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케네디와 <007 제임스 본드>

작성일 : 2022-09-14 13:45조회 : 750

케네디와 <007 제임스 본드>

대통령 또는 전직 대통령이 어떤 책을 읽고 감명 깊었다고 한마디 하면 그 책이 잘 팔리는 현상을 우리는 보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전·현직 대통령은 그런 언급을 삼가는 게 원칙이지만 대통령이 어떤 책을 읽었다는 소식이 대통령 주변을 통해서 흘러 나와서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존 F. 케네디(1917~1963) 대통령이 취임 초에 좋아하는 책 10권 리스트를 공개한 일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는 근소한 차이로 닉슨을 누르고 당선됐다. 시카고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느냐 등 논란은 묻혀 버렸고, 루스벨트, 트루먼, 아이젠하워로 이어진 ‘할아버지 대통령’에 식상한 미국인들은 젊고 매력적인 대통령 부부에 열광했다. 케네디와 재키는 매력적이었을 뿐 더러 지적(知的)이기도 했다. 책을 좋아한 케네디는 역사에 해박하며, 대학시절에 프랑스에서 공부한 재키는 문학에 조예가 깊음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이런 케네디 부부를 언론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우호적으로 대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3월, 라이프지(誌)는 ‘대통령의 왕성한 독서 습관’이란 긴 기사를 통해서 케네디가 보통 사람보다 4배나 빨리 읽으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신문 10개와 잡지 16개를 읽는다고 소개했다.(사진 2 참조) 기사를 쓴 사람은 타임지 워싱턴 지국장을 오래 지내는 휴 사이디(Hugh Sidey 1927~2005)였다. 이 기사는 케네디가 좋아하는 책 10권을 열거했는데, 링컨 대통령 전기, 존 퀸시 애담스 대통령 전기 등 역사 책과 스땅달의 소설 ‘적(赤)과 흑(黑)’, 그리고 영국 첩보소설 ‘러시아로부터 연인과 함께’이 포함되어 있었다.

10권의 책 중 사람들의 주목을 끌은 책은 전기(biography)나 고전이 아니고 영국 작가 이안 플레밍(Ian Flaming 1908~1964)의 첩보소설 ‘러시아로부터 연인과 함께’(From Russia with Love)이었다. 당시 미국에선 이안 플레밍이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케네디 대통령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하니까 별안간 베스트셀러가 돼서 미국에서도 제임스 본드 붐이 일었다.

라이프지(誌)에 실린 케네디가 좋아하는 책 10권은 정말 케네디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지, 아니면 참모진이 케네디의 뜻을 헤아려서 기자에게 알려 준 것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으나, 케네디가 이안 플레밍의 첩보 소설, 특히 ‘러시아로부터 연인과 함께’를 좋아 했던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로부터 연인과 함께’는 007 시리즈 중 드물게 소련을 상대로 한 서방의 첩보활동을 그린 것이라서 당시 국제정세에 비추어 케네디가 좋아할 만 했다.

이안 플레밍은 1960년 봄에 자기 소설을 홍보하러 미국을 방문했는데, 상원의원이던 케네디는 3월 13일 저녁 조지타운에 있는 자택으로 플레밍과 몇몇 지인을 초대해서 만찬을 같이 했다. 이안 플레밍은 케네디 대통령 취임 축하 파티에 초청돼서 대통령이 된 케네디를 다시 만났다. 케네디가 플레밍에게 어떻게 하면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냐고 묻자 플레밍은 쿠바에 위조된 쿠바 지폐를 대대적으로 살포하고 카스트로와 게바라 등 지도부가 모두 턱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턱수염이 방사능을 발산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면 이들이 수염을 깎을 것이고 그러면 이들은 쿠바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라고 답했고, 이 말을 들은 케네디는 그냥 웃었다고 자리를 함께 했던 사람이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제임스 본드 소설이 케네디의 대외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하는 문제가 있는데, 케네디는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을 소규모 특수부대 위주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러시아로부터 연인과 함께’는 숀 코네리가 주연을 한 영화로 영국에서 1963년 10월에 개봉됐는데, 영화사는 백악관에 필름을 보내주어서 케네디는 미국에서의 개봉에 앞서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케네디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러시아로부터 연인과 함께’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미국에선 1964년 5월에 개봉됐고, 우리나라에선 1965년,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007 위기일발(危機一髮)>이란 제목으로 ‘중학생 이상 입장가’로 상영됐는데, 이 영화를 보려고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007 시리즈의 대단한 성공은 CIA로 하여금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 사진 (1) 이안 플레밍과 케네디 대통령 ; (2) 라이프지 기사에 나온 케네디가 보는 신문, 잡지, 및 ‘10권의 책’ 리스트 ; (3) 하드커버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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