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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프랑크 시나트라
작성일 : 2024-06-03 14:33조회 : 154


프랑크 시나트라


1915년 12월 12일, 뉴저지 호보켄(Hoboken)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부모에서 태어난 시나트라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권투선수를 하다가 소방대원을 했고 어머니는 조산원(助産員)을 하는 등 생활력이 강했고 발이 넓어서 많은 사람을 알았다. 시나트라는 태어날 때 몸집이 작았고 숨을 쉬지 않아서 사산(死産)인 줄 알았는데, 찬 물을 끼얹자 깨어나서 숨을 쉬었으며, 태어나는 과정에서 얼굴에 긴 흠집이 생겼다. 아이를 많이 낳는 다른 이탈리아계 주민과 달리 시나트라는 형제가 없었다. 그 시절에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모여 살던 호보켄의 이탈리아 타운은 열악했으나 시나트라의 부모는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시나트라의 어머니는 출산 외에도 불법 낙태로 부수입을 올렸고, 금주법 시절에는 불법 술집을 경영했다. 금주법 시절에 술집 경영은 마피아의 도움이 없이 할 수가 없었으니, 그것이 그 시대의 모습이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가 있었던 시나트라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나트라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빙 크로스비의 공연을 보고 자기도 크로스비처럼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여러 술집과 바에서 노래를 불러서 재능을 인정받은 시나트라는 1939년에 ‘From the Bottom of My Heart’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레코드로 냈다. 그리고 당시 유명한 밴드를 이끌던 토미 도시(Tommy Dorsey)에 발탁되어 그의 밴드의 일원으로 큰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서 인기를 끌었다.

시나트라는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는 등 인기가 올라가서 토미 도시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는데, 계약에 묶여 있었다. 시나트라의 어머니가 잘 아는 이탈리아계 동네 유지가 도시에게 말해서 시나트라는 독립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유지는 마피아였다. 시나트라 가족과 마피아의 관계는 그 당시 이탈리아 주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흔히 있었던 모습이었다. (영화 <The Godfather>에도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자신들의 애로 사항을 비토 콜리오네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시나트라는 자기 이름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 때 당시 40세이던 연예 홍보 전문가 조지 에반스(George Evans)가 시나트라의 성장 가능성을 알아보고 시나트라의 공보를 담당하기로 했다. 에반스는 시나트라의 인기를 올리기 위해 여고생들을 5달러 일당을 주고 시나트라 공연장에 오게 해서 환호성을 지르게 해서 분위기를 띄웠다. 시나트라 공연장에는 이런 분위기에 휩쓸린 여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비명을 질렀고 언론은 시나트라 공연장의 열기를 보도했다. 에반스는 연예를 다루는 기자들을 구워삶아서 시나트라에 좋은 기사가 나오도록 했다. 시나트라의 공연이 있으면 여학생들이 집단으로 조퇴를 해서 문제가 됐다. 뉴욕시 경찰국(NYPD)이 시나트라 때문에 가출 여학생이 늘어났다면서 시나트라를 비난할 정도였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9년 2월, 시나트라는 5년 동안 사귀어 온 낸시 바르바토(Nancy Barbato 1917~2018)와 결혼했다. 낸시의 부모는 시나트라 부모보다 유복했고 보다 부유한 저지 시티(Jersey City)에 살았다.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부인 낸시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시나트라의 아이들은 모두 가수와 배우 등 아버지가 했던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다. 큰 딸 낸시 시나트라(Nancy Sinatra Jr. 1940~)는 1960년대에 'These Boots Are Made for Walkin'로 유명해졌고 리 헤이즐우드와 듀엣으로 부른 'Summer Wine' 등 히트곡을 많이 냈으며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 'You Only Live Twice’ 주제가를 불렀다. 그러나 낸시와의 결혼생활은 시나트라의 바람기 때문에 1950년 들어서 파경을 맞게 된다.

2차 대전이 발발해서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전선(戰線)으로 나갔지만 시나트라는 고막이 기형이라서 현역 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전쟁 기간 중이지만 우울한 기분을 잊으려하는 대중의 심리가 있었는지, 시나트라의 공연은 인기가 높았다. 조 디마지오 등 유명인들도 입대를 했음에도 시나트라는 여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공연을 했으니 시나트라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다. 그런 불편한 시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시나트라는 자원 봉사를 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달콤한 노래를 담은 시나트라의 레코드 판매와 무대 공연의 인기는 절정을 달렸다. 시나트라는 MGM 스튜디오 영화에 출연하고 컬럼비아 레코드와의 전속계약으로 당시 기준으론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수입을 올렸다. 조지 에반스는 시나트라의 부모와 부인을 언론에 노출시켜서 시나트라를 ‘가정적인 남자’로 각인시키는 등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썼다.

유명해진 시나트라는 돈도 많이 벌었으나 팜 스프링스에 대저택을 짓는 등 씀씀이가 헤폈고 모든 면에서 방만해 졌다. 언론에 자기에게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면 흥분하는 등 자기 관리가 되지 않았다. 조지 에반스는 이런  문제를 바로 잡고 시나트라를 보호하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시나트라는 최고 미인으로 뽑히던 여배우 에바 가드너(Ava Gardner 1922~1990)와의 염문을 뿌리고 다녀서 부인과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다. 연예를 다루는 언론 매체들은 시나트라 부부와 에바 가드너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시나트라를 나쁘게 취급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던 1950년 1월 조지 에반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해 2월 시나트라는 부인 낸시와 별거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자 언론은 시나트라에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대응의 귀재인 에반스가 죽자 시나트라는 자신에 쏟아지는 비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혼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해서 1951년 10월에야 정식으로 이혼하고 시나트라는 에바 가드너와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큰 뉴스였으나 거액의 위자료와 아이들 양육비를 주어야 한 시나트라는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더구나 가정적이고 가톨릭 교회를 나가는 이탈리아인이라는 이미지에서 추락한 시나트라는 인기마저 한 순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MGM과 컬럼비아 레코드는 시나트라와의 계약을 해지하기에 이르렀다.

- 사진 (1) : 첫 부인 낸시.
- 사진 (2) : 두 번째 부인 에바 가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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