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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신익희 1956년 대선
작성일 : 2023-09-07 11:03조회 : 48


신익희  1956년 대선


우연하게 아시아경제에 나온 1956년 대선 기사(아래)를 읽었다. 현대사를 잘 모르는 세대는 꼭 한번 읽어 볼만한 기사다. 나는 어릴 적이나마 그 시절을 직접 겪은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1956년이면 나는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청와대 올라가는 자하문로 큰 길 옆에 지금도 있는 자교교회가 운영했던 유치원을 나는 2년 동안 다니고 지금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던 수송국민학교를 들어갔다. 유치원 시절이던 나는 1956년 대선을 희미하게 기억한다. 워낙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

1956년 대선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선생과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가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선거였다. 하지만 신익희 선생은 투표일 열흘을 앞두고 호남 방문 중 뇌출혈로 급사했다. 그 때 나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땅이 꺼지듯이 한탄을 했다. 조부모님은 신익희 선생의 운구(運柩) 행렬을 보고 펑펑 우셨다고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었다.

만일에 신익희(申翼熙 1894~1956) 선생이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정권은 교체됐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고인이 된 신익희 후보를 찍은 무효표(추모표)가 전국적으로 20%가 넘었고, 서울에선 이승만 표 보다 신익희 추모표가 더 많이 나왔다. 유권자의 교육수준이 높았던 종로구와 중구로 국한시켜 본다면 신익희 추모표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별도로 투표하게 되어 있는 부통령 선거에선 민주당 후보 장면(張勉 1899~1966) 박사가 당선됐다. 서울 사람들은 장면 박사가 부통령이 된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부통령은 아무런 권한이 없는 자리였다.

우선 1956년 대선의 배경을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1954년 5월 20일, 자유당이 장악한 국회는 이승만의 3선을 가능케 하는 개헌안을 사사오입(四捨五入)이란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서 통과시켰다. 자유당 소속 부의장이 부결시킨 것은 나중에 수학교수의 이론을 내세우고 번복해서 통과시킨 해괴망칙한 개헌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 대통령과 자유당에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재야인사들이 모여서 1955년 9월 민주당을 창당했다. 당 대표는 신익희, 최고위원은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이었고 정일형 의원(정대철 헌정회장의 부친)도 창당 멤버였다. 민주당의 노선은 반공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 즉 우익 민주주의였다.
 
야당 후보의 사망으로 간신히 3선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그 후 정권 유지에 광분(狂奔)했다. 1956년 9월, 현직 부통령인 장면 박사가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괴한의 총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그 배후가 이승만 정권 자체임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범인이 차마 장 부통령의 가슴과 머리를 노릴 수가 없어서 장면 박사는 손에 총상을 입는 데 그쳤다.

1957년 12월, 김병로 대법원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했다. 새로 구성된 대법원은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해 사형판결을 확정했고, 조봉암 선생은 1959년 7월 사형이 집행됐다. 이에 앞서 그해 4월, 이승만 정부는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현직 부통령 암살 시도, 비판 언론 폐간, 그리고 조봉암 사형 집행으로 이어지는 광기(狂氣)는 정권의 말로(末路)를 예고한 것이었다.

부정선거로 악명 높은 1960년 3.15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이번엔 민주당 후보인 조병옥(1894~1960) 박사가 미국에서 신병치료 중 사망했다. 조병옥 박사의 운구행렬을 보기 위해 서울시민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대규모 부정선거 끝에 이승만-이기붕 티켓이 정·부통령에 당선됐으나 한 달 후 학생시위로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서울 사람들, 특히 종로-중구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싫어 한 것은 그가 단지  민주주의를 유린해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 아마도 그것은 6.25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개전(開戰)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정부 요인들은 황급하게 서울을 탈출했고 시민들은 대통령 녹음 육성을 들으면서 북한군이 시내로 들어오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보아야만 했다. 적치(敵治) 90일 동안 공산군과 그 동조자들의 만행과 횡포를 겪어야 했던 서울시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한 정부에 대해서도 섭섭한 감정을 가졌다. 이런 고초를 겪은 사람들은 자식들에게도 그들이 겪은 바를 전했고 그것은 DNA처럼 전해 내려갔다.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정부 요인들도 간신히 서울을 탈출했다. 김종인 박사의 조부인 김병로 대법원장은 가족을 남겨두고 지프차에 한자리를 얻어 타고 간신히 서울을 탈출했다. 김 대법원장은 가족들에게 전북 고향으로 피하라고 말을 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전라도를 장악한 공산군은 김 대법원장의 부인(김종인 박사의 조모)을 찾아내서 총살해 버렸다. 공산군은 그들의 동료였던 남노당 간부 김삼룡, 이주하 등을 교수대에 보낸 대법원장을 용서할 수 없었다.

9.28 수복 후 서울로 돌아 온 김 대법원장은 한국 사법부를 이끌어갈 인재라고 모아 놓은 서울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의 판사들이 피살되고 납치됐음을 알고 절망했다. 반면에 사모님을 잃어버린 데 대해선 슬픔을 참고 밖으로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김종인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은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다고 평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이 같은 조부의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다.

