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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경성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
작성일 : 2021-04-12 11:31조회 : 2,249
경성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
근래에 여유로운 시간이 많아서 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절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 근대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잘 알지 못했던 그 시대의 세세한 부분도 알 수 있게 됐으니, 연구자들의 노고에 감사할 뿐이다. 재작년에 나온 <제국대학의 조센징>은 그 시절 제국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생애와 그들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정리해서 놓은 책이다. 저자 정종현 교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1970년대 전반부에 대학을 다닌 우리는 제국대학을 다닌 교수들한테 공부를 한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내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할 1976년에는 제국대학을 나온 교수들이 모두 정년을 했다. 서울법대는 일제 시절의 경성제국대학과 경성법률전문학교(법전)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해방 후 미 군정이 추진한 국대안(國大案)의 결과로 그렇게 되었다. 제국대학을 나온 교수들의 자존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서울법대 교수진에는 경성제대를 나온 경대파(京大派)와 동경제대를 나온 동대파(東大派)가 있었다.
서울법대 형법학 두 거두(巨頭)가 있었는데, 그 중 황산덕(黃山德) 교수는 경대파였고, 유기천(劉基天) 교수는 동대파였다. 황산덕 교수는 고등문관시험(高文) 사법 행정 양과를 패스한 수재여서 그의 권위는 감히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동경제대를 나왔지만 고문을 하지 않았던 유기천 교수는 예일대학에 유학을 나가서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황산덕 교수는 5.16 후 군정을 비판해서 감옥살이를 반년 동안 했다. 다행히 출옥을 했지만 서울법대를 사직하고 성균관대로 옮겼다. 이것을 경대파와 동대파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여하튼 이는 서울법대 역사에 있어 일대 사건이었다. 유기천 교수는 1964년 6.3 사태 즈음에 서울대 총장을 지낸다.
내가 대학 2학년 때인 1971년 봄, 유기천 교수는 강의 도중에 총통제 개헌 음모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부인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동으로 해직이 됐다. 10월 유신 움직임을 처음으로 폭로했던 것이다. 유기천 교수의 부인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미국인 교수였다. 유신 정권이 들어선 후 박정희 대통령은 황산덕 교수를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그것도 역시 일대 충격이었다. 1975년 인혁당 확정판결이 나오자 며칠 만에 사형집행을 하게 되는 집행장에 서명을 한 법무장관이 황산덕이었다. 경성제대 출신의 지성이며 양심이었던 황산덕 교수의 마지막 행로에 대해 우리들은 허탈하고 분노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에는 서울법대가 경성제대를 그 뿌리로 생각하고 경성법전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표현이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경성법전 출신으로 서울법대 교수를 한 경우는 기억에 없다. 교수는 제국대학이나 일본 4년제 대학 출신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성법전 출신으로 훌륭한 법조인은 얼마든지 있다.
5.16 후 박정희에 의해 대법원장이 된 조진만(趙鎭萬)은 경성법전 1회 졸업생이고 일제 때 한국인으로 고문 사법과를 최초로 합격했다. 대법원장 임기가 끝나가자 조진만은 자신의 후임으로 대법원 판사였던 홍순엽이나 양회경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홍순엽은 경성법전을 나왔고, 양회경은 일본 주오 대학 졸업생이니까, 두 사람 모두 제국대학 출신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법관 중에도 제국대학 출신 보다는 법전 출신이 보다 민주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진만 대법원장 후임으로 법무장관을 지낸 경성제대 출신인 민복기를 임명했다. 한말 세도가 민씨 일가로, 친일파로 분류된 집안 출신인 민복기는 대법원장을 지내면서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형판결을 확정시켰다. 10월 유신 후 단행된 법관 재임용 때 홍순엽과 양회경은 탈락됐다. 1971년 국가배상법 판결에서 위헌 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민복기의 뒤를 이어 대법원장이 된 이영섭도 경성제국대학 출신이다. 이영섭 대법원장은 10.26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시켰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모교 교수로 나와 인연이 깊은 은사는 민법학의 태두(泰斗)인 김증한(金曾漢) 교수님이다. 내가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할 때 법대학장이셨고, 그 후 서울대 대학원장을 지내셨으나 은퇴하시고 건강이 나빠지셔서 1988년에 돌아가셨다. 사적(私的)으로는 내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서주신 분이기도 하다. 김증한 교수의 부친이 초대 검찰총장 김익진(金翼鎭)이다. 김익진은 경성법전의 전신(前身)인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판사 생활을 하다가 변호사로서 활동했고 무고한 한국인을 법정에서 대변하였다.
김증한 교수의 동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미국식 로펌을 운영한 김흥한 변호사(2004년 작고)인데, 김 변호사는 제2공화국 시절 장면(張勉) 총리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김흥한 변호사는 장면 정권 하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정일형 박사의 사위이니까, 정대철 전 의원과는 처남 매부 사이가 된다.
해방 후 초대 대법원장은 김병로, 그리고 초대 검찰총장은 김익진으로 정해진 데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독재로 흘러가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게 된다. 우리 헌정사가 70년이 넘지만 아직도 김병로만한 대법원장이 없으며, 김익진만한 검찰총장이 없다고 보면 정확하다.
사진은 경성제국대학 본관이었던 과거의 동숭동 서울대 본관 앞에서 2013년 4월 남재희 전 장관님과 함께 JTBC에 나왔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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