 ·

서울 법대 시절 회고


내 나이가 되면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곤 한다. 서울법대 다닐 때 유신이 있었고, 졸업을 앞둔 1973년 가을에는 별안간 휴교령이 떨어졌다. 그러더니 민법을 가르치시던 최종길 교수님이 간첩임을 자백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 정부 발표를 곧이 믿은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강의도 없고 시험도 없이 우리는 리포트를 대충 써내고 졸업을 하게 됐다. 사은회가 끝나고 무교동 어느 맥주집으로 조촐한 2차를 갔는데, 당시 법대 학장이던 김증한 교수님께서 동료교수가 이렇게 죽었는데도 말 한마디 못한다고 한탄하셨다.

그리고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취직할 생각은 없었고 석사 학위를 하면서 다음을 생각하고자 했다. 그 무렵 서유럽에 남아있던 독재국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끝없이 갈 것 같았던 총통제 정부가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평화롭게 들어선 것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1975년 봄, 우리 법대는 정든 동숭동 캠퍼스를 뒤로 하고 관악으로 이사를 갔다. 시내에서 멀기도 하거니와 캠퍼스도 너무 커서 황량했다. 동숭동 캠퍼스의 학림다방과 대학다방이 그리워졌다. 동숭동의 독립캠퍼스를 버리고 궤짝 같은 건물 두채로 이루어진 곳이 서울법대라니 기가 막혔다. 법대생들이 데모를 많이 해서 그렇게 쪼그라들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그해 4월 들어 인혁당 피고인에 대한 사형집행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섬짓한 기분이 느껴졌지만 거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던 분위기였다. 그리고 4월 30일, 사이공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함락됐다. 월남이 공산화된 것이다. 나는 월남 패망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인혁당 사형집행이 그 당시 상당히 묻혀 버리는 효과가 있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여하튼 나는 당시 미국 헌법에 심취해 있었고, 미국 대법원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헌법은 도무지 공부할 대상이 없었던 시대였다. 나는 '미국 대법원과 사법적극주의 - 워렌 대법원을 중심으로 -'이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내 논문은 잘 썼다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대학 박사논문 보다 낫다는 평을 들었다.

87년 개헌 후 헌법재판소가 생겼는데, 초대 헌법재판관이 된 한병채가 내 석사논문을 복사하다시피해서 자기 논문으로 헌재 학술지에 실어서 펴낸 적이 있다.
지금 같으면 당장 재판관직을 그만 둘 일이지만 그 당시는 그런 여론이 일지 않았고, 한겨레신문만 박스 기사로 실어서 내보냈다.

 저작권심의조정까지 갔으나 모교 교수를 지낸 이시윤 당시 헌재 재판관이 나의 외가와 관련이 있는 서울법대 대선배이신 이상혁 변호사를 통해서 화해를 권해 와서 확인서와 명목적인 배상금을 받는 것으로 끝을 냈다. 그런데, 당시 헌재 재판관이던 한병채씨가 직접 논문을 작성했기 보다는 그 보좌진이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국내대학 박사학위를 불신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2012 박근혜 비대위 회고 
정당 영어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