그런 영향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부산 피난 중에 태어났으나 부모님으로부터 90일 동안 겪었던 일을 귀에 박히게 들으면서 성장했다. 사회명사였던 나의 외조부는 납북을 간신히 면하고 도봉산 암자에 숨어 지내셨다. 해방 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인 나의 큰 이모부는 6.25 당시 이승만 정부 공보국장이었다. 큰 이모부 역시 마지막 순간에 정부 차량을 타고 황급히 서울을 탈출했다. 남아 있던 가족들이 어떤 고초를 당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있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구에선 윤보선, 중구에선 정일형이 당선됐다. 물론 모두 민주당이다. 그리고 4.19 후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서 윤보선은 대통령, 장면은 국무총리, 정일형은 외무장관을 지냈다. 나의 외조부는 참의원을 지내셨다. 종로구와 중구는 10월 유신이 있기까지 자유당과 공화당 국회의원을 배출한 적이 없다. 윤보선과 정일형은 선거 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벽보만 붙이면 당선이 됐다. 이미 전설이 돼버린 그 시절의 민주당을 희미하게 나마 기억하는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일 것이다.

(지금의 민주당 당사에는 그들의 역사라면서 1955년 민주당을 자신들의 뿌리로 들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신익희, 조병옥, 장면, 윤보선, 정일형이 이끌었던 그 시절의 민주당은 이재명 송영길 윤미향의 민주당과는 1%도 공통된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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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2023년 9월 3일자 기사
[정치X파일] 대선후보 의문의 죽음…비처럼 쏟아진 무효표
류정민기자
입력2023.09.03 12:00 수정2023.09.04 00:29

(33)1956년 제3대 대선 신익희 후보의 죽음

- 인산인해 이뤘던 서울 유세 이틀 후 숨져
- 이승만 후보 득표수보다 많았던 서울 무효표

수많은 인파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대통령선거 유세에 나섰던 정치인. 그에게 기꺼이 한 표를 던지겠다고 마음을 다진 유권자들. 대선이 열리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것인지 궁금증이 커졌던 시간. 하지만 ‘의문의 죽음’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유력 대선 후보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목숨을 잃은 사건. 정치 후진국에서 벌어진 사건일까. 아니면 정치 관련 소설의 한 장면일까. 이는 대한민국 정치 역사에 깊이 각인된 우리의 역사다.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졌던 사건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국민에게 충격을 전한 인물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이다. 정치인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 외무차장 등을 역임했다.
정치인 신익희는 제헌국회 부의장이자 제2대 국회의장을 지낸 정치 거물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에 맞서 대선 출마를 준비했고, 1956년 제3대 대선에서 정치 인생의 정점을 찍고자 했다.
1956년 5월3일 오후 한강 백사장에서 열렸던 서울 유세는 ‘인산인해’라는 말을 현실로 만들어놓은 자리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를 고려할 때 상상도 하기 어려운 수십만 명의 인파가 신익희 대선후보의 유세장을 찾았다.
한국 정치사에서 유세의 명장면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게 바로 1956년 5월3일 한강 백사장 유세다.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신익희를 향한 뜨거운 민심은 대선 판도를 흔들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충격파를 안겼다.
5월15일 대선에 대한 관심은 증폭됐다. 정치인 신익희는 자유당 정부를 넘어 새로운 정부를 창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가 권력을 이어갈까.
국민적인 관심이 뜨거워지던 시점에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한강 백사장 유세가 열린 지 이틀 후인 1956년 5월5일 정치인 신익희는 호남 지역 유세를 위해 열차에 올랐는데, 뇌내출혈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정치인 신익희의 죽음은 대선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정치인 신익희의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군중들은 “사인을 규명하라”며 경무대 쪽으로 이동하려다 경찰과 충돌했다. 성난 시민들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대선을 앞둔 시기에 일어난 유력 후보의 갑작스러운 죽음. 정치 음모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인 신익희에 관한 추모 열기와는 별도로 제3대 대선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선은 자유당 이승만 후보의 당선으로 끝이 났다. 그해 대선은 당선자 확정과 무관하게 정치사에 각인될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비처럼 쏟아졌던 무효표. 제3대 대선의 무효표는 역대급이었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열린 지난해 제20대 대통령선거의 무효표는 30만 7542표다. 투표자 수의 100분의 1, 약 1% 수준의 무효표가 나왔다. 그런데 제3대 대선의 무효표는 185만 6818표에 달했다. 당시 투표수는 906만7063표였다. 투표수의 5분의 1, 약 20%의 무효표가 나온 셈이다.  서울의 경우 이승만 후보가 20만5353표를 받았는데, 무효표는 28만3459표에 달했다. 서울에서 대통령 당선인이 얻은 표보다 무효표가 더 많은 상황,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정치인 신익희를 추모하는 열기는 대선에서 무효표 행렬을 이끌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표를 던질 수는 없지만, 무효표를 행사함으로써 유권자의 정치적인 뜻을 전한 것이다. 제3대 대선은 이승만 후보의 득표율이 70%에 달할 정도로 싱겁게 끝이 났지만, 세부 내용을 뜯어본다면 당시 집권 여당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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