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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나트라, 정치적 행보
작성일 : 2024-06-01 20:24조회 : 169


시나트라,  정치적 행보



프랑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1915~1998)야말로 그의 대표곡 <My Way>의 가사처럼 가지 않았던 길이 없었던 삶을 살았다. <My Way> 가사를 만든 폴 앵카(Paul Anka 1941~)도 그 시점까지 시나트라가 걸어온 길을 생각했을 것이나 그가 나중에 닉슨과 레이건을 지지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리우드 연예인들은 존 웨인, 윌리엄 홀덴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민주당을 지지했다. 시나트라 같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왔다. 시나트라와 그의 친구들은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리차드 닉슨은 배우과 감독, 극작가들을 하원 청문회로 불러내서 괴롭힌 ‘악마’였고 닉슨에 장단을 맞춘 로널드 레이건은 ‘멍청한 하급 배우’에 불과했다. 시나트라는 케네디의 누이동생 패트리셔의 남편인 피터 로포드(Peter Lawford 1923~1984)와 가까웠다. 그러나 1962년 여름부터 케네디 형제는 시나트라를 멀리 하기 시작했고, 마릴린 먼로가 죽고 난 후에 시나트라와 케네디 가족 사이는 완전히 단절됐다. 먼로가 죽고 난 후 피터 로포드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며 케네디 가족들과도 멀어졌고 1966년에 결국 이혼을 했다. 시나트라는 피터 로포드의 부인이며 케네디 대통령의 여동생인 패트리셔와 상당한 기간 동안 깊은 관계였다.

그럼에도 시나트라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활동은 계속했다. 1962년 11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재선에 나서는 팻 브라운(Pat" Brown 1905~1996)을 열심히 지지했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리차드 닉슨은 브라운한테 5% 차이로 패배하는 수모를 당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복하면서 케네디 정부는 흐르시쵸프에게 쿠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CIA는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비밀작전을 중단시켰다. 1962년 연말부터 로버트 케네디가 이끄는 법무부 조직범죄 태스크포스는 마피아 수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쿠바에 두고 나온 카지노 호텔을 도로 찾으려고 케네디를 지지한 샘 지앙카나, 마이어 랜스키, 산토 트라피칸트 등 마피아 거물들은 케네디 형제의 배신에 치를 떨었고 그 후 이들이 벌인 수상한 움직임은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의 총성으로 이어졌다. 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죽었다는 뉴스를 접한 시나트라는 며칠 동안 외출을 하지 않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50세를 맞게 되는 시나트라는 공연과 음반 출시에 전념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4년에 그는 <My Kind of Town (Chicago Is)>으로 오스카 상(賞)을 탔다. 그러면서도 시나트라는 정치적 행보를 그치지 않았다. 1966년 11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시나트라는 팻 브라운 지사를 위해 모금도 하고 열렬하게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선 로널드 레이건은 15% 100만 표 차이로 팻 브라운을 누르고 대승을 거두었다. 시나트라는 팻 브라운의 참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선거에서 레이건을 위해 열렬하게 지원유세를 한 사람은 리치드 닉슨이었다. 당시 야인이던 닉슨은 전국을 누비면서 공화당 후보들을 위해 지원유세를 했고 그 때 조지 H. W. 부시도 텍사스 휴스턴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1968년 초,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 베트남 전쟁 반대를 내걸고 존슨 대통령에 대해 반기(反旗)를 들고 나와서 파문이 일었다. 결국 존슨 대통령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상원의원을  지내던 로버트 케네디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경선은 유진 매카시과 로버트 케네디, 그리고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 사이의 3파전으로 진행됐다. 폴 뉴먼은 일찌감치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다. 그레고리 펙, 잭 레먼, 빌 코스비, 앤디 윌리엄스 등은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했다. 셜리 매클레인, 새미 데이비스 같이 시나트라와 가까웠던 배우과 가수도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했다.

하지만 시나트라는 휴버트 험프리(Hubert H. Humphrey 1911~1978) 부통령을 지지했다. 시나트라와 그의 딸이며 가수인 낸시 시나트라는 험프리를 지지한 유일한 엔터테이너였다. 험프리는 시나트라에게 너무 고마워했고, 시나트라는 열심히 모금을 하고 지지활동을 했다. 그러면 시나트라는 왜 험프리를 지지했을까 ? 그것은 로버트 케네디 때문이었다. 케네디가 암살된 후 대통령이 된 존슨은 마피아에 관심이 없었다. 자연히 마피아들은 안도했다. 1964년 11월 선거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과 빈곤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만일에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다면 마피아에게 그것은 악몽이었다. 또한 시나트라는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로버트 케네디가 간여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한 6월 5일 자정을 넘긴 시간에 총격을 맞고 다음 날 사망했다. 제2의 범인이 있었다는 증인과 증거가 있었으나 현장에서 검거된 암살범이 단독범행임을 자백해서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고 말았다. 로버트 케네디가 사망함에 따라 민주당 후보는 험프리에게 돌아갔다. 시나트라는 끝까지 험프리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으나 그 해 11월 선거에선 닉슨이 승리했다. 따라서 시나트라는 1962년과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와 1968년 대선에서 닉슨과 싸운 셈이다. 그런 시나트라가 1972년 대선에선 닉슨을 지지했다. 그러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 (계속)

- 사진 (1) : 케네디 대통령 취임 전야제, 1961년 1월 19일.
- 사진 (2) : 험프리를 지지한 시나트라.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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